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나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전문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시인 김영랑의 작품이다. 모란꽃이 피고 지는 것에 따라 고조되고 사그라드는 화자의 감정선이 인상적인 이 시에는 꽃 한 송이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종류가 고루 담겨 있다. 화자는 모란이 피기까지 봄을 기다리는 설렘과 따스함을, 그것이 지고 난 후에는 천지가 자취도 없어지는 듯 무너지는 서운함을 노래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꽃이 필 봄을 기다리는 그의 역설적인 기대감이 시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학창 시절 교과서와 시험공부로 지친 와중에도 이 시가 주는 큰 감동이 있었음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모란은 우리가 글로 읽고 상상하는 이미지보다 훨씬 큰 꽃이다. 그것의 꽃말이 부귀와 영화, 인간의 품격과 행복한 결혼 등 거대하고도 추상적인 가치를 상징한다는 것이 물리적인 크기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란은 지름이 보통 15cm가 넘어가는, 꽤 큰 꽃을 피우는 식물이다. 시인 김영랑이 화자의 입을 빌려 의도한 모란의 풍성함과 부재의 헛헛함은 텍스트로서 파악되는 것 이상이었을 것이다. ‘모란’이 주인공인 대표적인 시가 그의 것이라는 점에서, 미려한 문체와 섬세한 감정선이 대중이 인식하는 모란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모란을 봄에 빗대어 꽃 한 송이가 계절을 대표하게 만든다거나 꽃이 부재하는 삼백육십 날을 모두 슬프게 보낸다는 과장은 언뜻 허황되어 보일 수 있지만, 모란에 ‘과몰입’한 화자에게는 일상적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모란을 ‘사랑의 대상’으로 확장해 본다면, 화자는 누군가 지나치게 그리워 그와 잠깐 만나고 헤어진 후의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이 시는 오늘날 말도 안 되는 표현으로 상대의 장점을 강조하거나 칭찬하는 데에 쓰이는 ‘주접문’의 정제된 시초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슬프고도 찬란한 시의 제목을 고스란히 가져다 쓴 소설이라면, 얼마나 애달프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여야만 할까. 모란의 크기와 의미를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것으로 둔갑시킨 김영랑의 시처럼 이 소설도 그러할 것인가. 제목을 차용한 동명의 시가 매우 대중적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위험한 도전이다. 교과서와 교육과정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통에 이 시의 제목을 듣는 순간 독자들에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단단히 굳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한 줄을 읽기도 전에 벌써 익숙한 제목에서 신선함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고정된 관념을 부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행히 한켠 작가는 숙련된 이야기꾼이다. 그는 소설의 처음을 이렇게 시작한다. “아빠를 잃었다. 어른이 되었다.” 시의 제목과 연관해 연애소설을 기대했을 독자들에게는 생뚱맞은 출발이다. 이 단편은 성장소설이다. 한켠 작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의 제목에서 ‘연애’의 감정을 덜어내고 근원의 ‘사랑’을 강조한다. 우리가 종종 잊곤 하지만 사랑의 형태는 여러 가지다. 가장 가까이는 연인 간의 사랑부터 혈육 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 공동체 내에서의 사랑, 나라를 향한 사랑, 인류애 등 때로 측정할 수 없는 사랑의 폭이 있기도 하다. 한켠 작가는 이 소설에 본래의 사랑을 채워 넣는다.
아이를 위해 먼저 기꺼이 자기의 목숨을 가벼이 여긴 아버지가 있다. 그는 한 나라의 세자였다가 정복 전쟁에 휘말려 강국의 후궁이 된다. 세자로서 권력을 떨쳤을 그가 타국의 후궁이 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는 자신의 주군이 아비도 없이 버린 여아가 있음을 알게 되고, 날카로운 세상에 동행 하나 없이 팽개쳐진 아이를 데려다 기르기 위해 한 차례 고초를 겪는다. 그렇게 생명을 구한 아이는 아비의 사랑을 먹고 자라며 궁에 만연한 냉기를 이겨낸다. 아비는 속국에서 온 첩으로서 딸에게 자신의 목숨을 누군가 노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의 말이 사실이기라도 한 듯 아이의 아비는 끝내 요절한다.
아이의 얼굴은 자못 담담하지만, 그 눈만은 복수심으로 형형하다.
자, 이제 아비의 목숨이 누구의 손에 달렸을지 죄를 저울질해보자.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설의 주된 배경인 고나라와 현나라의 정치적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작가의 깊은 고민이 드러나는 두 나라의 설정은 대조적이기에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정복 전쟁을 벌인 약탈자이자, 주인공 해금의 아비 아쟁이 후궁으로 끌려간 고나라는 여성이 왕위를 승계한다. 고나라의 인물들은 타악기에서 그 이름을 따왔으며, ‘운라’라는 이름의 왕이 다스린다. 고나라의 가장 큰 특징은 아이가 태어나면 혈연관계에 상관없이 왕이 아비를 지정한다는 데에 있다. 이는 권력 분산을 위한 왕실의 전통으로 힘이 센 후궁에게 딸을 주지 않아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한다. 권력자인 후궁 좌고를 닮은 주인공 해금은 타국의 세자였던 아비에게 스스로 짐이 되고 있음을 직감한다. 태어난 대로 자신이 좌고의 딸이었으면 어땠을까. 좌고의 권력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겠지만, 이국 출신인 아버지 아쟁이 앙심을 품고 왕위 계승을 도모한다는 유의 모함에서 자유롭지 않았을까.
해금은 아쟁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실제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고나라의 사람으로 추정됨에도 정신의 고향은 현나라로 받아들인다. “현나라 전 세자와 고나라 왕의 딸인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일까”. 해금은 늘 절반은 고나라, 절반은 현나라 사람의 정체성으로 살아간다. 때로 내면의 충돌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졸(卒)하고도 차가운 왕의 모습을 보며 해금은 아버지의 고향인 현나라를 모국처럼 여기기 시작한다.
궁에서 자신을 지켜주던 유일한 존재, 아쟁을 잃은 해금의 마음은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천지에 피었던 모란이 떨어졌을 때 화자가 겪는 상실감과 같다. 해금은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속 화자처럼 고조되었던 마음이 추락하는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모란은 다음 해에 다시 피어오른다. 아쟁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지만, 해금에게는 그의 죽음이 성장의 기회가 된다. 아비의 이름을 담담히 마음에 새긴 해금은 더 이상 궁에서 눈칫밥만 먹던 후궁의 아이가 아니다.
망해 버린 현나라의 핏줄, 해금은 고나라에서 단단해진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는 비로소 자신이 걸어야 할 방향을 찾는다. 해금은 현나라에 가 그곳의 왕에게 청혼한다. ‘왕비’가 아닌 ‘왕’으로서 현나라의 최고 권력을 쥐고 고나라에 들어가 운라를 밀어내기까지의 과정은 짧은 분량으로 담담하게 서술된다. 아무리 약국(弱國)이라 하더라도 한 나라의 임금인 비파가 손쉽게 타국의 공주에게 나라를 내어주는 행동이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한다. 고나라의 막강한 위세를 생각했을 때 운라가 큰 항쟁 없이 순순히 물러나 초라한 죽음을 맞는 것도 개연성의 면에서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복수심으로 형형했을 해금의 눈빛과 날카롭게 상대를 파고드는 언변을 따져본다면, 그의 서슬에 상대가 누그러지는 것도 이해가 된다.
사실 이 부분을 길게 끌고 가면 소설의 길이와 호흡이 늘어진다. 작가는 단정한 마무리를 선택했다. 분량으로 인해 채울 수 없던 개연성은 촘촘한 문체로 서술한 해금의 행적으로 보완했다. 아버지의 정적(政敵)을 정리하는 해금의 행동은 감정적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무언가를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듯, 해금은 아쟁과 자신의 주변을 정리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어떤 죄도 아비와 자신에게 남기지 않는다.
나는 기다릴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 소설은 단편으로는 이미 완결되었다. 쓰인 단편의 길이와 완결성을 고려했을 때 전개에 군더더기가 없이 말끔하다. 그러나 아직 이야기의 매력이 다 드러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지금은 타국에서 죽음을 맞이한 아쟁과 그의 딸 해금의 관계, 현나라와 고나라 두 국가의 정치적 입장에 집중하고 있어 진행이 일방향적이다. 그러나 확고한 대립 관계를 이루는 현나라와 고나라의 설정, 타국의 세자를 후궁으로 들일 정도로 권력이 막강했던 고나라의 왕, 그런 고나라에서 아버지를 잃은 해금의 내면 변화를 고려했을 때,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단편으로만 끝내기에 아쉬운 이야기다. 고나라가 ‘정복 전쟁’을 벌인 국가라는 것과 그들에게 속국이 여럿 있으리라는 점에서 이 소설의 배경은 한없이 확장될 수 있다. 타악기와 현악기에서 인물의 이름을 따왔다는 독특한 작명 방식으로 보아 인물이 다양해지면 어떤 새로운 악기의 이름이 등장할지 궁금하기도 하다. 단편 소설은 서술할 수 있는 심리와 배경에 한계가 있다. 너무 깊은 심리 묘사나 광범위한 배경 설정은 불필요하다. 그 제약이 이야기의 확장성을 해친 것은 아닐까.
이 소설은 과거로는 아쟁의 어린시절로부터 미래로는 해금의 말년까지를 포함한다. 초반에는 현나라와 고나라 인물을 같은 비중으로 등장시키다 아쟁이 고나라로 넘어가면서부터 변화되는 두 나라의 정치적 위치를 조금씩 풀어내는 것이다. 조금 더 다양한 상황에 처한 인물이 여럿 나온다면 다층적인 소설의 창작도 가능해진다. 고나라 왕의 주변에서 해금과 아쟁의 존재를 시기할 만한 인물이 좌고만 있었을 리는 없다. 오히려 아쟁의 편이 현저히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천성이 곧은 한편으로 온유한 아쟁의 진심을 알고 그의 편을 드는 고나라 사람이 없지는 않았을 듯하다. 아쟁처럼 고나라의 정복 전쟁에서 포로로 끌려와 후궁이 된 다른 나라 사람 역시 충분히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해금의 주변은 어떨까. 해금은 어떤 인간관계 안에서 살았을까.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던 친구가 아쟁의 과거력을 알고 해금과 멀어지는 일은 없었을까. 자랄수록 좌고를 닮은 해금을 보고 그를 의심하는 친구는 없었을까. 아니, 이미 궁에 공공연하게 퍼져 있는 아쟁의 소문 탓에 해금의 주변에는 아무도 다가오려 하지 않았을까. 해금 자신은 어떨까. 현나라의 세자 손에 큰 탓에 ‘정치물’에서 크게 놀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을 크게 원망한 적이 한 번도 없었을까. 심리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는 어린 시절에 그의 뿌리와 정체성을 의심한 적이 있지는 않았을까.
적지 않은 이야기를 읽은 경험에 비추어 보아 한켠 작가는 독자의 이런 질문에 충분히 답할 수 있다. 그의 문장에는 이미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인력 또한 충분하다. 단편을 장편으로 개작하는 것은 한 세계를 그대로 확장하는 것 이상의 작업이다. 새로운 인물과 넓은 배경을 추가로 독자에게 납득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짧았던 이야기의 분량이 늘어나 독자를 만족시킬 때, 아니 그 전에 작가의 마음을 흡족케 할 때 완성되는 새로운 장편의 감각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단편으로서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해금의 성장을 독자에게 객관적으로 전달한다.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요약한다. 사실 그 간결한 방식 또한 해금의 성격과 어울려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된다. 장편은 해금의 삶을 넘어 그의 ‘여정’에 독자가 동참하도록 할 것이다. 해금이 밟는 땅과 그의 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독자가 함께 통과하도록 한다. 단편과 전혀 다른 장편의 여정에 기꺼이 참여할 의향이 있는 독자로서, 부재하는 삼백육십 날이 섭섭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란의 만발한 개화를 다시금 기대해 본다.
이야기의 형태를 정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소설을 맺는 것과 새로 시작하는 것, 길이와 넓이, 깊이와 높이를 결정하는 것에 독자가 관여할 자리와 권리는 없다. 하지만 아름다운 꽃을 발견했을 때 가볍게 사진을 찍는 것처럼, 몰래 기대감 하나 살짝 두고 가는 것은 괜찮을까.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작은 응원 하나 남기고 무엇이든 괜찮다는 마음으로 홀연히 지나가 볼까.
현과 현이 맞물려 내는 소리에 타악기의 고동이 동동 더해지면 아름다운 음악이 된다. 이 소설은 대사가 가사가 되고 삶이 노래가 되는 이야기다. 발걸음으로 작사, 손짓으로 작곡하는 인생의 여정이 소설이라는 듯, 어디에 존재하든 음악과 같은 삶을 살았을 해금과 그의 아버지 아쟁, 고나라와 현나라의 긴장감 어린 리듬이 만들어내는 둔중한 박자감이 귀를 타고 마음으로 전해진다. 코끝에는 모란의 잔향이. 온몸으로는 해금의 생을 물결치게 했던 정치의 파동이 느껴진다.
올곧음으로 풍파를 통과한 해금과 그의 마음을 지킨 아쟁. 아쟁의 죽음을 둘러싼 궁중의 팽팽한 긴장감이 꽃의 모양으로 피어난다. 활자를 읽는 것이 꽃잎을 만지는 것처럼 섬세한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섭섭해하기보다 다음 개화를 기다릴 수 있게 되어 기대된다. 한켠 작가의 소설에는 항상 마음 한켠을 내어주게 되는 매력이 있다. 문장이든 인물이든 사건이든 무엇 하나가 손을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다려보려 한다.
찬란한 슬픔의 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