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성애에 대하여>를 읽던 날에 나는 참 많이 지쳐 있었다. 일상에, 글에, 읽는 노동에, 그냥 산다는 것에 지친 채로도 ‘무언가’ 읽어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 건 다행일까 불운일까. 하루 지나고 리뷰를 쓰고 있는 지금, 나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 소설 <성애에 대하여>를 읽으며 ‘그래, 이대로도 괜찮다’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이브한 위로가 아니다. 그냥, 괜찮다, 나도 그렇다… 하는 동질감에서 오는 따스함 같은 거다.
제목 <성애에 대하여>의 경우, 성애라는 이름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처럼도 읽히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또 다르게 해석된다. 주인공이 겪는 성애(性愛: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성적 본능에 의한 ‘애욕’을 뜻함)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니까. 이 소설의 줄거리만 짧게 요약하라고 한다면 쉽다. ‘최애’ 일본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는 소식을 듣고 영화제 일정에 맞춰 휴가를 쓰고 부산으로 향하는 성애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그녀의 덕질과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연애사에 대한 회고로 구성되어 있다.
성애는 중학생 때부터 ‘아이돌 덕질’에 뛰어들었다. 덕질용 블로그를 만드는 건 물론, 직접 영상을 편집하기도 했다. 바로 그 덕질의 결과로 그녀는 ‘영상편집’일을 하고 있다. 덕질이 일자리까지 이어진 셈이다. 반면, 성애는 학창시절에 꽤 오래도록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같은 잡지를 3개씩 사고, 포토카드와 스티커를 잔뜩 살 만큼의 큰 열정을 ‘실제 사람’에게 느껴본 적 없었던 거다. 고등학교 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긴 했지만, 손을 잡고 포옹하는 것 이상의 ‘스킨십’은 하고 싶지 않았다. 성적인 욕구와 그에 대한 사랑은 별개였지만, 그녀는 이상한 사람 취급 받기 일쑤였다. 이는 기꺼이 그 사람의 ‘생활반경’에 들어갈 만큼 자신을 내던지게 한 대학교 시절의 연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바보 같이 사랑했지만, 스킨십은 ‘하고 싶지 않은 영역의 것’이었고, 그는 “너 처음부터 날 사랑하지 않았구나”라는 말과 함께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지금까지 봤다면 알 수 있듯,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다. 여중 같은 남녀공학을 나왔고(남녀분반이라 여중 느낌이었음) 여고를 나온 내 입장에서는 더더욱. 아이돌, 배우, 외국배우, 외국아이돌, 만화캐릭터, 심지어 판타지 소설 작가에 이르기까지 친구들은 다양한 사람들을 ‘덕질’ 했고, 내 입장에서는 그들의 ‘덕질사’를 지켜보는 게 너무도 즐거웠다. 허나 돈 낭비, 시간 낭비 아니냐는… 그 사람이 너 같은 사람을 알기나 하겠냐는, 그 사람의 실체를 알면 분명 실망할 거라는 이야기는 익숙하게 따라붙는 멘트기도 했다. 옆에서 듣는 내 입장에서야, ‘좋아하는 건 자유지’ 싶었지만 그들에겐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 덕질의 정중앙에 서 있던 내 친구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감정 묘사가 잘 되어 있어서 좋았다. 덤덤한 말투, 그러나 묵직한 감성이라고 해야 할까. 문장이 잘 읽혔고, 그 안에 분명한 힘이 있었다. 나는 힘이 있는 문장을 좋아한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담뿍 들어 있는 것 같아서다.
덕질을 하는 것, 사람을 좋아하지만 스킨십은 거부하는 것은 ‘다를 수는 있지만’ 틀린 것은 아니다. 허나 성애는 꽤 오래 ‘이상하다’는 취급을 받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웃었고, 웃프게도 ‘덕질’을 하며 치유 받았다. 그녀를 치유하게 한 드라마 속 장면과 그녀가 마주하게 된 ‘실물의 최애’ 그리고 그 ‘최애’에게 건네는 “오늘 고마웠어요”라는 말이 이 소설을 참으로 따스하게 만들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누군가에게 나 스스로를 ‘팬’이라고 말하기에는 살짝 주저스럽다. 나는 다소 금사빠고, 지속기간이 그리 긴 사람은 아니어서다. 미치게 누군가에게 몰입해본 적은 없다. 팬들 사이에서 따지자면 나는 ‘라이트한 팬’이고, 그 혹은 그녀에게 딱히 환상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그녀는 그들이고, 나는 나인데 그저 무대 위의, 소설 속의, 드라마 안에서의 그들을 ‘그 순간’ 좋아할 따름이니까. 캐릭터에, 문장에, 단어에, 표현에, 리듬에 미쳐본 적은 있지만 ‘덕후’냐고 물으면 애매한 나는 누군가에게 제대로 빠져들 수 있는 덕후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언제고 이성의 끈을 잡고 있는 내가 제대로 미치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가끔은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고 그 속에 잠겨 있고 싶을 때가 있지만 쉽지 않다. 내가 좋아하던 영화, 드라마, 소설을 보는 것도 이제는 ‘온전히 감상’만은 아니게 되었으니까. 기승전결의 스토리라인, 캐릭터의 감정선, 절정을 어떻게 끌고가는가… 무의식적으로 분석하며 따라간다. 바로 그렇기에 모든 것이 딱! 맞아 떨어졌을 때는 정말 큰 쾌감을 느끼지만, 갈수록 그럴 일은 많지가 않다. 요즈음에 나는 ‘사소한 것’에 집중한다. 나란 사람은 원래 사소하게 행복해지고, 사소하게 불행해지기도 할 만큼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이니까. 압도적인 몰입감에 휩싸여서 누군가를 맹렬히 좋아할 만한 종류의 사람은 아니지만, 넓고 다양하게 많은 이들을 두 눈에 담는 나도 일종의 덕후이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 성애가 사랑하는 마모루의 얼굴이었다. 그런 마모루를 바라보는 성애의 얼굴 위로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스쳤다.
이 문장에서 잠시 머물렀다. 하루 뒤인 오늘 또 한번 더 읽었다. 마음을 울리는 문장이었다.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과 제대로 덕질해본 사람들이 느끼는 느낌은 또 다를 것이다. 그 어떠한 감정이든 좋다. 지쳐 있던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쉬어갈 수 있어서 좋았다. 인생의 좋았던 때도 슬펐던 때도 금세 흘러가고, 매 순간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행복은 아주 가끔, 찰나의 순간에 머물다 갈 뿐이다. 그러한들, 느끼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나는 덕후들은 누구보다 더 ‘잘’ 느끼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무엇이든 빠져들 것이 생기면 내 온 몸과 마음, 시간을 바쳐서라도 몰두할 준비가 된, 재밌는 사람들이다.
덕질은 하지 않지만 나는 꽤 오래 지켜보고 있는 연기자가 있다. 양조위와 크리스찬 베일이다. 그들의 사생활엔 관심 없다. 그들이 결국에는 ‘사실은’ 어떤 사람인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들의 연기와 눈빛, 캐릭터를 고르는 ‘선택지’가 좋다. 영화 <중경삼림>을 10년 넘게 매년 보면서도 맨 마지막 엔딩 시퀀스에서 양조위가 스크린을 향해 보내는 눈빛(여자 주인공을 바라보는 감정선)에 매번 감탄하는 나도, 덕후라 볼 수 있을까. 이 소설을 다 보고 난 뒤에 계속 보는 것을 지연했던 영화 <성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한때 그 그룹을 좋아했으니까. 두서 없는 리뷰지만 사담을 가득 섞어낸 걸 보고도 알 수 있듯, 그냥 편안하고 좋았다.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가끔은 취향을 넘어서는 소설을 발견하곤 한다. 그때 나는 평상시보다 더 즐겁고, 누군가에게 꼭 추천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