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스포일러 방지를 포기했습니다. 스포 없이 리뷰를 쓰는 게 불가능하거든요. 스포 태그를 달아둔 건 다른 작품에 대한 스포들입니다. (…) 부디 작품을 먼저 읽고 리뷰를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시간여행과 로맨스의 만남은 매혹적입니다. 시간여행은 낭만적인, 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상상을 극 속에서 실현시켜 주는 훌륭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이프온리’나 ‘시간여행자의 아내’를 비롯한 유명 작품들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만화 ‘레이브’의 명장면이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는데요. 지그프리트라는 마법사는 사랑하는 이를 불가피하게 50년 후의 미래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의 위장 무덤 앞을 지키다 백골로 화하게 됩니다. 미래에 도착해서 그 해골의 정체를 알게 된 여성은 오열합니다. 주인공 커플 주변에 자주 등장하는 까마귀가 나오는데, 알고보니 이 까마귀가 그녀와 다시한번 함께 싶어하던 주인공의 소원이 이루어진 환생(?)이었다는 반전이 있습니다.
아무튼 작품 얘기를 해 보자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홀로 타임머신 개발을 계속하는 사내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타임머신“에서 접했던 익숙한 플롯입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살리기 위해 주인공이 타임머신을 만드는데요, 과거로 가서 여러가지 시도를 해보지만 무슨 수를 써도 여자는 죽습니다. 그 이유가 후반에 드러나는데, 그래야만 주인공이 타임머신을 만들 동기가 생기기 때문이죠. (제 생각에 주인공이 여자를 과거로부터 납치해서 미래로 데려오면 모순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될 것 같았지만, 타임머신을 만들어낼 정도의 초천재였던 주인공은 아쉽게도 그런 생각은 못한 건지 소설 원작에 따라 쌩뚱맞게 미래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로 떠나버리죠.) 이 작품의 뼈대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플롯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소설을 이루는 서술들은 그렇게 친절한 편은 아닙니다. 기본 글꼴로 된 독백의 형식과 이탤릭체로 된 일지의 형식이 번갈아 나오고, 그 사이에 큰따옴표와 슬래시가 달린 대사들이 섞여 있거든요 (큰따옴표는 혼잣말, 슬래시는 대화로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20xx년으로 표현된 년도 때문에, 20xx년 12월 31일과 20xx년 12월 25일 중 어느 쪽이 시간적으로 앞서 있는지 헷갈렸었습니다. 그 다음해 크리스마스일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계속해서 읽으면서 흐름을 파악한 다음부터는 괜찮아집니다.
솔직한 감상으로는, 시간 여행에서 오는 인과관계가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은 일주일 단위로 미키를 과거로 보내면서 실험을 했습니다. 실패한 실험 중에는 ‘눈앞에서 사라진 미키를 보고 기뻐했던 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사라졌던 미키는 어떻게 다시 실험실로 돌아온 걸까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미키는 여러마리여야 합니다. 매주 과거로 (또는 미지의 4차원 세계로) 보내야 하니까요. 한 마리로는 단 한 번의 실험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작품 내에 그런 뉘앙스의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몇 달을 함께해 온 미키’라는 구절로 한마리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었지요.
이에 더해서, 다른 리뷰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엄밀히 말해서 과거로 미키를 보내는 실험이 성공했다면 ‘나’는 이미 실험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즉, 이미 미키가 도착한 것을 보았으므로 ‘나’는 이번주에는 성공한다는 확신을 갖고 즐거운 마음으로 실험을 진행해야 합니다. 해리포터에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해리 포터가 익스펙토 패트로눔 마법을 성공할 것을 알고서 마법을 시전한
반면에 만약 시간여행에 따라 평형세계가 분기하는 세계관이라면, 실험을 한 당사자인 ‘나’는 과거로 미키를 보낸 후 실험이 성공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미키가 과거로 보내진 시간대에서는 이미 평행세계가 분기해버릴 테고, 실험이 성공한 것을 깨달은 것은 그 세계의 ‘나’일 뿐 미키를 보낸 ‘나’가 아니니까요. 이런 세계관이라면, 과거로 메시지를 보내서 효정을 살릴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이쪽 세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만화 ‘드래곤볼’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방식입니다.
어찌 되었든, 작품에서는 그런 식으로 실험의 성공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사망한 연인 효정을 구하기 위해 과거로 메시지를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합니다. 그러면서 과거로 여행을 하면 수명이 줄어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과거 여행 중에 시간이 거꾸로 흐르나요? 그럼 그 사이에 밥은 어떻게 먹고 화장실은 어떻게 가죠? 아니면 그런 시간 관념은 느끼지 않고 한순간에 팍 늙어버리나요?) 그리고 먼 과거로 돌아가, 어린 시절의 효정을 만나 펜던트를 건네주고 사랑으로 키웁니다. 에로스가 부성애로 승화된 것입니다. 한 편의 동화를 보는 것 같은, 아름다운 마무리입니다.
시간여행을 다룬 작품들에서 종종 나오는 개념으로 ‘공짜 패러독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분명 물건은 있는데 깊이 생각해보면 원작자는 없는, 인과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영화 터미네이터에서는 미래에서 온 cpu와 로봇 팔을 바탕으로 현재에서 터미네이터를 개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럼 터미네이터를 만드는 기술은 만들어낸 사람이 없이 그냥 공짜로 이 세계에 주어진 것과 다를 바 없어집니다. 기술의 근원을 쫓으면,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낳게 되는 무한한 사이클에 갇혀 버리는 겁니다. (…갑자기 우로보로스가 떠오르네요) 다른 예로, 백투더 퓨처에서는 1985년에서 1955년으로 온 마티 맥플라이가 아직 작곡되지 않은 노래를 연주하는데, 이 때 옆에 있던 사람이 원곡의 작곡가에게 그 노래를 전화로 들려줘서 영감을 줍니다. 그럼 그 노래를 맨 처음 만든 건 누굴까요? 마티? 원곡자?
이게 극단적으로 간 경우로, 로버트 하인라인의 ‘그대들은 모두 좀비’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고아로 태어나 자란 여성이, 남성화 수술을 한 미래의 자기 자신과 만나 여자아이를 낳고, 나이가 든 후 과거로 돌아가 아이를 납치해서 고아원에 버리는 내용입니다. 즉, 자기 자신이 아버지이며 어머니인 (+납치범인) 극단적이고 충격적인 설정이 됩니다. 그럼 이 주인공은 어머니가 누구죠? 그녀는 어디서 온 거죠? 그냥 공짜로 이 세계에 주어진 건가요? 놀라운 내용이지만,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시간여행 작품이 다 그렇겠지만…
이 작품에도 비슷한 패러독스가 나옵니다. 펜던트는 효정이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 받아서 주인공에게 준 것입니다. 근데 그 할아버지는 펜던트를 효정에게서 받았습니다. 그럼, 아스클레피오스가 만들어낸 이 펜던트는, 어떻게 이 커플들의 손에 들어온 걸까요? (하지만 리뷰어 분들은 아무도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더군요… 역시 제 입맛이 이상한가 봅니다…ㅠ)
사실 이러한 타임리프+로맨스 장르에서 세세한 설명을 물고 늘어지면 지는 겁니다. 이야기 자체가 주는 잔잔한 감동을 놓칠 수밖에 없거든요. 저도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하나의 판타지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읽었기에 이야기의 여운에 취할 수 있었고,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분들도 그러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리뷰를 쓰면서 이성적으로 찬찬히 읽다 보니, 한 명의 독자로서 제 안의 이과적 감성이 물음표를 띄웠다는 점은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독자에게 불필요한 설명을 늘어놓으면 이게 소설인지 사고실험 보고서인지 구분이 안 될 겁니다. 그렇지만 저 또한 지인들로부터는 ‘설명이 부족하여 세계관이 잘 와닿지 않았다’는 피드백을 받는 걸 보면, 결국 독자의 성향 차이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번 뱀일장 출품작 중 하나이면서, 타임리프 문학상 출품작일 것으로 생각되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독자분들께 일독을 추천드립니다. (사실 스포일러 때문에 이 글을 안 읽으신 분들이 이 리뷰를 읽으셨을 리는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