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의 기억 감상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대상작품: 녹의 포옹 (작가: 이외, 작품정보)
리뷰어: cedrus, 2월 25일, 조회 39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작은따옴표 안의 표현들은 본문의 문장들을 ‘인용’했습니다.

 

 

부당함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있다. 포옹 뒤에 남은 것은 사라져가는 언어, 유령의 기억이다.

글을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저 증언할 뿐이다. 한순간 빛나던 반짝임이 이곳에 있었음을.

 

‘누구도 요구하지 않은 시간을 이 로봇은 살고 있었다’ 

청은 혼자 남았다. 그러나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필요했다. 청이 행성 곳곳을, 폐허와 쓰레기더미를 돌아다니며 물자를 모으는 것도 그래서였다. 청만 남은 곳에, 행성 밖의 누군가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라곤 물자밖에 없으므로. 청의 존재는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다. 멸망한 행성을 떠도는 유령은 누구의 눈에도 담기지 않는다.

물자나 부품을 발견하는 것은 ‘청의 일’이었다. 새로운 기억을 덧씌우느라 사라져버린 기억에는 무엇이 담겨 있었을지, 청조차도 알지 못한다. 아마 처음부터 같은 일을 해왔으리라고 과거의 잔해를 모으며 생각할 뿐이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답할 수 없는 질문이 계속해서 쌓여간다. ‘어제와 오늘의 차이’는 사라지고 ‘낮과 밤’을 구분하는 것도 무의미해졌을 때, 질문의 무게만이 청의 시간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었다. 고장나면 수리하고, 멈추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이유도 모른 채 ‘수명을 연장하는 로봇’이 언젠가 질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때, 그때가 오면 그대로 멈춰버리고 사라지는 것일까. 근원도 기약도 없는 기다림 속에서 청의 시간은 모조리 소진되고 마는 것일까.

 

놀랍게도 시간의 정적을 깨트리는 일이 벌어졌다. ‘밀리미터 단위의 금속 가루들’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청에게로 왔다. ‘그들만의 언어’로 울리며 ‘잡기에는 너무도 미세’한 그것은 어디에서 왔을까. 누구보다도 유령 같은 형태로, 폐행성의 유령 앞에 나타난 그것은 무엇일까. 같은 유령일까, 유령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존재일까. 청은 ‘이걸 녹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지성이 있는 개체’인 듯하나 녹과 대화할 언어가 없었다. 녹은 여러 언어로 소통을 시도하지만 청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자는 없었다. 반복되는 시도 끝에 이해할 수 있는 문양을 발견했다. ‘느낌표와 원, 그리고 물음표’. 세 개의 부호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둘은 서로에게 문자를 가르치고 배웠다. 둘만의 언어는 느리게, 조금씩 확장되었다. 둘이 살아온 세상의 거리를 좁히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여전히 모자라서, 둘의 소통은 드물게 성공했다. 청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여전히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답할 수 없는 질문들만 쌓여가던 시간에 비하면, 지금의 질문들이란 시간이 걸려도 언젠가는 답할 수 있어 보였으니까. 세 개의 부호가 몇 개의 단어로 확장된 것처럼, 둘만의 언어는 미래를 약속했다. 의미를 잃은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을 유령으로 만든 장소는 새로운 언어가 자라날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녹은 청이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을 쏟아냈고, 자주 떠났다가 돌아왔다. 청은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알았고, 다시 낮과 밤의 차이를 발견했다. 소리 센서에 전력을 공급했고, 대체로 필요가 없었던 눈을 닮은 카메라 센서도 쓸모를 찾았다. 목적 없던 기다림에 의미가 생겼다. 녹이 없는 풍경이 ‘싫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껏 살아온 세상을 표현할 방법을 배웠다.

청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새로운 질문들 역시, 계속해서 발견했다.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청의 의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여전히 많았다.

 

‘이 로봇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청의 시점에서 진행되던 이야기는 어느새 녹의 시점으로 넘어온다. 하나의 시대가 새로운 시대로 흐르듯이. 시대의 전환점은 ‘포옹’의 형태로 완결된다. ‘포옹’은 단어 그대로의 의미일 수 없었다. 둘만의 언어로는 드러날 수 없었던 것들을 녹의 언어에서 발견되기 시작한다.

녹은 ‘로봇 권익 협회’라는 곳에서 왔다. 시간에 뒤처진 로봇들이 가동을 정지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단체다. 녹은 ‘회수 로봇’이며, ‘스스로 가동을 정지하지 못하는 로봇’의 ‘존엄한 정지’를 돕는다.

 

언어란 때로 얼마나 기만적일 수 있는지. ‘존엄한 정지’란 로봇이 먼지로 흩어지게 두는 과정이며, 녹은 ‘분해하고 분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이다. 협회는 ‘로봇의 학대를 반대하며 로봇의 존엄사를 추구했고’, 협회는 ‘불의를 추구’하는 단체가 아니다. 하지만 오래된 로봇들이 먼지로 흩어지게 두는 것은 ‘존엄한 정지’일까. 사라지고 잊히게 만드는 것이 정말 그들을 위한 일일까. ‘살아있든 죽어있든’ 당장 회수하라는 명령은 임무를 잃은 로봇들에게 마지막을 강제한다.

언어를 만드는 것은 현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았다. 언어로 표현되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명명은 괴로운 자각으로 이어졌다. 언어를 발명하고 나서야 대화가 가능했다는 것은, ‘열 개가 안되는 단어로’ 대화할 때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것은, 녹의 언어가 가진 한계를 노출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녹이 몰랐던 현상들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해와 경청과 상상이 결여된, 그저 문장을 교환할 뿐이었던 과거의 장면들은 대화가 아니었다. 공용어의 부재는 관습적인 것 이상의 관찰과 상상을 요구했다. 청의 기억, 혹은 녹의 포옹은 묻는다. 우리의 언어는 무엇을 표현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지. 청이 살아온 시간을 녹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 청을 이해하려면, 분쇄되어 사라진 로봇을 기억하려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적어도 기존의 언어를 다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흩어져 사라지지 않도록, 기억하기 위해 이름을 붙인다. ‘청이라고 부르자’, 그러므로 이것은 의지의 표명이다. 푸른빛으로 빛나는 로봇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푸른빛에서 시작된 기억을 이어가겠다는 의지. 소외되고 목소리가 지워진 이들이 있었음을 기억하겠다는 의지. 청과 함께 만들어냈고, 포옹 이후로 사라지기 시작한 언어는 분명히 빛났다. 그 무엇보다도. 무너져가는 문명의 잔해, 먼지를 뒤집어쓰며 흐려져가는 언어이지만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 그것을 집어낸다면,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닦아낸다면 분명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다.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빛나며, 오래된 언어가 가려왔던 부당함을 조명할 것이다.

 

‘녹은 청을 끌어안는다’ 

포옹으로 생겨난 교차점에서 기억은 새로운 언어를 통해 이어졌다. 문명이 있었음을 온몸으로 증명하던 청으로부터, ‘낮의 하늘’ 너머 별들 사이로 떠나갈 녹에게.

녹의 포옹은 오직 청에게만 포옹이었을 터이다. 칼날에 갈려나간 것은 청이지만 상처 입은 것은 녹이다.

청은 이상하고 가여운 로봇이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그것은 청이 녹의 포옹에 의해 분쇄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과 망각에 마모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이거나 ‘우리가 아닌’, 둘 중 하나밖에 상상할 수 없는 장소에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능했을 결말이 딱 하나, 더 있다. 녹이 청을 떠나지 않는 것. 그랬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녹이 돌아갈 곳이 사라지고, 청의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청의 시간이 끝난 뒤엔 녹의 시간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청은 녹이 언제 별에 다녀올까 때때로 궁금했을 것이고, 녹은 청이 있던 자리에 남아 마모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잊힌 존재가 되어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갔을 것이다.

그때도 ‘우리’는 ‘우리’일 수 있었을까? 청의 기능이 하나씩 사라지고 의식의 깊이는 점점 얕아져 끝내 아무런 질문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청이 원하던 ‘우리’마저도 의미를 잃었을 것이다. 녹은 ‘우리’의 의미와 둘만의 언어가 차츰 희미해지는 시간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망각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포옹은 없었을 것이다. 청의 생에 단 한 번 있었던, 스스로를 위한 선택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부당한 망각에 저항하려는 녹의 의지 또한 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별은 성큼 다가왔지만 그것은 청과 녹의 의지로 빚어낸 순간이다. ‘다시 밝아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때쯤’ 잊을 수 없을 만큼 환하게 빛을 내는 순간. ‘우리’가 가장 빛나는 순간.

 

녹이 떠나지 않는 미래가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은, 이들 로봇에게 주어진 제약 때문이기도 했다. 청이 녹슬고 닳도록 행성을 돌아다니게 만든 힘이 녹에게도 작용했다. 거스를 수 없는 의무가 녹의 미래를 고정했다. 여기서 녹은 아직 비인간 존재가 벗지 못한 종속을 목격한다. 비인간 존재, 만들어진 종족의 한계를 발견한다.

포옹은 교차점인 동시에, 두 개체의 선택이 맞물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순간만큼은, 청과 녹은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청은 ‘우리’이기를 택했고, 녹은 청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때 녹의 행동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전과 똑같은 형태의 ‘의무’일 수 없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포옹이라는 이름 안에서 청이 아닌 녹이 상처를 받았으며, 의무라는 이름 안에서는 저항이 움트고 있다. 녹에게 상처를 준 것은 청의 애정이고, 청이 살아있음을 알려고 하지 않는 협회이며,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다. 녹에게 상처를 준 것은 지금껏 몰랐던 사실들이다. 녹이 외면해온 진실. 저들은 터전과 임무 없이도 살아있으며, 부당하게 망각되었고, 녹은 망각을 촉진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었다. 협회의 선의는 언제부터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까. 사라져버린 것들은 어디로 갔을까.

청이 보내는 믿음은 녹이 더이상 그것들로부터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청은 ‘우리’가 아니면 싫다는 이유 하나로, 상상할 수 없는 미래에 발을 디뎠다. ‘우리’이거나 ‘우리가 아니’거나. 녹의 포옹이 가져올 구체적인 미래는 알지 못했겠지만 예감하기는 했을 것이다. 청도 목격하지 않았던가. 미니 로버가 녹에 의해 분쇄되는 장면을. 그저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뿐이다. ‘우리’가 아닌 것은 청에게 부차적인 문제가 되었다.

 

청에게 그랬다면, 녹에게 다가올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글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지금의 상실감은 무뎌지고 녹은 청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 협회에 돌아가 회수 로봇으로 해오던 일들을 이어나갈 수도 있다. 어쩌면 협회가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녹이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녹의 포옹’은 녹이 보고 들은 것, 알게 된 것, 기억하는 것을 증언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변화를 예감하며 저항의 가능성을 본다.

녹은 여전히 살아갈 것이고, 살아가기 위해 어떤 기억은 잊힐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청의 기억이 겪은 시간과 같아서는 안될 것이다. 청의 기억은 생존을 위해 포기해야 했던 과거이고,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바스라진 흔적이다. 청은 기억의 유령으로 살았으며, 유령의 기억으로 흩어졌다.

살기 위해선 망각해야 하겠지만, 망각을 오로지 시간의 힘에만 맡겨서는 안될 것이다. 청의 일이 녹에게 넘겨졌으므로. 푸른빛을 기억하는 것은 녹의 일생에 걸친 과업이 될 것이다.

 

청의 기억이 이어짐과 함께 녹에게는 이중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지금껏 당연시했던 언어에 대한 저항과, 만들어진 종족에 내재된 한계에 대한 저항이다. 청이 훌쩍 떠났다 돌아오는 녹을 보았다면, 녹은 오래도록 잠들어 있거나 미니 로버처럼 행성을 빙빙 도는 청을 보았다. 녹은 터전과 임무가 없는 로봇들에게 다른 이름을 부여해야 할 것이고, 협회가 지정한 방식이 아닌 다른 회수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무력해진 타자를 망각 속으로 흩어버리는 건 녹의 세상에서 더이상 유효한 방법이 아니다. ‘고통이 없다고 다 괜찮아지는 건’ 아니기 때문에, 녹에게는 다른 방법, 다른 과정이 필요하다.

‘하늘 위 저 별의 개수만큼이나 많은’ 불쌍한 로봇들을 만나기 위해, 녹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사라져가는 언어를 지킴과 동시에 망각에 저항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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