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 이성과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에 진지하게 논하기에는 미덥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온 ‘그들’을 우리는 여러 이름으로 불러왔다. 귀신이거나 요괴거나, 유령이거나, 도깨비거나 저승의 사자거나.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현상. 물리적 법칙으로 도무지 계산되지 않는 일들에 우리는 종종 그들이 개입했다고 믿어오곤 했다. 현실적으로 그들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끔은 미신과 초월적 힘에 기대곤 한다. 과학보다 귀신이 오래되었으며, 이성보다 신이 더 오래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왔다고 말하는 게 과언일까.
신은 죽었고, 신앙을 ‘미신’으로 보는 시대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보다 긴 역사를 신에 기대어 왔다.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도 ‘그들’의 힘은 유효하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왜 여전히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환상과 현실의 공존을 상상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인간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신비함을 지니고 있다. 그 신비함이 주는 힘이 막강해질 때, 사람들은 때로 그 힘에 의지한다. 그렇게 ‘신’이 만들어진다. 어쨌거나, 인간에게 이익이든 해가 되든, 좋은 신이든 악한 신이든, 위대하든 사소하든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것에는 특별한 재미가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상상하는 것으로 모자라 그들이 평소보다 자주 지상에 돌아다닌다는 날을 만들기도 했다. 귀신이 돌아다니는 날, 죽은 사람의 영혼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날, 천상의 문이 열리는 날 등 나름의 기준으로 평소보다 영험하다고 믿어지는 시기에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들’의 날은 시대와 나라를 초월해 존재하는 문화다. 2017년 개봉한 픽사 애니메이션 《코코》는 멕시코의 명절 ‘망자의 날’을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영화로 신선한 전개와 ‘죽은 자의 땅’이라는 뛰어난 공간 설정으로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이처럼 여전히 잘 만들어진 신과 영혼의 이야기는 환영받는다.
배명은 작가의 단편 〈그날 밤에 불을 놓다〉는 잘 만들어진 현대식 영혼담의 ‘스케치’처럼 보이는 소설이다.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충분한 고민을 거칠 때 독자를 울릴 수 있는 단편이기도 하다. ‘나’라는 일인칭 화자의 시점에서 이어지는 이 소설은 사건이 완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물의 행동이 완전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끝맺어진 이야기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납득이 가능한 인과와 개연성이 보완될 때,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다양한 가능성으로 뻗어갈 수 있는 소설임에는 분명하다.
명절에 고향에 가지 않기로 선언한 ‘나’와 그에게 갑자기 도착한 어머니의 위급한 소식. 명절에 귀향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홀로 다급한 ‘나’에게 한순간 펼쳐지는 비현실에는 적절한 환상성과 신비함이 깃들어 있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어쩌면 그에게도 보이지 않았어야 하는 존재를 플랫폼에서 목격한 ‘나’에게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가 들려온다. “가짜 눈”, “포졸”, “가주” 등 예스러운 말투 안에서 ‘나’는 그들이 어쩌면 평범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고 짐작한다. 이때,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네, 담배 있는가?”
〈그날 밤에 불을 놓다〉는 어머니의 급작스러운 건강 악화 소식에 놀란 주인공이 고향으로 내려가려는 과정에서 플랫폼에서 겪은 일의 짧은 순간만을 다루고 있다. ‘나’는 명절에 갑자기 생긴 일로 기차표를 구하지 못한 채 역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때 그의 눈앞에 수상한 사람들이 보인다. 암호 같은 말로 대화하며, 잔뜩 눈에 띄는 사람 키만 한 물건을 두고 짜증을 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상할 정도로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독자들은 ‘나’의 시선과 판단을 통해 그가 목격한 이들이 비현실적인 존재하는 것을 단번에 눈치챈다.
그런 ‘나’에게 더 수상한 사내가 말을 걸어온다. 다짜고짜 담배가 있느냐니. 놀란 ‘나’에게 그가 이어서 하는 말은 더욱 믿을 수 없다. 그는 ‘나’에게 플랫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그들’이 ‘여우’라고 말한다.
“여우야. 일 년에 달이 충만한 날 모난 돌처럼 보이는 종자들.”
명절에 인산인해를 이루는 역 플랫폼. 그곳에 모여 있는 여우들. 어딘지 낯선 조합이다. 남자의 말처럼 ‘충만한 달’ 아래에서 모여 있는 ‘뾰족한 돌’ 같다. 하지만 그들이 여우든 사람이든 ‘나’에게는 상관이 없다. ‘나’에게 지금 일 순위는 위급한 어머니를 뵙는 것이다. 플랫폼에 귀신들이 바글거린다고 해도, 설령 그것이 저승사자라 해도, ‘나’를 데리러 온 것이 아니라면 당장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영험한 여우라고 해도 그것들은 ‘나’와 상관없다. 최소한 시선을 끌지만 않는다면, 다음 날 무사히 어머니를 뵐 수 있다.
하지만 수상한 사내는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는 여우의 ‘세계관’을 ‘나’에게 설명한다. 그들이 들고 있는 물건은 ‘관’이다. 그리고 ‘관’에서는 ‘나’의 냄새가 난다. 남자는 ‘나’의 집에 우환이 있지는 않은지 넌지시 묻는다. 이 질문을 듣기 전까지 여우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던 ‘나’는 그 직후 여우들을 그냥 보낼 수 없게 된다. 사내의 말이 사실이라면, 여우들이 들고 있는 건 어머니의 관이 될 수도 있다. 차가 고장 나 오도 가도 못하는 그들이 ‘나’의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사내는 ‘나’에게 여우들과 관, 그들의 가주에 대해 말해준다. 관에 들어갈 사주의 사람이 봉인되면 여우들은 그것을 가주에게 가져가 제물로 바친다. 관에 갇힌 사람은 이승과 저승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증발하듯 사라지고 만다. 사내는 관을 태워야 가주의 저주가 사라진다고 말하며 ‘나’에게 라이터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가 처음 담배가 있느냐고 물은 것은 라이터를 얻기 위해서였다. ‘나’는 사내가 알려주는 방법대로 관에 불을 붙이기 위해 움직인다. 사내는 다양한 능력으로 여우들이 ‘나’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결국 관에는 불이 붙고, ‘나’는 불타는 관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이 소설은 매우 짧은 분량 안에서 다양한 존재를 다룬다. 비인간을 대표하는 여우들과 그들을 막으려는 ‘금환’이라는 남자. 그리고 그들에게서 어머니를 구해야 하는 ‘나’. 이 세 부류의 인물들에게는 뚜렷한 각자의 목적이 있다. 플랫폼은 그들의 목적이 충돌하는 공간이며, 사건이 단시간 안에 발생하고 해결되는 곳이기도 하다. ‘나’가 어머니를 뵈러 떠나는 여정 전체에서는 출발지에 해당하지만, 이야기로 보자면 시각과 종결이 모두 이루어지는 장소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독자는 분명 플랫폼 이후의 순간도 궁금해할 것이다. 날이 밝으면 ‘나’가 타야 하는 기차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는 무사할까. 그가 한순간의 꿈처럼 만난 여우들은 정말 관을 태운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날까. 더 나아가 ‘나’를 도운 금환이라는 남자는 정말 ‘나’의 편이었던 걸까. 이 소설은 풀리지 않는 여러 수수께끼를 남긴 채 열린 결말로 남는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미 설정된 인물과 사건이 더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이야기를 이어갔으면 좋겠다. 배명은 작가의 상상은 이미 다른 소설들에서 가능성을 증명했다. 여우와 그들을 쫓는 사내, 여우로부터 어머니를 구출해야 하는 ‘나’의 임무가 정교하게 맞물리는 이 이야기에는 뚜렷한 발전 가능성이 있다.
이 소설이 더 풍성한 분량으로 진행되고 맺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몇 가지 보완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완결과 수정은 온전히 작가의 몫이기에, 독자로서 이 단편을 읽으며 했던 가벼운 상상이라고 여겨주시길 바란다.
플랫폼을 벗어나 뻗어갈 가능성
이 소설의 시작에는 갑자기 위급한 상황에 놓인 ‘나’의 어머니가 있다. 그러나 후반으로 갈수록 ‘어머니’의 위급함보다는 플랫폼의 환상성이 강조된다. 이야기는 어머니의 상황에 명확한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물론 개선의 여지는 보이지만, 그것이 단정되지는 않는다. 외숙모가 ‘나’에게 전화해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연락을 전해오는 것 이상으로 고향의 상황이 전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결말이 정해질 때 더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열린 결말이 주는 매력이 분명히 있으나, ‘나’의 어머니가 처한 위급한 상황이 좀 더 구체적이고도 점진적으로 전개되면 좋을 것 같다.
외숙모로부터 처음 ‘나’가 연락을 받는, 소설의 시작 장면을 보자. 이 단편은 환상적인 존재들을 다루는 만큼, 도입부터 어머니의 ‘증상’에 환상성을 부여해 독자의 시선을 끌면 좋다. 어머니의 위급함을 단순한 기절로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평소와 다른 ‘이상 증상’을 설정하면 어떨까. 어머니가 갑자기 ‘여우가 쫓아온다’라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거나, 가주의 저주나 제사를 상징할 만한 이상한 주문을 외우거나 동물처럼 걸어 다닌다면. 어머니가 보일 다양한 증상은 여우의 등장을 효과적으로 암시하는 복선이 될 수도 있다.
또는 어머니의 ‘이상 증상’을 다른 쪽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어머니는 명절에 내려갈 수 없다는 ‘나’의 연락을 받은 적이 있다. 아무래도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입장에서 섭섭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며 단순히 ‘나’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앓아누웠다는 설정을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명절에 부모님을 뵈러 가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끝내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 여우와 맞서는 ‘나’의 감정 변화를 초반에서부터 뒤숭숭하게 잡는 것도 가능하다. 이처럼 ‘나’의 귀향을 촉발하는 어머니의 위급 상황은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소설 초반의 분위기를 다양하게 잡는다. 이 장면을 어떻게 그려낼지 고민해 보는 것도 이야기를 다시 쓰는 데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소설의 내용이 플랫폼에서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급하게 고향으로 내려가는 중이다. 여우들이 어머니를 납치할 뻔한 관을 태웠다고 해서 그에게서 모든 위협이 사라졌다면 독자들은 사건이 도입에서 이미 마무리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금환의 도움이 있기는 했지만, 떼를 지어 있는 여우들이 특별한 저항 없이 ‘나’에게 관을 내어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건의 입체감을 위해 이후 기차나 ‘나’의 고향에서 한 번 더 위기를 설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가 관을 태우는 데에 실패하고 기차나 고향에 다다라 위기를 해결하는 건 어떨까. 소설의 균형을 생각하면 안정적인 선택이다. 이야기의 분량상 지금은 단번에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본래 이야기 속 사건은 어렵게 해결될수록 독자가 느끼는 쾌감이 커지기 마련이다. 여우들의 신묘한 능력이 ‘나’와 금환을 한번 따돌린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나 그들은 ‘목적’이 다르더라도 ‘목적지’가 같기에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 사라진 여우들을 생각하며 고향에 내려가는 동안 금환과 ‘나’가 나눌 불안한 대화들과 그로 인해 조성될 긴장감은, 이후에 어머니가 완전히 구출되는 상황에서 독자들에게 더욱 쾌감을 줄 수 있다. 요컨대 ‘나’의 여정을 따라 플랫폼-기차-고향으로 공간이 확장된다면, 그만큼 다면적인 상황과 배경의 설정이 가능하다.
셋째로 금환과 여우들의 뒷이야기가 있었으면 한다. 주인공 ‘나’는 이 소설을 이끄는 일인칭 서술자이기에 그의 전사(前史)는 꽤 자연스럽게 풀린다. 그러나 금환과 여우들의 전사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여우들의 대사로 보아 금환은 이들을 ‘사사건건’ 방해해 왔다. 그렇다면 금환과 여우들 사이에 있었던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지 않았을까. 만약 이 소설의 공간이 플랫폼에서 기차, 고향으로 확장된다면, 기차 안의 ‘나’와 금환의 대화 장면은 이런 에피소드를 풀어내기 적절한 순간이다.
여우를 놓친 금환이 분노하면서 ‘나’와 더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대화가 삽입될 수도 있다. 그때, 과거에 보았던 여우들의 약점을 언급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비현실적인 존재들의 신비한 능력 싸움의 한 장면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동시에 여우들과 금환의 뒷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있다. 강하고 초월적으로 보이던 여우들에게는 어떤 약점이 있을까. 그들에게 어머니를 인질로 잡힌 ‘나’에게는 충분히 간절한 이야기다.
여우들과 금환은 잠시 등장하고 사라지기에 아까운 인물들이다. 여우들은 가주에게 바치기 위해 사람의 생명을 서슴지 않고 앗아갔을 것이고, 금환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우들의 만행을 바로잡기 위해 분투한다. 금환이 왜 여우들을 막고자 했는지, 여우들은 왜 가주에게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풀어본다면 이야기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맞물려 다층적인 의미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맺으며
잠깐 만난 환상치고는 꽤 긴 여운에 잠겨 있다. 현실에서 어머니와 ‘나’의 관계가 여우와 금환이라는 환상적인 존재의 등장으로 인해 더욱 견고해지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현실에 지쳐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는 ‘나’를 보고 싶어 하던 어머니의 마음이 이렇게라도 ‘나’에게 닿았다고 해석하면 과하겠지만, 소원하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회복되는 데에 여우와 금환이 기여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현실에서 정체된 ‘나’를 움직인 건 환상의 힘이다. 역시 환상은 종종 현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어쩌면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현실은 일정 부분 비현실에 기대어 있는 게 아닐까.
환상의 매력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도 환상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깨우칠 이야기가 곳곳에 있다. 배명은 작가의 이 단편 역시 그러하다. 때로는 놀랍거나 두려운 방법으로도 환상은 현실을 반영한다. 신과 요정, 유령과 귀신의 이야기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이것이다.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안타까움과 불편함을 느끼던 ‘나’가 결국 어머니를 위해 여우와 대적하며 불을 놓는다. 그 불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타오른다. 그날 밤, 고향을 향한 즐거움에 가득 찼던 사람들은 그 간절함을 알지 못했으리라.
그날, 플랫폼에서 타오른 불은 한 사람의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