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왜 호러인가? 공모(비평) 공모채택

대상작품: 뚱뚱한 건 죄가 아니에요 (작가: 노말시티, 작품정보)
리뷰어: soha, 17년 7월, 조회 100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글은 ‘호러’ 장르로 쓰여진 글이다. 그렇다면 소설의 주인공인 박태호 작가에게 있어서 이 세계는 왜 두려운 곳인 걸까? 박태호에게는 애석하게도 그를 공포로 몰아넣는 것은 그가 만들어낸 소설 그 자체이다. 그는 세상에 맞서기 위한 무기로 글을 골랐지만, 그 글이 역으로 그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비극을 설명하려면 우선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인 단어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대부분 객관적이지가 못하다. 숫자 1은 수학에서는 그저 1일 뿐이지만 언어에서는 다양한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고독, 외로움 등의 다른 이미지들이 그 위에 덧붙여지고, 이 중 무엇이 가장 주된 상징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강자들이다. 이 소설 안에서는 제목의 크기를 결정한 출판사와 토론의 판을 미리 짜둔 방송사가 강자의 예가 될 것이다. 그들은 단어에 씌워진 이미지의 힘을 알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집단을 갈라서 누가 약자인지를 설정한다.

단어에 한 번 이미지가 씌워지면 이를 바꾸기는 매우 어렵다. 박대호의 경우 지하철 내에서의 행동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직접적으로 이 이미지를 바꿀만한 지위가 없다. 그는 비만에 씌워진 이미지를 반어법을 통해 우회하려고 했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비만에 대해 하는 생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반어법이 작가의 의도대로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독자들은 문장들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그 관계를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요즈음의 세상에서 어느 글이 읽을 만한 글인지 결정해 주고, 내용 중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것 또한 강자들이다. 세상에는 읽을 글이 너무 많고, 읽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지불해야 하며, 많은 사람들은 그럴만한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토론회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미디어가 이미지를 자극적으로 포장하여 제공해주는 좋은 예시이다. 각본에 따라 전달되는 정보는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시작하기도 전부터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결정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비만에는 ‘나태’라는 이미지가 성공적으로 안착되어 있고, 이 부정적인 이미지는 평범한 사람들이 비만인 자들에게 보낼 수 있는 동정까지도 모두 제거한다. 비만인 자들은 약자가 되고, 사람들은 강자로부터 약자들에게 부여된 이미지를 재생산하면서 그들에 대한 핍박에 참여한다. 이렇게 자신이 약자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으로부터 그들은 자신감을 얻는다.

박대호가 오백키로에게 자신의 글을 빼앗기는 과정은 이런 의미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오백키로는 강자 속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라 약자 속에서 자란 사람이며, 노력을 통해 강자 집단으로 편입된 사람이다. 이러한 일은 강자 집단 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은 일이다. 계층 간의 이동은 약자 집단에게 부여된 단어의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강자가 그 이미지를 통해 얻는 혜택 또한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계층 간 이동에 성공한 사람은 이러한 압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약자를 더 강하게 핍박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보이려고 한다.

오백키로는 매우 악랄하면서도 창의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임무를 완수한다. 그는 약자인 박대호가 저술한 소설을 해체했고, 그 중 자신이 필요한 문장들을 골라서 글을 재구성했다. 재구성된 글은 약자가 강자에게 보내는 비난을 담고 있었으며, 이는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차별의 동기이자 근거가 된다. 그리고 박대호가 저술한 소설을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집어삼킴으로써 그는 박대호가 자신의 글로 복수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없애 버렸다.

이렇게 박대호는 자신의 글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무서운 일이지만 결말부에서 이야기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박대호가 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의도는 변질되고, 오백키로가 그가 가졌던 작가로서의 위치를 빼앗아버렸으며, 사람들은 박대호보다 오백키로를, 그리고 박대호의 글을 난도질해서 오백키로가 새로 쓴 글을 훨씬 좋아하지만 박대호는 여전히 글을 쓴다. 그는 자신의 글로 인해 그렇게 상처를 입고도 여전히 글을 포기할 수가 없다. 글로 돈을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박대호가 처음에도 말했듯이 허기를 채워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펼치고자 했던 사상을 덮고 팔리기 위한 책을 쓴다.

여기서 이 소설의 제재가 비만이라는 것은 이 비극을 더 아이러니하게 만든다. 박대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보겠다.

사람은 허기를 채워야 살 수 있다. 뱃속의 허기를 덜 채우는 사람은 그만큼 정신적인 허기를 채운다. 물론 훨씬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박대호의 삶은 소설이 끝나도 계속 이어지겠지만 나는 그가 그의 정신적 허기를 영원히 채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서 글을 쓰고, 글을 써서 받은 돈으로 먹고 살 것이다. 자신이 글을 통해 펼치고 싶었던 사상은 아무에게도 닿지 못할 것이고, 그는 아무리 뱃속에 음식을 밀어 넣어도 정신적 허기를 채우지 못할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었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반지하 골방에 홀로 갇혀 지낼 것이다.

이것만큼 무서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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