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쟁의 진흙에서 피는 꽃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모란이 피기까지는 (작가: 한켠, 작품정보)
리뷰어: 0제야, 23년 9월, 조회 46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나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전문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시인 김영랑의 작품이다. 모란꽃이 피고 지는 것에 따라 고조되고 사그라드는 화자의 감정선이 인상적인 이 시에는 꽃 한 송이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종류가 고루 담겨 있다. 화자는 모란이 피기까지 봄을 기다리는 설렘과 따스함을, 그것이 지고 난 후에는 천지가 자취도 없어지는 듯 무너지는 서운함을 노래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꽃이 필 봄을 기다리는 그의 역설적인 기대감이 시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학창 시절 교과서와 시험공부로 지친 와중에도 이 시가 주는 큰 감동이 있었음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모란은 우리가 글로 읽고 상상하는 이미지보다 훨씬 큰 꽃이다. 그것의 꽃말이 부귀와 영화, 인간의 품격과 행복한 결혼 등 거대하고도 추상적인 가치를 상징한다는 것이 물리적인 크기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란은 지름이 보통 15cm가 넘어가는, 꽤 큰 꽃을 피우는 식물이다. 시인 김영랑이 화자의 입을 빌려 의도한 모란의 풍성함과 부재의 헛헛함은 텍스트로서 파악되는 것 이상이었을 것이다. ‘모란’이 주인공인 대표적인 시가 그의 것이라는 점에서, 미려한 문체와 섬세한 감정선이 대중이 인식하는 모란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모란을 봄에 빗대어 꽃 한 송이가 계절을 대표하게 만든다거나 꽃이 부재하는 삼백육십 날을 모두 슬프게 보낸다는 과장은 언뜻 허황되어 보일 수 있지만, 모란에 ‘과몰입’한 화자에게는 일상적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모란을 ‘사랑의 대상’으로 확장해 본다면, 화자는 누군가 지나치게 그리워 그와 잠깐 만나고 헤어진 후의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이 시는 오늘날 말도 안 되는 표현으로 상대의 장점을 강조하거나 칭찬하는 데에 쓰이는 ‘주접문’의 정제된 시초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슬프고도 찬란한 시의 제목을 고스란히 가져다 쓴 소설이라면, 얼마나 애달프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여야만 할까. 모란의 크기와 의미를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것으로 둔갑시킨 김영랑의 시처럼 이 소설도 그러할 것인가. 제목을 차용한 동명의 시가 매우 대중적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위험한 도전이다. 교과서와 교육과정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통에 이 시의 제목을 듣는 순간 독자들에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단단히 굳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한 줄을 읽기도 전에 벌써 익숙한 제목에서 신선함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고정된 관념을 부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행히 한켠 작가는 숙련된 이야기꾼이다. 그는 소설의 처음을 이렇게 시작한다. 아빠를 잃었다. 어른이 되었다.” 시의 제목과 연관해 연애소설을 기대했을 독자들에게는 생뚱맞은 출발이다. 이 단편은 성장소설이다. 한켠 작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의 제목에서 ‘연애’의 감정을 덜어내고 근원의 ‘사랑’을 강조한다. 우리가 종종 잊곤 하지만 사랑의 형태는 여러 가지다. 가장 가까이는 연인 간의 사랑부터 혈육 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 공동체 내에서의 사랑, 나라를 향한 사랑, 인류애 등 때로 측정할 수 없는 사랑의 폭이 있기도 하다. 한켠 작가는 이 소설에 본래의 사랑을 채워 넣는다.

아이를 위해 먼저 기꺼이 자기의 목숨을 가벼이 여긴 아버지가 있다. 그는 한 나라의 세자였다가 정복 전쟁에 휘말려 강국의 후궁이 된다. 세자로서 권력을 떨쳤을 그가 타국의 후궁이 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는 자신의 주군이 아비도 없이 버린 여아가 있음을 알게 되고, 날카로운 세상에 동행 하나 없이 팽개쳐진 아이를 데려다 기르기 위해 한 차례 고초를 겪는다. 그렇게 생명을 구한 아이는 아비의 사랑을 먹고 자라며 궁에 만연한 냉기를 이겨낸다. 아비는 속국에서 온 첩으로서 딸에게 자신의 목숨을 누군가 노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의 말이 사실이기라도 한 듯 아이의 아비는 끝내 요절한다.

아이의 얼굴은 자못 담담하지만, 그 눈만은 복수심으로 형형하다.

자, 이제 아비의 목숨이 누구의 손에 달렸을지 죄를 저울질해보자.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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