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사랑으로 가득해야만 하는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통합왕조 시대 풍물 기행기 (작가: 라쿤 덱스터, 작품정보)
리뷰어: 드리민, 5월 31일, 조회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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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 작가님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 나오는 명문인 카시다 암각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들은, 둔감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는 이 사실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작중에서 한때,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미움으로 가득하다”라고 새겨졌던 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말부에 지워지죠. 그럼 그 자리에는 원래 무엇이 새겨져 있었을까요. 이 또한 해묵은 논쟁이 되었습니다만,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라쿤 덱스터 작가님의 소설 <통합왕조 시대 풍물 기행기>에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유래한, 각각의 문명을 꽃피웠던 여러 종족이 얽혀 있습니다. 인간 종족이 일으킨 만종해방전쟁이라는 거대한 불길 끝에, 통합왕조라는 이름 아래에 그들이 하나로 묶인 것은 큰 비극이었습니다. 엘프와 드워프는 본래의 고향을 잃고, 문화를 잃고, 강제로 이주당하여, 원하지 않는 일들을 해야 했습니다. 한때 그들의 왕이었던 자들은 강제로 인간과 짝지어지고, 대가 끊어진 채 살아있는 송장이 되어 왕궁을 배회하고 있지요.

픽시와 용은 어떠하던가요. 픽시, 그 불쌍한 것들은 태생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도록 만들어진 종족입니다. 용은 신들과 맞닿은 지고의 종족이었으나 이제는 통합왕조의 옥좌 뒤에 남은 단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들은 이들대로, 인간에게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귀엽고 길들이기 쉬운 애완동물이자 심부름꾼, 그리고 자신들의 왕권이 신들에게 인정된 것임을 공표하는 상징으로서요.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왕국은 지금 천천히 쇠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을 받았던 회차는 033. (번외)독대였습니다. 이종족을 제멋대로 통합하고, 탄압하고, 착취하고, 조종하는 인간 족속의 왕이 사실은 스스로 멸망할 계획을 세워 실행한 채 거의 자포자기나 다름없는 심정으로 암살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무 생각이 없거나 자신의 권력을 정당하다고 믿을 줄 알았습니다.

단문응원에서 작가님과 나눈 문답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적어도 통합왕조의 왕족들도 나름대로 피로한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단서들은 서로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 같은 이야기들을 통해 연결해야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025. (번외)종묘사(種苗士)를 통해 그들의 유년기가 피바람으로 가득했음을 짐작할 수 있죠. 이는 라쿤 덱스터 작가님이 이전 연재작 <망상 인터뷰 기록집>(도서 출간으로 비공개)에서부터 능숙하게 보여주시던 기법입니다. 이미 작가님의 전작에서 대차게 당해놓고, 또 당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는 인간의 자업자득이라고 봅니다. 엘프와 드워프 역시 픽시에게 사랑을 나눠주지 않은 죄인이지만, 인간은 픽시를 속이고 그들에게 독인 카카오를 먹여 깊은 잠에 빠지게 했습니다. 015. 민트 초코에서 나오듯, 당시의 픽시들은 그 죽음마저도 인간이 베풀어준 사랑이라 여기며 행복하게 눈을 감았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들은 신의 사랑을 받은 종족임에도 사랑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쌓아 올린 이 사상누각을 무너뜨리는 것은 작중에서도 계속 언급되듯 사랑입니다. 정확히는 신의 대리자이자 사랑의 현신이나 다름없는 용, 사랑을 알지만 그 안에는 사랑이 없어 갈구하도록 만들어진 픽시가 그 주역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엘프와 드워프는 이미 인간과 비슷한 죄를 지은 종족이니까요. 오로지 죄가 없는 종족만이, 순수하게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종족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을 사랑하게 된 픽시와 그 픽시를 마음에 품기로 한 용이 더더욱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겠지요. 생각해 보면 이 작품의 모든 이야기는 인간의 교묘한 만행을 조명함과 동시에, 어째서 이 두 존재가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흥적으로 쓰인 이야기들의 집합이지만, 본래 허술해 보이는 거미줄이야말로 치명적인 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 이야기들을 기록해 주었던 왕궁 기록 사서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026. 경비대장과 039. 남부의 마녀를 통해 알 수 있듯, 그는 엘프의 정체성을 숨기고 지우기 위해 귀를 잘랐습니다. 용의 힘으로 인해 자신이 엘프였던 것도 잊고 말았습니다. 눈앞에 선 소중한 인연마저 알아보지 못하며 인간 왕과 용과 픽시에게 조종당하듯 이야기를 남겨왔습니다.

043. 왕궁 기록 사서에서 그가 한탄하듯,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달한다는 것은 그들의 삶을 영원히 바꿔버리는 일입니다. 그들을 왕국의 적으로 기록하고, 찾아서 색출하고, 다시금 무너뜨리는 데에 일조하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탄압과 착취는 끝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움과 분노 끝에서, 언젠가 분명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044. 사랑의 완성에서 벌어진 국왕 시해는 용을 사랑한 픽시가 끝내 참지 못하고 저지른 것이지만, 동시에 왕국 기록 사서가 모아온 이야기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다른 누군가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탄압하고 착취하고 기만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고. 진실을 마주하고 사랑을 완성해야 한다고.

 

(에필로그)방랑하는 자들은 인간 왕이 픽시에게 살해당한 뒤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처럼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러지는 않을 것입니다. 용의 힘은 망각의 힘이지만, 두려움을 장작 삼아 기억을 지우는 일은 용의 눈동자를 바라본 자들이 스스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지켜보았던 왕국 기록 사서가 그러했듯이 그들은 방랑에 방랑을 거듭하고, 두려움에 두려움을 거듭하고, 망각에 망각을 거듭한 끝에 언젠가 자기모순을 깨달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기록한 것이 언젠가 자신들이 잊고 있던 진실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사랑이 될 것입니다.

현실의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혐오와 착취와 탄압을 계속하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으로 억눌러온 어두운 과거와 기억들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자만이 자기모순을 벗어나 진실을 마주하고, 진정한 사랑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될 때까지 영원토록 방랑하고 방황할 운명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설령 그 길이 너무 고통스러워 더욱 큰 두려움으로 기억을 지워버리고, 더욱 독한 혐오로 스스로를 에워싸더라도, 언젠가는 그 모든 것들을 씻어내야만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떳떳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은 역시 사랑으로 가득해야만 하므로.

 

언젠가, 그 이후의 용과 픽시의 이야기를 보고 싶네요.

왕궁 기록 사서가 모든 진실을 마주하고 자신의 인연들을 되짚으며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는 이야기도요.

생각할 거리가 많은 이야기를 써주신 라쿤 덱스터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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