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 <행복기억복지관>의 배경 설정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1. 과학의 고도화로 인간 수명이 늘어났지만, 뇌 연구는 그를 따라가지 못해 치매 인구 비율이 높아진 사회가 있다.
2. 해결 방법을 찾기까지 임시 방편으로 국가가 선택한 것은 모든 국민에게 130세부터 149세 사이의 일화 기억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다.
3. 150세 이후부터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기억 하나만을 간직한 채 남은 생을 살아간다.
4.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신력 2150년, 인간력 108년이다. 신력은 지금처럼 년도를 세는 방식이며, 신력 2043년에 이 세계는 인간시대로 전환했다.
소설 주인공은 행복기억복지관에서 36년간 일한 책임 실무관 라안이다. 64세의 라안은 역사책으로만 신시대를 경험했지만, 그 뒤의 세대는 역사 책으로도 신시대를 배우지 않는다. 라안이 상대하는 130세에서 149세 사이의 사람들은 신시대를 경험한 사람들로, 라안은 이들과 대화할 때마다 ‘세대 차이’를 느낀다. 신시대 경험자들은 말이 너무 많고, 기억 선택 이 외의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해서다. 여기서 살짝 웃음이 터지면서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는데, 지금 우리가 겪는 세대 간의 ‘소소한 갈등’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다. 이 ‘장면’을 초반에 잘 세팅해 두었기 때문에 2150년이라는 먼 미래를 다루고 있는데도 주인공 라안에게 몰입하며 즐기기 좋았다.
또 하나, 행복한 추억을 고를 때 신중해야 한다는 것도 좋았다. 단 하나의 기억이 남기 때문에 ‘가족과 행복하게 보냈던 추억’을 선택한다면 가족이 곁에 없는 ‘부재의 외로움’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기억을 선택하는 과정을 도왔던 라안의 현 상태는 ‘타성에 젖어있음’이다. 처음에는 진심이었던 일도 거듭되다 보면 익숙해지고 권태로워지며 반복되는 트러블에 지치기 일쑤니까. 그런 라안에게 ‘김마지’라는 블랙리스트 고객이 도착하면서 이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라안과 김마지가 만나기 이전에 김마지가 어떤 사람인가 보여줬던 것도 좋았다. 100년 가까이 똑같은 하루를 보내는 그녀의 일상을 보여준 뒤에 라안 팀원들간의 회의 장면이 따르는 형태였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연금 생활자라는 정보만 갖고 김마지와 상담실에서 마주한 라안,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서로 무뚝뚝하게 할 말만을 나눌 뿐이다. 허나 무뚝둑함 그 이면의 이야기까지 독자는 알 수 있는데 바로 이 소설의 구성이 갖고 있는 장점이다. 라안과 김마지의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줄 뿐아니라 라안-김마지가 만나는 씬도 잘 정리해서 작성했기에 인물에 대해 파악하기 좋았다. 요즈음 소설의 중심에는 역시 ‘인물’과 그 내부의 갈등, 욕망, 화해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던 차였기에 더 의미 있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은 김마지가 ‘사격’ 선수 출신이라는 데 있다.
팀워크는 몰라도 실적만은 뛰어났던 라안의 팀을 들쑤셔버리는 블랙리스트 김마지, 사격이라는 본인의 장기를 이용해서 막판에 ‘킥’을 하나 날린다. 모두의 심장을 덜컹이게 만들어놓고는 유유자적하게 김마지가 활을 날릴 순간, 내 마음 역시 함께 뛰었다. 예상했지만 살짝 예상을 벗어난 결말을 보면서 오랜만에 빙그레 웃었다. 이 소설에는 신시대와 인간시대로 이야기되는 두 세대의 갈등 뿐 아니라, 김마지와 어머니의 ‘뒤늦은 화해’ 역시 담고 있다.
–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쓰는 총은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아니네
어쩌면 엔딩부 김마지의 대사에 많은 내용이 응축되어 있는 걸지도. 한 사람을 이루는 것에는 많은 요소들이 있겠지만, ‘임팩트 있는 찰나의 기억’이 한 몫 한다는 걸 다들 알고 있을 거다. 때로는 고정관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어떠한 사건’과 만나, 그 ‘사건’을 뚫고 나오는 과정에서 반 평생 동안 믿어온 것들을 모조리 부숴버리기도 하니까. 한 사람의 인성, 신념, 생각이란 그 사람이 여지껏 겪어온 모든 것의 총체이기도 하면서, 그 모든 생각을 날려버릴 만큼 강렬한 ‘한 순간’이기도 하다.
라안에게 김마지는 모든 신념과 생각을 뒤흔들어버릴 만큼의 ‘강렬한 총성’은 아니었지만, 마음을 일렁이게 만드는 ‘기억’으로 남을 것만은 분명하다. 소설의 마지막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바라게 되었다. 현재 64세인 라안이 150세에 임박하는 시점이 오면, 단 하나의 기억만을 선택하지는 않아도 되기를. 하나의 기억만을 남겨둔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뤄낸 것이 ‘나’라는 결과물이어서다. 기억 중 몇 군데만 빠지더라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기억과 사격이라는 소재를 갖고, 인물을 잘 엮어낸 소설을 읽어 즐거웠다.
짧은 소설인 만큼 이 자체로 완결성 있지만 시리즈물으로 조금 더 정리된다면 어떨까, 했다. 백 그라운드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배경 지식과 관련하여 조금 더 디테일한 세계관도 궁금했고, 라안이 만나는 인물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는다면 어떨까… 혼자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이 정도 선에서 딱 끝내는 게 이 작품의 볼륨에 맞는 건지도 모른다. 기억에 대하여, 조금 더 감성적인 SF에 대하여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소설을 후루룩 읽어보도록. 짧아서 진짜 금방 읽지만, 여운은 오래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