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은 악을 모른다 의뢰(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선의와 악의 (작가: JIMOO, 작품정보)
리뷰어: 뿡아, 5월 23일, 조회 72

이 글이 공개될지 모르겠지만, 의뢰받아서 쓰는 글인 만큼 우선은 작가님을 위한 리뷰가 될 것입니다. 작품을 읽으며 느낀 점과, 댓글로 주신 말씀에 대한 제 생각을 하나씩 풀어 써보겠습니다.

 


 

용어 정의 : 가치관, 의도

리뷰에 앞서, 이 작품에서 제가 이해하고 느낀 바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용어 정의를 먼저 해두려 합니다. 단, 여기에서 ‘용어 정의’란 단어의 의미를 상식적으로 규명하기 위함이 아닌, 감상을 서술하기 위해 제가 자의적으로 규정한 일시적 도구로서의 용어 정의라는 점. 즉, 이 리뷰에만 국한된 용어 정의라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굳이 리뷰에 이런 용어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작품을 거듭 읽을수록 제목에 있는 ‘선의’와 ‘악의’라는 두 단어만으로는 이야기 전체를 풀이하는 것이 저로서는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부디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 소설은 크게 두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나는 ‘가치관’이고 다른 하나는 ‘의도’입니다. 얼핏 서로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저는 이 둘을 구분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제 나름대로 내려본 각각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치관 :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이냐 (인식)

의도 : 어떤 마음으로 대할 것이냐 (행동)

작품의 상당 부분은 ‘가치관’에 대해 서술되어 있고, 제목인 ‘선의와 악의’는 두 개념 중에서 ‘의도’에 해당합니다.

 

가치관 : 개방 vs 폐쇄

이 작품의 제목은 ‘선의와 악의’입니다. 풀어 쓰면 각기 ‘선한 의도’와 ‘악한 의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 소설의 주인공 경원에게는 두 의도 중 어느 한 가지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경원은 누군가에게 어떤 ‘선의’를 베풀 마음이 없으며,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악의’를 품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선의와 악의’라는 제목은 주인공인 경원의 행위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경원에게서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가치관’입니다.

작품은 경원과 부모님(으로 대표되는 시골 주민) 간의 대비를 중점적으로 서술합니다. 그리고 이 둘의 대비는 ‘의도의 차이(선의를 갖고 행동하느냐, 악의를 갖고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가치관의 차이(세상 혹은 타인을 신뢰하느냐, 의심하느냐)’로 나타납니다.

경원은 세상을 경계합니다(멀리 경계해서 이름이 경원일까요). 말하자면 그의 가치관은 폐쇄적입니다. 그리고 이 폐쇄적 가치관은 ‘환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습니다. 원래는 부모님의 가치관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도시에서 생활하다 보니 사람을 경계하는 태도를 배운 것입니다.

반대로 부모님과 시골 주민들은 개방적 가치관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또한 그들이 줄곧 살아온 환경과 거기서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둘을 종합해 보면 공통으로 ‘환경이 가치관을 형성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가치관의 차이는 ‘문을 닫을 것이냐, 열어둘 것이냐’라는 행동의 차이로도 드러납니다.

 

의도 : 선의, 악의

이번에는 이 소설의 제목인 ‘선의와 악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앞서 설명해 드린 바와 같이 ‘선의’와 ‘악의’는 ‘의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번 소제목(의도 : 선의, 악의)은 앞의 소제목(가치관 : 개방 vs 폐쇄)과 달리, 대립 구도(vs)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선의와 악의, 이 둘을 반대 개념으로 보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령 ‘악의’가 발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선의’라고 볼 수는 없겠죠. 그러므로, 앞에서 두 개념을 비교의 방식으로 설명했던 것과 달리, ‘선의’와 ‘악의’를 하나씩 따로 살피는 방식으로 접근해 보겠습니다.

먼저 선의입니다.

작중에서 선의를 베푸는 사람은, 개방적 가치관을 지닌 부모님과 시골의 이웃 주민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낯선 자에게 의심 없이 문을 열어줍니다. 간단히 보자면, 선의는 이러한 개방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이뤄진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작품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이 ‘가치관’이라는 것은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부모님과 시골 주민들은 ‘지금껏 잘 살아왔다’라는 경험을 기반으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미지근한 물에 담긴 개구리가 물 온도가 서서히 오르는 것에 둔감해지듯, 자신의 환경에 ‘적응’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가치관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원인을 과연 단순한 ‘적응’만으로 보아야 할까요? 저는 그보다 더 큰 원인으로 ‘외면’을 꼽을 수 있다고 봅니다. 흉악범이 나돌아 다니더라도 그것을 TV에서 나오는 소식으로 치부하며, 주인공의 부모님은 세상을 평화로운 곳이라고 믿습니다. 아니, 믿고 싶어 합니다. 진실을 외면하려 하고 무지 속에서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작가님의 전작 ‘아닌가 봅니다’의 리뷰에서, TV를 꺼버리는 주인공의 태도를 ‘외면’으로 풀이한 바 있습니다. ‘선의와 악의’에서는 이런 외면의 태도가 개인에서 사회로 확대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외면의 태도는 그들의 ‘개방적 가치관’을 견고하게 유지합니다.

문제는 개방적 가치관 그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 비롯된 ‘선의’입니다. 작품에서는 ‘선의’가 마치 스스로 먹이가 되어 ‘악의’를 살찌우는 자양분 역할을 하는 것처럼 나옵니다.

문이 열린 집들은 많았고 범인은 지금도 하루하루를 누군가의 선함과 친절함에 기대어 연명하고 있을 것이다.

‘적응’과 ‘외면’에서 비롯된 ‘개방적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은 그 가치관의 태생적 속성 때문에, 그들의 선의가 결국 범행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에 무분별한 ‘선의’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법률 용어를 살펴보자면, ‘악의’와 ‘선의’를 이렇게 사용합니다. (출처: 위키백과)

법률 용어로서의 선의(善意)는 어떤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며 반면 악의(惡意)는 어떤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을 뜻한다. – 김준호, 민법강의 (신정 4판), 법문사, 2003. 29쪽

이와 같이, 법률에서는 선의를 무지로 보고 있습니다. 자기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법률적 정의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주목해 볼만 합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악은 선을 알지만, 선은 악을 모른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지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악의를 살펴봅시다. 악의는 작품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작중에서 악의를 갖고 행동하는 사람은 흉악범입니다. 그런데 선의와는 달리, 악의가 나타나는 배경은 명쾌하지 않습니다. 흉악범이라고 알려진 사람은 부모님의 집에서는 물 한 잔만 얻어 마시고 갑니다. 이는 ‘선의’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악의가 발현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때는 악의가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가치관, 환경, 상황, 기분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악의가 ‘유동성’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악의는 상황에 따라 발톱을 감출 수도 있습니다. 선은 악을 모르고, 악은 선을 아는 지적인 우위의 상태에 있습니다. 악은 선보다 교활하며, 순진한 선을 제물로 삼아 하루하루를 연명해 갑니다.

세상을 좋은 곳으로 보고 싶어 하며, 고집스럽게 변치 않으려는 개방적 가치관. 그리고 그 가치관에서 비롯된 선의가 어처구니없게도 악의를 먹여 살리는 아이러니. 이것은 ‘섬뜩한 안타까움’을 남깁니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 걸까요?

작중에서 가치관의 변화를 겪은 유일한 사람은 주인공 경원입니다. 경원은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서 한동안 생활했습니다. 환경이 급하게 변했습니다. 마치 ‘이 정도의 환경 변화는 있어 줘야 가치관이 바뀐다’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이처럼 ‘적응’과 ‘외면’에서 벗어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번 벗어나서 그것을 알아버린 자는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합니다. 늘 불안해하며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들 세상이 안전하다고 믿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 세상을 알아버린 사람들은 오늘도 문을 걸어 잠급니다. 일깨워진다는 것은 그만큼 잔인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보완되었으면 하는 점 : 보다 쉬운 문장으로

‘이런 점은 보완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줬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독해력이 좋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심리를 중점적으로 묘사한 글이라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작품이 그다지 잘 읽히는 글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쓰신 어떤 이유가 있기는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문장을 좀 더 읽기 쉽게 고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쉬운 문장’이라고 하는 것은 저의 자의적 기준이고, 쉬운 문장이 좋을 것 같다는 것 역시, 이 작품의 집필 의도를 배제한 순전히 저의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하다는 점 미리 말씀드립니다.

어떤 글쓰기 조언에서는 ‘접속사를 몽땅 제거하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조언을 따르지 않고 접속사를 자주 씁니다. 왜냐하면 문장의 관계를 드러내는 데 있어 접속사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접속사가 남발된 글은 자칫하면 산뜻함이 떨어지거나 조금 지루해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무분별하게 써버린 접속사는 문장 자체가 지니고 있어야 할 흐름을 억지로 연결해 버린, 게으른 수단으로 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말씀드리는 드리는 내용은 기존 글쓰기 조언과는 부합하지 않는, 그냥 제 글쓰기 스타일에 따른 의견으로 봐 달라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어, 작품의 두 번째 문단을 그대로 가져와 보겠습니다. (번호는 제가 추가했습니다.)

①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왜 지금은 마음이 불편할까? ②해마다 강력 범죄 소식이 늘어가고 있어서? ③그 이유가 없진 않다. ④다만 옛날에도 범죄 사건이란 건 있어 왔다. ⑤시골이라 해도 다 사람 사는 곳이고, 사람과 사람이 얽히고 섥히다 보면 사건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⑥도서관에서 호기심으로 프로파일링 관련 책을 읽은 적이 있다. ⑦경원이 살던 바로 그 동네에서 있었던 끔찍한 사건이 책에 수록된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⑧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몰랐다. ⑨때때로 어려서 어른들이 못 듣게 배려해줘서 모르고 지나갔던 일도 있었고, 가까운 지인이 직접 관계된 사건이 아니고는 먼 동네 산불 난 일 정도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저는 이 문단을 아래와 같이 썼을 것 같습니다.

 

①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왜 지금은 마음이 불편할까?

저는 ‘지금은’이라는 문구와 호응할 수 있는 ‘예전에는’이라는 문구를 문장 앞에 삽입하여 비교가 되도록 하고 AB AB와 같은 대구를 이루도록 하여 이 문장이 사람들에게 친숙한 패턴이 되도록 쓸 것 같습니다.

 

② 해마다 강력 범죄 소식이 늘어가고 있어서?

저는 ‘해마다’와 관련이 있는 ‘늘어가고 있다’를 서로 붙여 쓸 것 같습니다.

 

③ 그 이유가 없진 않다.

 

④ 다만 옛날에도 범죄 사건이란 건 있어 왔다.

저는 ‘다만‘이라는 부사가 앞 문장과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이라는 부사는 보통 앞 문장에 나온 내용과는 상반되는 오직 한 가지의 예외를 서술할 때 사용합니다. 하지만 앞부분에 나온 ②와 ③은 ‘일부’ 원인에 관한 것입니다. 앞 문장에서 ‘그 이유가 없진 않다’라고 했으니 뒤 문장에서는 결정적이고 중대한 원인이 나오는 것이 어울리지 않을까요.

그리고 ‘범죄사건이 있어 왔다’고 서술되는 장소를 이 마을로 국한해, 다음에 올 문장과의 유기성이 더 생기도록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있어 왔다’라는 서술어와 잘 어울리도록 ‘옛날에도’를 ‘옛날부터’로 바꿀 것 같습니다.

아울러 문단 전체에 ‘있다’라는 단어가 많이 보이는데 좀 더 다채로운 표현을 위해 ‘있다’를 ‘발생하다’로 바꾸어 쓸 것 같습니다.

 

⑤ 시골이라 해도 다 사람 사는 곳이고, 사람과 사람이 얽히고 섥히다 보면 사건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사람이란 단어가 세 번 나오는데 저 같으면 하나로 줄이겠습니다.

 

⑥ 도서관에서 호기심으로 프로파일링 관련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문장은 앞 문장과 좀 다른 성격의 글(과거의 경험)이 시작되는 부분이므로 다음 문장의 성격을 예상할 수 있도록 ‘언젠가’라는 부사를 추가할 것 같습니다. 단락을 나누는 것도 방법이겠습니다.

 

⑦ 경원이 살던 바로 그 동네에서 있었던 끔찍한 사건이 책에 수록된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책에 수록되었다는 사실’이나 ‘끔찍한 일’이 아니라 ‘바로 그 동네’일 것입니다. 저는 ‘바로 그 동네’를 분명하게 강조할 것 같습니다.

 

⑧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 일’에 대해 좀 상세하게 쓸 것 같습니다.

 

⑨ 때때로 어려서 어른들이 못 듣게 배려해줘서 모르고 지나갔던 일도 있었고, 가까운 지인이 직접 관계된 사건이 아니고는 먼 동네 산불 난 일 정도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저는 ’때때로’와 ‘어려서’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문구’를 서로 떨어뜨려 놓을 것 같습니다. 두 단어 간의 간섭이 생기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최종적으로 이를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은 모양이 되지 싶습니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어째서 지금은 마음이 불편할까. 해마다 늘어가는 강력 범죄 소식 때문에? 하지만 이 작은 마을에서도 범죄 사건은 옛날부터 매해 발생해왔다. 아무리 시골이라 해도 다 사람 사는 곳이고, 서로 얽히고설키다 보면 사건이란 반드시 일어나기 마련이니까.
언젠가 경원은 도서관에서 호기심 삼아 프로파일링 관련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책에 수록된 어떤 끔찍한 사건이, 다름 아닌 자신이 살던 바로 그 동네에서 일어난 범죄란 걸 알고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 경원은 자기 동네에서 그런 사건이 발생한 줄은 전혀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때때로 어른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못 듣게 배려해 줘서 모르고 지나버렸거나, 가까운 지인이 직접 관계된 사건이 아니면 먼 동네 산불 난 일 정도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될 뿐이다.

글의 길이가 늘어나 버렸네요.(…)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렇게 쓰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제 기준에서 더욱 알아보기 쉽게 쓰려고 한 그냥 저의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한 대로 재구성한 것이라 의도하신 글과는 문장의 상관관계가 좀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아예 그대로 내버려두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좀 ‘말랑말랑하고 늘어지게’ 쓰면 원래 작품에서 의도하신 색깔과는 달라져 버릴 수도 있으니 이런 식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는 점 참고 정도 해주시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장르에 대해

더불어 장르에 대한 고민도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특정 장르에 조예가 있는 게 아니라, 뭐라고 감히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긴 합니다. 그럼에도 최대한 이해하고 있는 범위에서 생각을 풀어보자면 이렇습니다.

<선의와 악의>는 어떤 장르물의 규범을 따르기보다는, 일상에서 겪을만한 에피소드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을 ‘일반’ 카테고리로 설정해 두신 것은 적절한 선택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어떤 ‘장르물’의 카테고리에 포함될 만한 이야기가 되게끔 하고 싶으시다면 아무래도 ‘범죄’와 관련이 있는 작품이니 ‘추리/스릴러’ 쪽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추리로 하려면 이야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트릭이 들어가야 할 것 같고, 스릴러에 걸맞게 하려면 이야기를 좀 더 ‘쪼이도록’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기존에 전달하고자 했던 것과는 주제나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버릴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며 떠올린 소설이 하나 있습니다. 콜롬비아의 작가 에르난도 테예스가 쓴 <그냥 비누 거품>이라는 단편입니다. 국내에는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7권>에 번역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단편은 작가님이 쓰신 <선의와 악의>와는 주제나 표현하려는 바가 다르긴 하지만 ‘어떤 위험인물과 마주치는 상황’에 대해 묘사가 잘 되어 있고, 그 장면에 생각해 볼 만한 거리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냥 비누 거품>을 스릴러라고 분류하는 게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을 매우 긴장감 넘치게 잘 표현해냈다는 점에서 장르물이 가질 수 있는 규범을 잘 소화해 낸 작품으로 보입니다. 이번에 저도 다시 읽어 보긴 했는데요. 저는 어떻게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만 혹시 작가님께서 이 단편을 참고해 보신다면 장르물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긴장감 같은 걸 적용할 만한, 어떤 힌트를 얻게 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르보다는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은가’를 먼저 생각해 보시고 거기에 어울리는 장르를 차용하는 방식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결국 폭넓게 보자면 ‘장르’와 ‘순문학’의 경계란 것도 크게 의미가 없는 것 같고 따지고 보면 또 장르가 아닌 것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몇 달 전에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을 보시면 ‘장르’에 대한 고민에 약간이나마 도움을 좀 받으실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그게 아니더라도 일단 재미있으니, 안 읽어보셨다면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제가 볼 때 작가님은, 인간에 대한 복잡하고 다면적인 심리를 잘 포착하여 그것을 이야기로 펼쳐 나가는 데에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명쾌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면도 있지만, 그래서 한편으로 단순하게 어떤 것이 옳다고 정의하지 않고, 해석의 여지를 많이 열어두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장르를 쓰시든, 또 어떤 방식으로 쓰시든 그 장점을 잃지 않고 키워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으로 글을 마칩니다. 저의 부족한 글이 작가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