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밟은 땅이 속하는 동네, 동네가 속한 도시, 도시가 속한 나라, 나라가 속한 대륙, 대륙이 속한 지구, 지구가 속한 태양계, 태양계가 속한 우리은하, 우리은하가 속한 우주. 이렇게 장소를 점점 확장해 나가는 상상을 하다 불현듯 내가 선 이 땅과 ‘나’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아 보이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었을 것이다.
감히 상상하는 것조차도 어렵고 ‘무한’이라는 개념으로만 어렴풋이 이해하는 우주를 통해 우리는 때로 지금의 고민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크지 않으며, 개인의 삶 역시 무게감을 조금 덜어 버리고 살 필요가 있다는 깨달음을 얻곤 한다. 교과서나 학교, 어른의 말씀이나 스쳐 가는 명언에서 무한한 우주와 유한한 인간은 종종 대비되곤 한다.
우리는 찰나를 산다. 그 찰나는 지금 우리가 아는 숫자를 다 세기에도 부족하다.
잠깐, 지금 우리가 아는 숫자 역시 무한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숫자들은 당연히 정해진 시간이 얼마나 길든 그 안에 세지 못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아는 ‘무한’한 숫자가 정말 많은 것일까. 여기서 또 우주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겠다. 우리가 아는 숫자가 많을까, 우주에 있는 별의 숫자가 많을까. 여기서 우리가 ‘아는’ 숫자란 무엇일까. 우리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 있을 것이라고는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걸 알아도 감히 구체적으로 깨달을 수 없는 것. 어디까지가 우리의 ‘지식’ 범위 안에 있는 숫자일까.
우리의 숫자는 늘어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줄어들기도 한다.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두 가지 경우다. 음의 무한대로 한없이 절댓값이 커지는 것. 그리고 어떤 정수와 정수 사이에서 소수점 아래로 무한히 0을 찍어 내려가는 것. 둘 다 분명 값이 ‘작아진다.’ 양수와 음수, 소수점 아래 무한히 이어질 수 있는 소수들을 모두 합치고 유리수와 무리수, 실수와 허수를 합쳤을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배우는 모든 수의 집합이 된다.
‘수’를 밝히는 데에만 일평생을 바친 수학자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았을까. 그들의 업적으로 인류는 수에 대한 정의를 거의 다 세운 듯하다. 사람과 사람, 도시와 도시,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가 약속을 맺고, 좋은 사이를 유지하기에는 지금의 수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이 수들로 물건을 계산하고, 도시를 계획하고, 우주선을 발사한다. 하지만, 지구 밖에서도 과연 이 수 체계가 통할까.
경희 작가의 단편 〈숫자도 못 세는 게〉는 지구와 수 체계가 전혀 다른 외계와의 접촉 및 협상 과정을 작가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그리는 초단편이다. 지구상의 수들은 고사하고 정규 교육과정 내의 수 체계도 졸업과 함께 흔들린 우리가 외계의 수를 다루는 이 소설을 읽을 수 있을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 다행히 그 외계인은 이야기에 등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다만 지구와 다른 수 체계를 가진 외계와의 협정 도중 분노하는 한 언어학 교수가 나온다.
교수는 외계인과의 협상 도중 통역을 중단하고 화를 내며 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상황이 종료된 후, 문제를 일으킨 교수와 외교사절단장이 짧게 나눈 대화가 이 소설의 내용이다. 그러니 적어도 이 단편에는 이상한 숫자를 읊어대는 외계인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이 교수의 태도를 의문스럽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교수’는 그 자리에 단지 통역을 위해 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왜 외계의 수 체계에 분노를 표하는 것일까. 애초에 그는 번역에 필요한 간단한 수 체계만 익히면 되었다. 그리고 그 숫자에 따라 ‘지구의 흙과 바닷물만 좀 퍼주면 광속의 열다섯 배 속력을 내는 워프 엔진 기술’을 얻을 수 있는 협상 자리에서 지구 대표와 레흐놀루벤스키히야 대표의 대화만 원활히 진행해 주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협약을 망친 것도 모자라, 외계의 지구의 문을 당장 걸어 잠그고 그들과의 어떤 협약도 맺지 않을 것을 외교사절단장에게 요구한다.
그는 왜 그렇게 화가 난 걸까. 대체 무엇이 그의 분노를 들끓게 한 걸까.
이 모든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지구의 수를 열심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외계인은 0과 1 사이에 적어도 우리보다 열 개의 정수를 더 가진 존재들이니 말이다.
자틀라투쉬흐 영사가 지구에서 두들겨 맞은 이유
경희 작가의 〈숫자도 못 세는 게〉는 평행우주 속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음’의 가능성 놀이를 통해 ‘지구와 전혀 다른 새로운 수 체계가 존재할 수 있음’을 가정하고 들어가는 매우 흥미로운 소설이다. 짧지만, 그만의 신선한 발상으로 지구인의 편협한 시야에 경고하는 이 소설은 몇천 자의 분량 안에 온 우주가 ‘거래’하는 섭리를 담은 듯 많은 메시지를 포함한다.
매우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한 가지 ‘사건’을 암시하는 질문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교수님,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교수는 자틀라투쉬흐라는 외계 영사를 지구 역사를 통틀어 아마 가장 중요한 거래였을 무역 협정 자리에서 폭행했다. 교수는 영사의 말을 통역하지도 않은 채 그저 분노에 싸여 충동적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교수가 이런 행동을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최소한 ‘언어학자’였을 그의 입장에 공감해 보자. 처음에는 그도 지구인과 외계인의 통역만을 위해 레흐놀루벤스키히야 언어를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번역’과 ‘통역’은 생각보다 정교한 언어 이해 과정을 요한다. 글자와 단어는 물론이고 숫자 체계에 대해서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하면, 당연히 난감한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지구에서는 전 세계의 수 체계가 어느 정도 통일되어 있다지만,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외계 존재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숫자 역시 면밀히 조사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교수는 그들의 수가 뭔가 지구와 크게 다르다는 점을 발견한다. 처음에는 “조금 특수한 이십진법”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아예 다른 정수 체계를 쓰고 있다. 1을 반으로 접었을 때, 지구에서는 0.5라는 유리수가 되지만, 레흐놀루벤스키히야에서는 1을 반으로 접은 수가 정수다. 교수가 밝힌 것만으로도 그들의 수 체계에서 0과 10 사이에는 우리보다 열 개의 정수가 더 포함된다. 교수의 번역을 본 수학자들, 특히 ‘한국’ 출신의 수학자들은 ‘수알못’이나 ‘문과’라는 용어를 쓰며 그가 잘못 해석했다고 비아냥거린다. 이 장면은 완성도 높은 초단편 소설은 모든 화소(話素)가 그렇듯 꽤 예리한 계산의 결과로 삽입되었다.
언어학 교수와 수학자들의 대립에서 독자들은 아직 같은 행성 안의 존재조차 전부 이해하지 못하는 지구인들을 본다. 외계인의 숫자를 모두 안다고 잘못 자부하면서, 정확한 통찰력을 지닌 동족의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의 행동에는 분명 모순이 있다. 사실 인간의 이 고질적인 ‘차별’ 역사는 이미 수많은 지식의 진보를 침해해 왔다.
경희 작가의 상상 속, 외계 문명과의 직접 접촉이 이루어진 지 시간이 많이 지난 미래에도 이런 상황은 반복된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상상 속의 장면만은 아니라는 걸 모든 독자는 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질 때면 차별의 객체들은 무력함을 경험한다. 자신의 판단이 의심 없는 사실임에도, 비본질적인 이유로 외면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가. 시간이 흘러, 결국 ‘그’의 의견이 맞았음은 반드시 드러난다.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의 주장은 사후에 진실이 밝혀지기도 한다.
경희 작가는 ‘수알못’이나 ‘문과’ 등 우리나라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이들이 흔히 이학계열의 지식이 부족하다는 편견으로 인해 듣는 원색적인 말들을 언급한다. 이 단어들은 결국, 인류사 가장 중요한 협상을 결렬하는 파국을 가져오고야 만다.
숫자도 똑바로 못 세는 것들이랑 무슨 대화를 한다고
숫자도 똑바로 못 세는 것들이랑 무슨 대화를 한다고.
레흐놀루벤스키히야 대표인 자틀라투쉬흐 영사가 지구 대표들에게 한 마지막 말. 차마 교수가 번역하지 못한 말은 이것이었다. 조금만 더 빨리 교수의 말이 수학팀에 받아들여져서 그들이 협상 이전에 새 언어를 기반으로 한 수 체계 해석을 완성했다면, 외계 영사에게 이런 말을 듣는 수모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작가는 독자에게 한 번 더 질문한다. ‘지구의 수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인간이 과연 우주의 수 체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요컨대 인류가 유구히 쌓아 온 차별의 역사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동시에 인간은 우주를 이해하지 못하는 미물에 불과하다. 온전히 마음을 열고 모든 지식을 흡수해도 부족한 지구인들은 타인과 나 사이에 선을 그으며 발전의 기회를 두 번 제한하고 있다.
이 소설 속 인간에 대한 이중의 해석은 광활한 우주를 해석할 수 없어 결국 분노해 버린 한 사람을 주목한다. 독자들은 초단편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짧은 이야기 안에 우주 전체가 들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마치 우주 전체에서 교수 한 사람까지의 줌인, 줌아웃이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듯하다. 인간이 가진 지식의 한계, 개인이 사회의 편견과 싸우는 한계가 동시에 덮쳤을 때, 이미 그는 이럴 것을 알고 있었다.
“제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레흐놀루벤스키히야 따위가 아닙니다. 제가 이 불쾌한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제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뇌가 우주를 이런 미개한 방식으로밖에 인식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영원히 진정한 세계의 지극히 적은 단면밖에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입니다.”
협상 자리에서 교수가 내비친 분노는, ‘숫자도 똑바로 못 세는’ 인간들을 한껏 멸시하는 외계인의 말을 차마 해석할 수 없음에서 시작되었다고 일차적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지식과 사고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해 고작 ‘숫자도 똑바로 못 세는’ 존재로 전락해 버린 인간종으로서 교수가 느꼈을 충격이 담겨 있다. 그는 매우 짧은 시간 안에 판단한다. 그의 분노는 어쩌면 계산적이었다. 그 협상이 체결되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내면에서 빠르게 솟아올랐을 것이다.
새로운 숫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우주를 측량하며 다른 존재와의 거래를 완성할 수 있을까.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전혀 모를 것이다.
맺으며
경희 작가의 소설은 매우 미시적이고 구체적이며 선명하게 타인의 눈을 사로잡는 것에서 시작해, 거시적이고 원론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로 지평을 넓혀 간다. 좋은 작가는, 깊은 사유를 끌어낼 수 있는 질문을 독자에게 바로 던지지 않아야 한다. 작가는 아직 독자의 경험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독자가 작가의 글을 읽은 횟수, 사전에 갖춘 지식, 자라온 환경과 조건 등이 모두 글의 이해에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은 어떤 개인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되지 않으며, 더 나아가 독자마다 지닌 사소한 해석의 차이를 만든다.
좋은 작가의 역할은 그런 독자 개인의 차이를 충분히 이해하는 동시에, 누구나 쉽고 구체적인 장면에서 깊고 광활한 세계로 나아갈 길을 단계적으로 만들어 두는 것이다. 경희 작가는 적어도 내가 아는 그의 모든 글에서 뛰어나게 ‘좋은 작가’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숫자도 못 세는 게〉는 그런 경희 작가의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짧기에 강렬한, 그러나 우주의 모든 숫자만큼이나 무한하고도 섬세히 뻗어나가는 생각의 갈림길에서는 무엇도 놓치고 싶지 않다.
참 이상한 일이다.
분명히 누군가 멸시받고, 내가 사는 행성이 송두리째 큰 손해 앞에 놓이는 내용의 단편을 읽으면서도, 나는 그 안에서 속절없이 해체된 독자들이 어떤 숫자를 물어오든, 충분히 위로하고 슬그머니 다정한 웃음을 지어주는 좋은 이야기꾼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