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시대, 그 너머를 상상하며 감상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대상작품: 끈벌레 (작가: 달리, 작품정보)
리뷰어: 글 쓰는 빗물, 23년 9월, 조회 116

어느 날 ‘일베’가 사라졌습니다. 사이트에 모여 서로의 피해의식을 공유하고, 고인과 약자를 모독하고, 범죄를 모의하던 이들은 현실과 화면 속 여기저기로 흩어졌지요. 그들만의 논리와 놀이문화를 그대로 가진 채로요. 이 유감스러운 현상 앞에서 또 한 가지 인상 깊은 것은 그 사이트가 모든 일의 시작이라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사이트가 사라진 후에나, 건재하던 시절에나 ‘일베충’의 존재는 때로 ‘우리는 적어도 저들보다는 낫다’, ‘저들이 사라지면 다 괜찮다’는 말로 위안이 되어줬지요.

 

달리 작가님의 <끈 벌레>를 지탱하는 호러 요소를 두 가지 꼽자면, 음습하고 악의적인 인간의 모습 그리고 그것이 형상화된 끈 벌레라는 괴물 아닐까 싶습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섬세하게 구축된 세계관 안에서 빈틈없이 맞물리며 어우러지고 이야기를 나아가게 합니다. 타자에게 행하는 폭력은 필연적으로 어느 면에서든 자학적 행위기도 하지요. 그것을 알면서도 간지러움보단 자신이 파괴되고 고통 받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참 섬뜩합니다.

 

어떤 이들은 고립 속에서, 건강한 방식으로 사회에 섞이려 시도하는 대신 상당히 부적절한 방법을 택합니다. 세상과 늘 조금씩 어긋나던 자신과 닮은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하면서요. 혐오, 폭력, 그리고 범죄. 그것들로 이어진 이들의 연결은 끈 벌레처럼 자극적인 섬광으로 서로를 끌어당기고 지하로, 지하로 내려가며 더욱 단단히 얽힙니다. 소설은 이런 일이 당사자와 이 사회를 망가뜨리고 잡아먹는 방식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그립니다.

 

<끈 벌레>는 몹시 직설적인 화법을 쓰고 있습니다. 끈 벌레가 이용되는 방식이나 소설 내 사건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을 통해 한 남성의 내면을 파고드는 과정이 그렇습니다. 엉뚱한 피해의식과 약자에 대한 혐오를 자신만의 논리로 강화하고, 자신의 악취에 취해 스스로를 갉아먹는 일을 멈출 수 없는 그의 모습을 우리는 잘 압니다. 어딘가에서 보았으니까요. 이런 행동 양식은 비단 이 시대 이 땅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나, 소설은 특별히 지금 이 곳에서 두드러지는 이슈를 포착해 시의성을 획득합니다.

 

호러라는 장르 안에서 무언가를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일은 언뜻 쉬울 것 같아 보이지만 막상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죽음과 파괴와 고통을 직설적인 이미지로 그리는 것이 호러의 화법이기에 오히려 더 어렵지요. 그래서 적지 않은 분량 안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끈 벌레>에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혐오스런 인간군상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미하엘 하네케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같은 거장들을 떠오르게 하기도 합니다. 다만 저는 언급한 감독들의 영화가 끝나면 언제나 덩어리 같은 의문 하나가 목에 걸렸습니다. 그렇다, 인간은 ‘그러한’존재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러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윤리학을 논리학처럼 다루고 고통이 아닌 고역을 그리니, 요르고스 감독이 던지는 무거운 질문을 받아들고서도 어쩐지 그와 함께 사유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문학 평론가 신형철의 글 앞에서 다시 그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예술은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불편한 현실을 옮기는 일 자체의 의의도 분명하고요.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영역에서, 저는 인간의 심리를 놀라운 재능으로 묘사하는 창작자들 각자가 품은 답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하다’뒤에 오는 ‘그래서’가 궁금해집니다. 오래된 혐오와 폭력의 시대를 건너가며, 때로는 내가 거기에 빠질 것만 같아 비틀댈 때 문학을 만나 힘을 얻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저는 <끈 벌레>가 그려낸 세계에 공감 하는 만큼, 그 너머에 있을 또 다른 세계를 그려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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