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릴 즈음, 보이는 것들 의뢰(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발톱 타투 (작가: JIMOO, 작품정보)
리뷰어: 뿡아, 5월 30일, 조회 38

    

리뷰에 앞서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리뷰는 이것으로 세 번째이며, 의뢰로는 두 번째입니다. 리뷰가 공개될 수도 있기에 몇 자 적어봅니다.

리뷰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읽지 않은 사람에게 작품을 소개하는 리뷰이고, 다른 하나는 읽은 후의 감상을 나누기 위한 리뷰입니다. 이 리뷰는 후자에 속합니다. 따라서 작품을 안 읽으신 분은 이해가 잘 안되실 수도 있습니다. 24매로 짧은 분량이니 일독하시고 리뷰를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아울러 이 리뷰는 저의 주관적 해석에 따른 글일 뿐, 작가님께서 의도하신 바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오독이나 곡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여나 리뷰에서 어떤 불편함을 느끼신다면, 그건 작가님이 아니라 리뷰어인 저의 잘못입니다.

지난번엔 글을 너무 늘어지게 쓴 것 같아 이번에는 좀 간결하게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상

먼저, 이 작품은 발톱에 타투를 새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정작 작품에서는 발톱 타투를 한 사람이 성소수자를 지칭한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처음에 저는 이것이 작가님만의 서술 방식이거나, 소재를 다루기가 조심스러워서 암시적으로 표현한 건가 싶었는데, 거듭 읽다 보니 설마 이것마저 ‘의도한 것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선입견이라는 주제를 독자가 직접 체험하도록 지레짐작하게끔 내버려둔 건가 하는 생각까지 해봤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지나치게 꼬아서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생각하면 글의 진행이 어려울 것 같으니, 저는 이 리뷰를 ‘발톱 타투 = 성소수자’라고 해석한 저의 가정하에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죽은 동창의 발톱에는 타투가 그려져 있었다.

이 첫 문장은 ‘어째서 발톱에 타투를 하는 기이한 행동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독자에게 남깁니다. 그리고 여기엔 소외된 부류(성소수자)에 대한 시선을 그려내는 이 작품만의 특징이 엿보입니다. 이 작품은 ‘정형화된 성소수자’를 등장시켜 놓고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풀어나가지 않습니다. 대신, 정체성이 어떻든 간에 모든 독자로 하여금 ‘어떤 대상을 퀴어(queer: 기이한, 이상한, 드문)하게 바라보는 입장’에 놓이도록 합니다.

작품 후반부가 되면 그렇게 ‘퀴어’하다고 생각했던, 발톱에 타투를 새긴 다른 동창이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소수 부류’였던 그들은, 사회에서 배척된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번째 동창은 외국에서 살고 있다고 나오는데 아마도 국내에서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여 나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첫 번째 동창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불분명하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저는 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추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작품에서는 발톱을 치장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봉숭아 물과 타투가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봉숭아 물이 어릴 때 학교 숙제에 의해 타의로 들인 데다가 시간이 지나면 색이 빠지는 것이라면, 타투는 봉숭아 물과는 달리 영구적으로 지워지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어 자발적으로 새기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몸에 각인해 두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사회에서 어떤 이들은 성소수자를 이상한 부류로 ‘낙인’ 찍기도 합니다. 그런데 원래 이 낙인이라는 것 또한 어떤 정체성을 표시하기 위한 ‘문신(타투)’의 기능을 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스스로 새긴 타투가 아이러니하게도 세간에 의해 찍힌 낙인처럼 비쳐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후배 형사는 발톱 타투에 대해, 독특한 취향을 ‘들켰다’고 표현합니다. 이 발언은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후배 형사(로 대표되는 다수)가 발톱 타투를 ‘마땅히 감추어야 할 부끄러운 일’로 대하는 선입견을 지닌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난 곳이 아닌, 양말 아래에 감추어야 하는 소수자의 비극성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둘 중 무엇이 되었건, 어떤 정체성이 ‘들키고야 마는 무엇’으로 취급당하는 데에선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두 성소수자가 이름도 없이 ‘동창’이라고만 언급되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이런 지칭 방식은 그들이 주인공인 남수와 근원적으로는 별다른 부류가 아니란 사실을 말해줍니다. 같은 맥락에서, 좁은 동네를 무대로 한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축소해서 보게끔 합니다. 목욕탕에서 만난 지인들은 모두 ‘동창’이 됩니다. 한동네에 사는 사람 중에서 어떤 이는 조금 퀴어해 보일지 몰라도 그들을 지속적으로 일컫는 ‘동창’이라는 단어는 모두가 같은 곳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을 이따금씩 일깨웁니다.

작품이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선입견’입니다. 담임이 남자 교사라고, 아내와 딸아이가 몇 번이나 알려주었음에도 남수는 봉숭아 물 들이기 숙제를 내주는 선생님이 여자일 거라고 속단해 버립니다. 거기에 ‘남자가 가오가 있지’라는 틀에 박힌 대사를 내뱉는 남수에게선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이 보입니다. 제가 느끼기에, 이 선입견의 특징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대목은 남수가 ‘괜한 의미를 부여할 뻔했다’고 하며 자신만의 추리에 안도하는 부분입니다. 어쩌면 무지보다 더 위험한 것은, 섣부른 자기 좋을대로의 이해일지도 모릅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괜히 있겠습니까. 남수는 어떤 것을 ‘별거 아니라고’ 받아들이며, 상대를 이해했다고 착각합니다. 이는 이해를 가장한 또 다른 편견이 생겨나는 순간을 그린 것이라 봅니다. 똑같은 문양을 한 발톱 타투를 보지 않았더라면, 남수는 자신이 편견을 갖고 있었단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작품 후반부에는 남수가 예전에는 동창의 행동에 이상하다는 감정을 못 느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대목을 미루어 볼 때, 남수의 가치관 혹은 편견은 원래 타고났다기보다는 사회로부터 학습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누군가로부터 강요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회에서 어떤 이는 종종 ‘동성애는 배척해야 하는 만행’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어떤 선거 후보는 ‘동성애 반대’를 무슨 공약으로 내걸기까지 합니다. 가끔 그런 소식을 접할 때면 그 주장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아마 그들도 사회에서 학습된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 아무런 의심 없이 재생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회에서 누군가가 잘못된 편견을 조장하고, 또 그 편견을 받아들인 사람이 또다시 자신의 잘못된 주장을 전파하는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작품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됩니다.

가로등이 없으면 내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을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저는 이 마지막 문장의 의미를 ‘반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남수가 가장 부끄러움을 느끼는 순간은 벌거벗은 목욕탕에서도 아니고, 봉숭아 물이 든 자기 발톱을 동창에게 보인 순간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들을 가려줄 어둠이 내린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의 정체는, 타투가 됐건 봉숭아 물이 됐건 캄캄해지면 구분조차 되지 않을 – 겨우 발톱에 칠해진 색깔 때문에 전전긍긍했던, 그와 동시에 편견의 피해자이며 또 생산자이기도 했던 자신의 모습일 것입니다.

 

 

장르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장르에 대한 문의를 주셨네요. 추리/스릴러라고 카테고리에 넣어두셨는데 이 작품의 장르가 어떤 것인지 고민스럽다고 하셨습니다. 둘 중 하나를 꼽자면 아무래도 추리가 되겠습니다만, 저는 그 이전에 장르를 굳이 나눌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작품의 장르는 ’JIMOO’입니다.

장르란 걸 엄밀하게 나누는 행위는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와 별개로 소위 말하는 장르물에서 사용되는 문법을 작품에 적용하는 것은 때로 권장할 만하다고 봅니다. 추리나 스릴러의 형식을 빌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는 거구요. 그런데 이 작품은 ‘추리극의 탈을 쓴’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쓰기에도 어색할 만큼 전형적인 추리극과는 몇 발짝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집필 의도를 잘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추리라고 하면 어릴 때 셜록 홈즈나 아르센 뤼팽, 애거서 크리스티 몇 작품 읽어본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러니 추리극으로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는 제 견해는 신뢰성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이건 마치 카레를 만들려고 한 사람에게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이건 라면이라고 하기에는 좀…’이라고 하는 생뚱맞은 평일 수도 있습니다만, 작가님의 의도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냥 헛다리 짚는 글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추리극으로서의 자격 미달’이라기보다는 (그런 평을 제가 감히 할 수도 없거니와) 단순히 추리극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작품 같다는 취지에서 쓰인 글임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우선, 이 작품은 미스터리를 해결해 가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그리지는 않습니다. 만일 이 작품이 정말로 ‘추리/스릴러’에 어울리는 작품으로 의도하고, 작정하여 쓰였다면 초반에 제시되었던 ‘의문의 죽음’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이야기로 그려져야 할 것입니다. 하필이면 왜 발톱에 문신이 있는지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추리극의 분위기는 유지되지 않고 관심사는 ‘부끄러운 자신’으로 이동해 버립니다.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과정도 ‘추적’이나 ‘탐구’의 과정보다는 지인의 우연한 ‘진술’로 이뤄집니다.

이 작품은 ‘의문의 죽음’, ‘자살한 참고인’, ‘수사’ 등의 소재로, 전형적인 형사극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서사를 이끌고 나가는 주요한 이야깃거리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작품의 장르를 결정하는 것은 외양이 아니라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사나 탐정이 나온다고 다 추리극은 아니겠죠. ‘추리’라고 하려면 ‘추리’를 하는 과정이 집중적으로 그려져야 할 것입니다. 의심하고, 독자들에게 궁금증을 일으키고 그러다가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고. 그런 식일 겁니다. 굳이 연쇄살인, 형사, 용의자의 알리바이, 목격자의 엇갈린 진술 같은 게 나오지 않더라도, 예컨대 ‘옥상에 널어놓은 이불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라는 문제를 집요하게 쫓아가는 주부의 이야기도 추리극이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좀 유명하면서도 진부한 예시로는, 스타워즈는 SF가 아니라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주장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광선검과 우주선, 로봇과 외계인이 나오긴 하지만, 과학적 정합성 따위는 무시한 그저 우주를 무대로 펼쳐지는 서부극으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소설을 통상적인 추리극이라고 분류하기에는 좀 거리가 있다고 봅니다.

…라고 쓰긴 했지만, 사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저는 어떤 작품이 반드시 특정 장르에 속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거든요. 그래도 굳이 무슨 장르냐고 물어보신다면, 문학적인 소양이 부족한 저로서는 ‘잘은 모르겠지만, 정통 추리극은 아닌 것 같네요’라고 말씀드릴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장르를 탐구하시는 이유가 이야기에 일종의 날개(그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를 달고 싶으신 것이라면, 저는 그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깊은 주제 의식을 담아내면서도 여러 장르에 정통한 이야기꾼으로 영화감독 봉준호 님을 꼽을 수 있겠는데요. 정작 봉준호 감독님은 장르의 파괴자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그것은 ‘장르를 활용하되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 될 것이며, 한마디로 ‘장르를 갖고 논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죠. 언젠가 봉준호 감독님이 ‘처음에 영화를 시작할 때는, 관객을 먼저 버스에 태워야 한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어디로 가는지는 감독의 마음이라고요. 저는 이 발언이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할 때, 장르란 건 이렇게 사용하는 거다’라는, 거장이 장르를 활용하는 태도와 방식을 잘 보여준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작품이 아무리 재미있더라도, 결국 사람의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은 주제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가님은 주제 의식이 잘 깃들어 있는 글을 쓰시는 것 같습니다. 좋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글을 쓰되, 특정 장르에 너무 구애받지 않고 장르의 장점을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독자를 사로잡는 좋은 작품이 탄생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쉬운 점

아쉬운 점에 대해서도 말해달라고 하셨는데, 잘 읽히지 않는 부분이 이번 글에도 있었습니다. 첫 번째 문단에서 죽은 사람이 두 명 나옵니다. 하나는 동창이고, 또 다른 사람은 동창의 동거인입니다. 그래서 ‘유가족’이란 단어가 나올 때 누구의 유가족을 지칭하는 것인지 헷갈립니다. 이 부분은 이미 작가님께 이전에 댓글로 알려드린 바가 있으니,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런 혼란이 의도된 것이 아니라 실수였다면 작가님께서 고쳐나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첫 문단은 독자의 이탈이 발생하기 쉬운 부분인 만큼, 퇴고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주시길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이번 리뷰를 계기로 좋은 작품을, 시간을 두고 깊게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뜻깊은 문학적 경험을 하게 해 준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제 부족한 글이 작가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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