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에서 변화로 감상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대상작품: 오온의 범위 (작가: 담장, 작품정보)
리뷰어: cedrus, 23년 7월, 조회 714

누군가는 새로운 터전을 찾아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고, 누군가는 ‘관과 같은 침상’에 누워 성간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사라지지 않은 것들을 지키고자 지구에 남기로 합니다.

<오온의 범위>는 떠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자의로 혹은 타의로 그 자리에 남아 떠나간 것들을 기억해요.

본편은 30화로 길지 않은 분량에, 많은 테마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어요. 작품에서 중요하다 판단한 키워드를 몇 가지 골라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모순, 존재, 애도, 연결, 변화입니다. 반전을 포함해 이야기 전체를 다루고 있으니, 이야기를 오롯이 즐기고 싶은 분들은 본편을 먼저 읽어주세요.

 

1. 모순

모순이라는 단어는 작품에도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무엇보다도 환상공간에 갇힌 수현을 NPC들이 모순으로 취급했죠. 환상공간이 기존의 정보를 토대로 사고하고 동작한다면, 모순은 공간의 에러를 유발하는 원인이에요. 이미 확립된 프로그램과 충돌하는 요소인 거죠. 하지만 작품 전체로 확장해보면, 모순은 인물들이 속한 세계의 문제점을 의미해요.

모순은 경계를 인지하는 순간에 발생합니다. 제목이기도 한 ‘범위’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나라는 존재의 범위, 사람이라는 종의 범위, 내가 속한 공동체의 범위, 이런 식으로 경계를 구분할 수 있죠. 이렇게 구분하는 건 자아를 확립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라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죠.

마치 세포막처럼 안과 밖을 구분하는 무언가를 발견할 때, 우리는 세상의 이면을 목격합니다.

먼저 수현의 경우를 볼까요. 수현은 환상공간을 관리하는 경찰입니다. 비록 직무유기가 일상인 부패경찰이지만, <오온의 범위> 속 가장 평범한, 주류 사회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35세기의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환상공간은 어떤 곳인지 보편적인 시각을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인물이기도 해요. 그러나 열의 환상공간에 강제로 접속하게 되면서부터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게 됩니다. 불법탐험가 지영을 만난 것이 결정적이었어요. 누구나 당연하게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시스템에도 사각지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당연한 ‘상식’을 모르는 지영을 호스트라고 의심했을 정도니,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죠.

“학교 다닌 적 없다고.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대학교 강의 시간에 몇 번 숨어들어가 몰래 들은 적은 있어도 그 외에는 따로 배운 적 없어. 왜, 그런 사람 처음 보냐.”

“35세기에도 그런 경우가 있……”

수현은 놀란 표정으로 말을 하다가 이내 자신을 노려보는 지영의 표정을 살피고 재빠르게 사과했다. (7화)

35세기에, 칼에 찔린 상처 정도는 순식간에 치료할 만큼 기술이 발전하고, 휴머노이드와 사람이 한데 섞여 살아가는 세상이에요. 그런데도 여전히 누군가는 의무 교육도,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해요. 도시 외곽을 전전하다 결국엔 현실이 아닌 환상공간을 떠돌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해요. 물론 불법으로요.

환상공간에서 목격한 돔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로봇과 사람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어떤 사람들은 돔 밖으로 쫓겨나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어요. 그들은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여겨지고요.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를 만들면서, 정작 살아있는 인간은 배척합니다. 천 년이 지나도록 인간은 똑같은 일만을 반복하는 걸까요?

 

다음은 열이 발견한 모순입니다.

인간은 로봇을 사랑하고, 로봇은 인간을 사랑하는데 왜 인간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나요? (16화)

인간을 사랑하는 로봇이 이해할 수 없었던 건, 혐오의 정서와 악의적인 행동들이었어요. 혼란스러워하는 열에게 수현은 이해하려 들지 말라고 권합니다.

수현은 그런 사람들의 입장까지 이해하려 들지 말라고 했다. 알 수 없는 악의를 가진 이들에게 굳이 서사를 부여하면서까지 이해해줄 필요는 없다며 말이다. (14화)

사람들은 이런 말로 상황을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열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해를 바탕으로 감정을 도출하는 게 열이 가진 감정의 본질이니까요. 

열은 ‘뉴로모픽 이모션 칩(Neuromorphic emotion chip)’을 적용한 휴머노이드였죠. 인간의 뇌를 모방한 감정 조절 칩이라고 해서, 로봇이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자아를 가지게 한 겁니다. 보다 고차원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하려고요. 하지만 사람과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었습니다. 열은 상황을 이해한 후에, 이해를 바탕으로 감정을 느낍니다. 정보들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고 선명한 감정들을 느낄 거라고 해요. 그런데 인간은 때론 비합리적이고, 먼저 생겨난 감정에 이유를 붙여 이해하기도 하잖아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생겨날 수도 있고요. 

같은 반 친구의 대사도 열과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강화합니다.

“열은 로봇이고 아직 1살밖에 안 됐으니까 모르는 거야! 그렇지?” (14화)

사람들은 이런 말로 로봇인 열을 ‘이해’합니다. 너와 나는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네가 이걸 이해하지 못해도 나는 이해한다, 이런 걸 정말 ‘이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애당초 열이 의문을 표했던 건, 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인 걸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발견한 열은, 곧이어 사람과 로봇 사이의 벽을 발견하고 말았죠. 

 

모순을 가장 강렬한 형태로 보여준 것은 호스트인 이안입니다. 이안은 특수한 케이스였죠. 

원래 환상공간이란, 죽은 사람의 기억을 블랭크에 투사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유기물로 구성된 신체는 죽었지만, 정신만은 환상공간에서 영원히 살아간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만약 ‘원본’이 죽지 않았다면, 살아있는 사람과 그 사람의 기억이 조우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그것은 아주 오래된 나의 파편 중 하나이며 어쩌면 내가 그의 파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화)

같은 사람의 기억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분리된 순간부터 둘은 같은 사람일 수 없어요. 열이 온의 기억을 모조리 흡수하더라도 여전히 온의 기억을 가진 열이며, 온이 될 수 없었던 것과 같죠. 

“모순이 생기기 전까진 내 세계가 모두 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젠 숨이 막혀.” (26화)

자기 자신에 대한 의구심에서 시작된 모순은, 끝내 이안의 공간을 무너뜨렸어요. 예은이 만들어준 공간에 의탁하며 살아가게 되었죠. 예은만 있으면 충분하다며 만족하지만, 세상과의 유일한 연결고리인 예은에게 집착하는 모습은 분명 문제가 있죠. 이안은 원하지 않았지만, 의현의 공간에서 함께 살게 된 건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봐요. 이안에게는 스스로를 긍정하고 타인과 교류할 기회가 필요했어요. 원본이든 전혀 다른 사람이든,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자기 자신을 찾아가야 하니까요.

 

글을 읽다보면 또 하나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어요. 최종화에서 온이 했던 말을 생각해 볼게요. 

“난 과학자고, 영혼의 존재 따윈 믿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억이 그 사람의 영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단 하나 뿐이에요. 떠나간 사람을 붙잡을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서 그래요. 신체는 얼마든지 바스라질 수 있지만 기억은 그렇지 않아요. 기억이란 건 영속적이죠. 상대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끝나는 지점까지 바래지지 않고 존재하니까요.” (30화)

<오온의 범위>는 기억이야말로 사람의 핵심이라고 말해요. 우리에게 기억이 남아있는 한, 정말로 사라지는 것은 없으리라고요. 기억은 곧 사람의 영혼이므로, 호스트도 인간이나 다름없어요. 그런데 지영이 열의 환상공간에 들어온 계기를 떠올려볼까요. 

특출날 정도로 그의 관심사는 기괴한 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물론 그가 그런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기괴함에 아름다움을 느껴서가 아니라 인간의 기억이란 쉽게 왜곡되고 변형될 수 있어 유동적으로 비틀어지는 공간의 규칙을 관찰하고 고찰을 하고 싶다는 나름의 철학적인 욕망 때문이었지만(…) (4화)

기억은 마치 사람의 영혼처럼 여겨지지만, 기억마저도 영원불멸하지는 않아요. 이안이 공간이 그랬고, 열의 공간이 그랬죠. 원인이 무엇이건 환상공간은 뒤틀리고 무너질 수 있어요. 기억이란 몹시도 취약하고 왜곡되기 쉽지만, 한편으론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아 고정할 만큼 견고해요. 기억의 성질이야말로 가장 아이러니하네요. 

 

2. 존재

로봇이 자아를 가지고 감정을 가지게 된다면, 사람이나 다를 바 없이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건 여전히 로봇에 불과할까요? <오온의 범위>는 사람을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제목이기도 한 ‘오온’은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개의 요소라고 해요. 육체와 감각, 기억, 의지, 인식 다섯 가지가 인간의 구성 요소인데, 오온이 인간 아닌 존재에서도 발견된다면, 그 존재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감정을 가지고 다른 존재와 이어질 수 있다면, 사람의 범주를 사람에 한정시킬 필요가 있을까요. 열은 강아지와 머핀도 구분할 수 없는 로봇이었지만, 나중엔 사람에 더 가까운 존재가 되었죠. 사람과 로봇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결국 존재와 존재만 남습니다. 

듀나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에서 비슷한 테마를 다루는데요. 뇌와 신체는 인간의 필수조건이 아닙니다. 신체는 인간의 구성 요소일 뿐이니까요. 오히려 오늘날의 인간과 똑같은 존재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척박한 소행성대에서 살아가느라 신체의 일부를 보강하는 건 물론, 아예 바꿔버리기도 합니다. 

배승예 시민도 그렇습니다. 사고로 뇌와 신체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일부는 남았는데요, 신체가 재생될 동안 ‘아르카디아’라는 가상도시에서 지내게 됩니다. 게임 속 캐릭터나 AI들이 엄연한 ‘개별자’로 존재하는 세상에서요. (스포일러는 하지 않을게요)

존재의 형태를 다루는 방식도 인상적입니다. 아르카디아는 양로원이라고도 불리는 도시에요. 죽는 것도, 영원히 사는 것도 원하지 않는 영혼들이 ‘마더’라는 거대한 인공지능 속에 자신을 녹이는 장소입니다. 아르카디아에서 사람들은 죽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존재의 형태를 바꿀 뿐이죠. 거대한 정신의 일부가 되는 거에요.

본편에도 인간과 로봇 말고도, 독특한 존재가 하나 더 있었죠. 환상공간의 호스트는 사람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집니다. ‘원본’은 죽더라도 기억만은 오래도록 남아 환상공간에서 살아간다고 해요. 사람이라기보다는 프로그램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들은 생전의 기억을 유지하고 감정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실체만 없지, 현실의 사람들과 교감하며 살아갈 수 있어요. 

<오온의 범위>에서도 죽음은 더이상 고전적인 의미의 죽음이 아닌 셈이에요. 죽은 사람의 기억은 호스트, 즉 하나의 환상공간이 됩니다. 아르카디아의 거대지능이 모든 것을 흡수해 점점 커지는 블랙홀이라면, <오온의 범위>의 환상공간은 우주를 수놓는 별이에요. 시간이 흐를수록 블랭크 속에 무수히 많은 환상공간이 생겨날 테고,  <오온의 범위> 속 우주는 점점 더 넓어지겠죠.

아르카디아도, 환상공간도, 고전적 개념으로는 정의되지 않을 수많은 ‘존재’들이 뒤섞여 사는 공간입니다. 이걸 보며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다시 고민하게 되고요. 

 

3. 애도

모든 일의 시작에는 주 선의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사라진 사람들과 발전소 재해, 남겨진 사람들이 있었죠. 누군가를 추모하는 행위는 작품 전체를 관통합니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 사람들은 환상공간의 시초를 추모의 공간이라고 여겼어요. 지구에 남기로 한 사람들이 떠나간 이들을 위해 만든, 추모를 위한 공간이라고요. 실제로는 묻힐 뻔한 진실을 보존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만들어진 공간이었어요. 

비록 환상공간이 만들어진 계기는 사람들의 예상과 달랐지만, 그 모든 여정이 여전히 추모의 과정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동경했던 천재의 몰락을 지켜본 서정인. 

발전소 재해의 유가족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온. 

온의 기억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로 한 열. 

공동체의 일부로만 존재해왔으나 마침내 자신의 뿌리를 찾은 영. 

이들은 슬픔을 동력으로 움직였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하며 진실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백상현의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에서는 슬픔과 애도를 구분합니다. 슬픔이란 상실을 드러내는 맹목적 감정이며, 상처로 인해 발생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에 비해 애도는 슬픔을 끝내기 위한 절차입니다. 상실된 대상, 슬픔에 관해 말하고 또 말하며, 슬퍼하는 과정입니다. 상실로 인해 공백이 생겨나고, 여기에서 슬픔이 출현한다면, 애도를 통해 공백을 다른 상념으로 채워넣는 것입니다(p24). 

그런데 모든 애도의 절차가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슬픔을 위로할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상처는 봉합되지 못하고 상실한 이들은 일상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사회의 언어에 ‘적당히 속아’줄 수 없으므로, 이들은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이 책에는 흥미로운 개념이 또하나 등장합니다. ‘스티그마’인데요. 상처가 보존되고, 보존된 상처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다시 반복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p54). 익숙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나요? 

열이 만들어낸 공간에서 스티그마는 인위적으로 재현됩니다. 열의 세계는 단순히 상실로부터 도피하려는 시도가 아니었어요. 그랬다면 온의 기억을 불러내고, 단둘이 오래오래 행복한 공간을 만들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열은 자신의 상실을, 괴로운 기억을 전부 재현하고 반복합니다. 슬픔을 보존하고 사회의 불완전함을 지속적으로 사유하는 열은, 발전소 재해의 유가족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온의 의지대로 진실은 알려졌지만, 그건 반쪽짜리 실현이었습니다. 23세기의 기록은 지워지고, 35세기에도 여전히 차별과 불평등이 만연하죠. 주 선과 서정인, 유 온의 의지는 온전히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관측자를 필요로 했고, 관측자들은 새로운 주인공이 되어 실현되지 못한 것을 이끌어내야 했습니다. 수현과 지영은 봉합되지 않은 상처를 목격했고, 기억을 온전히 지키고 싶었던 열의 바람과 맞물려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4. 연결

<오온의 범위>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연결’입니다. 수현과 지영이 망가진 환상공간을 탈출할 때, 현실과 연결된 블랭크로 뛰어들었죠. 블랭크 속 환상공간은 다른 환상공간과 연결될 수 있고, 멀쩡한 환상공간으로 갈 수만 있다면 다시 현실로 연결될 테니까요.

공간과 공간의 물리적인 연결뿐 아니라, 감정적인 측면의 ‘연결’도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처음에는 ‘나’와 ‘다른 사람’만이 존재했다면, 재범주화를 거친 후에는 ‘나’와, ‘나와 가까운 사람’, ‘다른 사람’으로 구분됩니다. ‘나’와 연결된 사람들이 생겨나는 거죠.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나 아닌 존재를 수용할 수 없다면, 그건 공동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일이니까요.  

서정인과 온이 그토록 전하고 싶어했던 건, 주 선의 프로젝트가 결코 재해의 원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죠. 주 선의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문서를 다시 보겠습니다. 

<개체 사이의 의식 및 감정 전이를 통한 상위 차원으로의 도약>

각 개체의 감정의 전이와 의식의 공유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 집단의식을 만들고, 이를 통해….. (13화)

주 선은 사람들의 의식을 하나로 연결하고자 했습니다. 외전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모두의 의식을 통합’하려 했다는 거죠. 이렇게만 보면 다소 극단적이지 않나 의문이 생기지만,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떠올려 봅시다. ‘통합’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연결’에 주목한다면, 이는 타인의 고통을 마치 나의 일처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주 선의 원래 의도 역시 돔 내부의 차별을 해소하는 것이었으니까요. 

물론 개인의 자유라든가, 공동체의 경계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주 선은 타인의 고통을 내 일이 아니라며 외면하는 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어했다는 거죠. ‘나’의 경계는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고, 나와 타인은 분명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에서 단식 투쟁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섭식의 거부는 부재, 즉 공백의 섭식으로 해석된다는 건데요(p41). 지금 여기에 없는 진리, 공백의 형태로 실존하는 진리를 먹는 투쟁이라고요. 이에 비해 폭식 투쟁을 하는 혐오자들은 공백, 정의의 부재 자체를 부정합니다. 이 세상은 그 자체로 완벽하기에 공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투쟁하는 이들이 섭식하는 공백은 그러므로 병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오온의 범위>에 따르면, 공백을 부정하는 혐오자들에겐 사실 결여된 것이 있습니다.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입니다. 나와 타인은 연결되어 있지 않으므로, 완전히 다른 존재이므로 그들의 슬픔이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여길 테지요. 주 선과 서정인, 온과 열, 수현과 지영에게 이어지는 의지는 그들에게 반박하는 메세지이며, 타인과 연대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다정함입니다. 

실제로도 열이 선택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외면하는 일이 아니었어요. 열은 서로를 배척하는 인간의 모순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열을 사랑한 온을 알았고, 진실을 알리고자 투쟁한 사람들을 알았어요. 열을 도와준 평범한 사람들의 다정함을 알았기 때문에, 온을 대신해 온의 사명을 완수하기를 선택했어요.

 

5. 변화

이 키워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나 싶을 만큼 자명하죠. 환상공간과 현실을 오가는 모험 끝에, 부패경찰과 불법탐험가가 부당함에 저항하고 새로운 현실에 정착하게 되니까요. 참으로 오래 이어져온 온과 열의 기억은 어떤가요. 외로운 싸움 끝에 서로의 곁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물들의 변화도 물론 중요하지만, 제가 중점적으로 다루고 싶은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작중 23세기와 35세기의 세계가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온의 대사를 보겠습니다.

“그런데 천 년 넘게 지났는데도 제가 살던 곳과 차이가 별반 다르지 않더라고요. 돔 속에서만 유지되던 생태계가 다시 지구 전체로 퍼져 나가는데까지 이토록 오래 걸리는군요.” (24화)

비슷한 뉘앙스의 대화를 수현과 지영도 나눴죠.

“23세기인데 우리가 사는 시대와 별반 차이가 없어보이지 않아?”

“아 그거? 국지적이긴 하지만 그동안 재해도 여러 번 있었고 멸망 직전까지 갈 뻔한 적도 있어서 그런 거일 거야. 생활 방식이 현재와 별반 차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비슷할 줄은 몰랐네. 실제로 보니까 신기하다.” (7화)

요컨대 인류 문명에 수차례 커다란 피해가 발생했고, 이를 복원하며 문명이 다시 자리잡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무려 천 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해요.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사람들의 말과 문화는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나요. 심지어 본편의 세계는 종말 위기로 기존 문명의 많은 것들이 사라졌을 텐데요. 로봇과 공존하고, 우주 멀리까지도 떠날 수 있는 세상이 21세기와 거의 비슷하다는 건 분명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한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과거의 유산이 고스란히 이어지도록 강제한 경우입니다. 옛 문명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세상을 ‘좋았던 시절’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사각지대로 내몰린 사람들, 지영으로 대표되는 외곽 지역의 사람들은 더 두드러지는 차이를 보였을 겁니다. 옛 규범대로 살아가도록 규제하는 사회와, 사회 바깥의 체계는 당연히 다를 테니까요. 지영이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식으로 묘사되긴 했으나, 그 차이를 작중에서 실감하기는 어렵지요. 따라서 이 가설은 가능성이 낮아 보입니다.

작중에서 반복적으로 유사성을 설명하는 만큼, 그럴 수 있겠다고 납득하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화감은 본편이 끝날 때까지도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23세기와 35세기는, 마치 2025년과 2030년처럼 별로 멀지 않은 시대처럼 느껴졌으니까요. 

위화감을 곱씹어보다가 새로운 관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바로 이 세계 자체가, 변하지 않는 사회의 은유라는 것입니다. 

열의 세계를 다시 떠올려 볼까요.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 없이 똑같은 시간, 똑같은 사건이 반복되어 일어납니다. 수현과 지영이 찾아올 때까지요. 이 세계는 어떤가요. 변함없이 진실은 검열되고 묻히고, 사람들은 차별받고 내몰립니다. 종말 전의 지구에도, 열이 살았던 23세기에도, 수현과 지영이 살아가는 35세기에도 같은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닫힌 세계인 겁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고립된 세계에도 균열이 생겼습니다. 수현과 지영, 그리고 이들을 지켜본 사람들의 연대로 세상은 달라지겠죠. 그 과정이 순탄하기만 하리라 낙관할 수는 없고, 어떻게 달라질지도 불분명하겠지만,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검사의 모습을 떠올리면 기대를 품게 됩니다. 변하지 않던 세계가 마침내 변하기 시작할 거라고, 사람과 사람이 이어져 있는 한, 꽤 괜찮은 미래가 올 거라고요. 

어디 이들의 세상뿐일까요. 마지막에 이르러, 저는 이 모든 게 지영이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온의 범위>는 여러 장르를 오가며 진행되었죠. 초반부에 독자를 확 끌어당기는 부분이 있는데요. 오래된 환상공간의 규칙이 바로 그렇습니다. 환상공간 속 기괴한 사건들과 맞물리며 마치 한 편의 괴담소설을 읽은 기분이 들어요. 돌이켜보면 이 이야기를, 환상 공간의 규칙을 우리에게 알려준 건 누구일까 의문이 생깁니다. 작품이 진행되며 차곡차곡 모인 규칙들은, 뒤에서 한 번 더 등장합니다. 지영의 수첩 속에요. 지영이 탐험가로서 경험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죠. 

지영은 한 세계의 변화를 목도하고 이끌어가는 당사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꽤 다르지만, 그럼에도 비슷한 점이 많지요. 그렇기 때문에 지영은, <오온의 범위>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사는 세상에는 무언가 이상한 점이 없느냐고요. 당연하게만 여겨왔던 부분에 모순이 있지는 않냐고요. 모순을 인지하는 것, 그것이 변화의 시작일 테니까요. 

 

맺는 말.

연재하는 동안 꾸준히 챙겨읽었던 글인데, 이제서야 리뷰를 올리게 되었어요. 리뷰를 다듬으며 다시 찾아본 회차들도 있었고, 그때마다 새롭게 느끼는 점들도 많았습니다. 한 편의 글로 감상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재밌는 글이었고, 의미하는 바도 컸지만, 아쉬운 부분도 물론 있었습니다. 두 가지만 꼽아보자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는 열의 성장과정 중 있었던 해프닝입니다. 일명 강아지 구출 사건인데요. 유명한 이야기인 만큼 쉽게 이해하고 웃을 수 있었지만, 적당한 이야기를 가져왔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어요. 비슷하게 변주하더라도 작가님의 고유한 흔적이 남았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두 번째는, 이 이야기에 정말로 평범한 사람이 등장하느냐는 의문이에요. 간략히 언급되는 정도로 지나가곤 했죠. 개성 있고,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인물들이 모여서 사건을 하나씩 해결하는 게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이들이 천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해결되지는 못했을 장면들도 있었고요. 평범한 이들을 대표하는 영이 있지만, 영도 낯선 세계에 뚝 떨어져 혼자 로봇을 만들어내고 사람을 구할 정도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에요. 덕분에 핵심 인물들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었지만, 그만큼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사회는 축소되고 말아요. 매력적인 설정이 많은 만큼, 글 속에 인물들이 사는 세상이 좀 더 묘사되었다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몇 명의 인물만이 부각되다 보니, 개개인의 연대가 커다란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주제의식이 다소 약해지기도 했고요. 

아쉬움이 남는다 해도, 얼마나 꼼꼼히 구상하고 섬세하게 엮어냈는지 생생하게 느껴지는 글이었어요. 이 이야기에서 파생될 더 넓은 세계관을 기대하게 만들기도 했고요. 마지막으로, 최종화의 한 구절이자 제가 좋아하는 문장을 인용하며 마치려 합니다. 

우리는 전부 행복해질 거야. 동화 속 주인공들처럼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식의 완벽한 결말이 아니라도 괜찮았다.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채이고 밟히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결국엔 끊임없이 소중한 사람들과 삶을 살아가는 결말을 만들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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