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이 전부다 공모(비평)

대상작품: 뚱뚱한 건 죄가 아니에요 (작가: 노말시티, 작품정보)
리뷰어: BornWriter, 17년 7월, 조회 47

나는 평균적으로 보자면 마른 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뚱뚱한 쪽에 가깝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을 묻는다면 살짝 통통한 거라고 주장하겠다. 그런데 나는 왜 뚱뚱함을 통통함이라 주장해야 하는 가. 이 단편은 내게 그런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본 작품은 뚱뚱함이 죄가 되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 죄라는 것이 은팔찌 철컹철컹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만이 다른 사람에게 잠재적 위해를 가하는 잘못으로 묘사되고,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준 범죄로 치부되는 세상. 이것은 단순히 그들이 뚱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뚱뚱함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에 읽기 시작할 때 나는 이 작품이 인종차별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뚱뚱한 사람으로 대표되는 소수의 차별받는 존재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차별받는 존재가 차별받는 까닭은 그들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가령 흑인이 차별받았던 것은 그들이 흑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작품 내에서도 뚱뚱한 사람은 차별시대의 흑인처럼 묘사된다.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것조차 불쾌해지는. 그들이 사용한 물건을 만지는 것마저도 극도로 기피하게 되는.

그런데 도중에 이야기의 기조가 이상해진다. 두 발 물러나는 수준을 넘어섰다. 갑자기 뚱뚱함을 전면에서 옹호하는 존재가 등장하고, 예능 PD에 의해 캐릭터가 뒤바뀐다. 주인공이 크게 여러방 맞고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심리적인 폭행을 당한다) 비틀거리는데, 거기에 ‘오백키로’가 라스트 펀치를 먹인다.

나는 오백키로가 주인공에게 라스트 펀치를 먹이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오백키로의 존재 때문에 나는 본 작품의 매력이 삼단분해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게 이 작품은 ‘노력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을 들먹이면서 자행되는 폭력’에 대한 경고처럼 보였다. 가령 여성들에게 대자연의 매직을 ‘노력하면 아프지 않다!’고 말하면서, ‘너는 노력하지 않아서 아픈 거다!’라고 지껄여대는 식의 폭력 말이다. 그런데 오백키로가 등장하면서 이 작품은 ‘네 노오오력이 부조카다’가 되어버렸다.

 

흑인은 하얘지려는 노오력이 부조카다.

여성은 아프지 않으려는 노오력이 부조카다.

 

이것은 폭력이다. 그리고 오백키로는 새하얘진 흑인이다. 나는 노력을 통해 하얗게 되어 예쁘고 섹시하고 마른(중요하다) 신부를 얻었는데, 늬들은 노오력이 부족해서 혼자 딸딸이나 치는 거다! 라고 외치는 존재이다. 부조리한 존재라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이것이 이 작품의 주제는 아닐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중간에 이상한 캐릭터가 튀어나오면서 주제의식이 흐려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노력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을 들먹이면서 자행되는 폭력이 노말시티 님께서 정말 하고싶었던 말이라고 생각했다. (근거는 없지만.)

그래서 나는 오백키로의 등장이 아쉽다. 계속해서 주인공을 핍박했으면 어땠을까. 주인공을 비만인계의 마틴 루터 킹, 오백키로는 조금 더 진보적인(혹은 급진적인, 말콤X같은) 캐릭터로 설정했으면 어땠을까. 이렇게 배치해두면 적어도 ‘노오력! 노오력이 부조카다!’ 라는 인상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뷰의 끝머리에서 다시 초반의 이야기를 가져오자면, 나는 이 단편이 내게 왜 뚱뚱함을 통통함이라 주장하는 지 묻는 듯 했다. 그리고 거기에 답변하자면 ‘세상이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세상은 여전히 수만가지 차별로 점철되어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이다. 읽으면서도 나는 이 작품이 그러한 사회 환경을 통렬하게 비판해주었으면 싶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결말은 용두사미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아쉬울 따름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