<드픽 검색어 큐레이션: 영혼> 선정작입니다.
https://britg.kr/reviewer-novel-curation/196906
“영혼은 외부에서 인식된 기억이다.”
허무주의라고 하면 일견 세상의 모든 것이 허무하고 무상하니, 전부 의미가 없다고 보는 사상처럼 들립니다. 실제로 수동적 허무주의는 절대적인 진리의 부재, 인생과 세상의 부조리, 무의미함, 허무함으로부터 외면하고 도피한 채 염세적인 삶을 살아갈 것을 종용하지요.
하지만 허무주의로 잘 알려진 프리드리히 니체가 주장하는 것은 ‘능동적 허무주의’입니다. 능동적 허무주의는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진리가 없음을, 인생과 세상의 부조리와 무의미와 허무함을, 자각하고 직면하며 하루하루의 삶을 충실히 보내는 것입니다. 과는 대조적이지요.
능동적 허무주의에서 논하는 진리의 부재란, 관념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을 포함합니다. 선험적 이성도,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도 진리가 아니며 무의미한 것입니다. 종교적인 것도, 그러니까 신과 신앙 또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영혼 또한 그러합니다.
목단우 작가님의 <영혼 증명>은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는 기계의 발명에서 시작됩니다. 그 발명은 다시 말해, 영혼의 존재가 증명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사를 옛날 옛적에 지낸 의식이며 이젠 사라진 문화라고 부르는 점, 카페에서 일하는 안드로이드 등을 보면 작품의 배경이 지금과는 아득한 미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시대상임에도 영혼의 증명은 대사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영혼의 증명으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있지요. ‘나’는 이러한 떠들썩함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 회의적이지요.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 영혼은 다른 사람들이 떠받드는 것만큼의 가치가 아닌, 무의미한,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영혼을 논리적으로 해체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합니다. 확실히 영혼이 인간의 어떤 본질에 해당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영혼에는 기억이 포함되나요? 기억이 유실된 영혼은 그 주인을 증명할 수 있나요? 나를 인식할 수 있는 나와 타인이 없다면 영혼에 의미는 있나요? ‘나’가 말한 대로, 지금 막 증명되었다고 떠들어대는 영혼보다, 사람의 기억이 더 인간의 본질이나 흔히 말하는 영혼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살짝 사족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제가 단문응원으로 이야기했던 ‘자아’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기억 역시 자아를 구성하며, 그 외의 다양한 것들이 관여합니다. 자아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나에 대한 내 생각’이 아닙니다. ‘나에 대한 타인의 평가’도 아닙니다. ‘나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대한 내 생각’이야말로 자아 인식이고, 자아 정체성입니다. 즉 타인의 인지와 인식이 없으면,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고 평가할 수 있는 ‘자신’이 없다면 자아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가 최근에 증명되었다는 영혼을 부정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내린 ‘나’는, 영혼의 증명에 열을 올리기보다 차라리 당장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이 낫다는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능동적 허무주의와 맞닿아 있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나 남이 정한 가치에 스스로 목을 걸어버리는 게 아니라, 부조리로 가득한 지금 당장의 현실에 직면하여 나와 나의 운명을 사랑하고, 자신의 선택과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것. 트로트 가수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로도 유명한 ‘Amor Fati’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니체가 주장한 영원회귀의 결론이 바로 이것이지요.
이것은 같은 큐레이션에 선정되었던 1713 작가님의 <저승길을 걷는>과 유사한 결론을 내게 됩니다. 우리는 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소 이유는 다릅니다. 이 작품에서 배워야 하는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나 자신보다 더 가치 있는 무언가나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택하여 내 의지로 행하는 삶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없으니, 내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인 것이지요. 물론 이런 사실을 자각할수록, 그런 삶을 살기란 조금씩 더 어려워지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요.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서 능동적 허무주의에 대해 떠올릴 수 있어, 이야기할 게 많아진 것 같습니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이야기를 적어주신 목단우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