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뒤에 깨어났더니 알거지가 되어버린 썰에 대하여 감상

대상작품: 이방인 (작가: 구라도사, 작품정보)
리뷰어: 이유이, 4월 29일, 조회 18

이 소설 <이방인>을 읽기 시작한 이유, 간단하다. 제목 때문이다. 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란 소설을 좋아하며 특히 그 첫 문장을 사랑한다.

–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엄마가 죽었는데 오늘인지 어제인지도 모르는 주인공이라니… 이 첫 문장에서 시작해 빨려 들 듯 소설을 읽었고 주인공이 ‘어떠한 이방인’인지, ‘어째서 본인을 이방인’이라 생각하는지 느끼면서 동시에 주인공을 질책하기도 하는 복잡한 독서를 했던 게 기억이 난다.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하자면, 이 소설의 첫 문장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 참 오래도 된 인간이군

오래도 된 인간?

정신이 들었을 때 처음 들린 말이었다.

나는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오?’하고 감탄하면서 소설의 소개글을 읽었는데 <냉동인간이 되어 500년 후에 깨어난 당신. 당신은 어떤 사회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라고 적혀 있는 개 보였다. 실로 적절했다. 500년 후에 깨어난 냉동인간(까마득한 선조)을 향해 그 시대의 인간들이 할 말이라곤 ‘오래도 된 인간’ 밖에 더 있을까.

냉동인간에 대해 그리 깊이 있게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기술이 발달하면서 많은 이들이 ‘냉동’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있다. 이 소설 <이방인>은 그 냉동인간들이 깨어났을 때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또한 그들이 ‘사회’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꽤나 흥미로운 접근 방식을 갖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한마디로 돈 꽤나 있는 인간들이나 선택하는 ‘냉동인간’인데 오랜 세월이 지나 깨어나게 되면 그들의 ‘부’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들은 ‘골칫덩이’가 될 뿐이라는 게 이 소설 전체를 지탱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었다. 나는 이 세계관에 동의하는 편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출생률이 저조함에 따라 인구 수는 점차 줄어가고 멀지 않은 미래에 어떠한 나라에 ‘흡수’될 가능성이 높다. 매년 올라가는 물가 상승률만 생각해 봐도 무수한 냉동인간들이 본인들이 살던 세상에서 일군 부 따위야 휴지 조각이 될 가능성이 높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읽다 보니 어느새 엔딩이었다.

고로, 몰입력이 높은 편이다. 가독성도 좋고, 전개 과정도 그럴 싸하다. 다만, 너무 ‘급’ 끝나버린 감이 있어서 아쉬웠다. 냉동인간에게 남은 선택지란 스스로 죽는 것, 혹은 타인에 의해 죽는 것이라는 서글픈 결론을 만들어둔 것도 쌉싸레한 결말도 좋았는데 다만 ‘주인공’이 한 번은 발악하길 바랐다. 물론, 주인공이 발악했겠지만 이 소설 안에서 ‘그 시간들’이 적극적으로 다뤄지지 않아서 아쉬웠던 거라고 해두자.

현실의 인간들도 ‘결말’을 빤히 알면서도 한 번의 발악은 한다. 온갖 질병에 시달리면서 번뇌만 반복하는 주인공 말고 조금 더 행동하는 주인공이라면 어떨까. 그 결말이, 그 발악이 맞이하는 결말이 ‘죽음’이라면 나는 더 서글펐을 것 같다. 개인의 차가 있지만, 나는 ‘행동’하는, 조금이라도 ‘변화’하려고 애쓰는 주인공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 대한 평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냉동인간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 소설을 한 번쯤 읽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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