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피하는 늙은 마녀에게 들려온 어느 날의 소문,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물에 잠긴 빙하처럼 아름다운 파란 눈을 가진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물개와 그 ‘물개’ 정령을 잡으려는 젊은 사냥꾼들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 소설 <눈의 셀키>는 우연히 부상 입은 정령과 만난 마녀가 생애 처음으로 가슴 설레게 누군가를 사모하고, 또 경이롭게 죽어가는 이야기를 유려하게 담아낸 소설이다. 특히 문장이 좋았는데 긴 설명 없이 몇몇 문장으로 캐릭터를 설명해내는 능력이 탁월했고, 비유를 적확하게 사용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여서 나 역시 좀 더 꼼꼼하게 읽었다.
– 마녀는 마을의 누구와도 세 마디 이상 대화하지 않았지만, 세 마디 말이면 소문에 대해 알기 충분했다.
이 문장 하나로 마녀가 마을에서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면서 동시에 소문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냈다. 마을 사람들이 피해다니는, 하지만 누구에게도 피해를 준 적 없는 늙은 마녀는 바닷가 길을 따라 집으로 향하던 중에 우연히 옆구리에 부상을 입은 청년을 발견한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물에 잠긴 빙하처럼 아름다운 파란 눈을 가진 청년은 영락없이 사람으로 변화한 ‘물개’ 였다. 사냥꾼으로부터 물개 가죽을 빼앗겨 물개로 변화하지 못하고 뭍에 머무른다는 게 흡사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 같기도 했다. 선녀 역시 날개옷을 빼앗겨서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냥꾼 옆에 머무르니까. 다른 점이라면 마녀가 물개 가죽을 빼앗은 적이 없고, 마녀와 청년이 욕정의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는 게 차이겠지만 마녀에게 청년이 ‘첫’ 사랑으로 다가왔다는 게 너무 잘 느껴져서 가슴 시렸다.
– 노래가 몸을 휘감으며 마녀는 한순간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위를 걷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청년의 노래를 들으며 마녀는 위의 문장처럼 느낀다. 일흔 살이 되던 밤, 청년을 구한 마녀는 생애 처음으로 소녀가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마녀는 청년을 위하여 물개 가죽을 찾아올 결심을 하지만, 항해를 떠날 필요도 없이 물개 가죽이 스스로 ‘걸어’ 들어온다. 다름 아닌, 침략자의 등에 업혀서 물개 가죽이 찾아온다는 전개가 흥미로웠다. 불의의 사고를 입은 희생양과 그 희생양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이야기 법칙을 충실하게 따르는 전개여서 ‘기대’를 충족하면서 동시에 ‘흥미’를 자아냈다. 물개 가죽을 가지고, 정령을 잡으러 온 이가 다름 아닌 ‘여성’이어서다.
반짝이는 홍안에 피처럼 붉은 머리칼, 2m에 달하는 큰 키에 균형 잡힌 몸, 승마와 검술, 전략과 결투에 능한 자만의 혈기를 가진 그녀의 어깨에는 다름 아닌 흰 물개 가죽이 있다. 가죽을 두른 채로 바닷가 마을에 당도한 그녀는 백장령의 군주였으며, 자신의 기세를 떨치며 마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몇가지 질문을 던진 뒤 결정적인 질문을 한다.
– 이 마을에서 홀로 외따로 떨어져, 그 누구의 사랑도 공경도 받지 못하고 사는 자가 있는가?
이 질문에 해당하는 곳은 다름 아닌 늙은 마녀의 집이었다. 이렇게 이어지는 전개는 흥미로웠지만, 하나 마지막까지 해소되지 못한 의문이 있다면 왜 굳이 그러한 자를 찾았냐는 부분이다. 그러한 자의 곁에 정령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인지, 구슬리기 좋아서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보여졌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허나 마지막까지 몰입을 잃지 않고 볼 수 있도록 하는 묘사와 문장, 감정선이 매혹적인 소설이었다.
또 하나, 군주가 마녀에게 던지는 이 질문이 참 매력적이었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홀리고 눈을 가린다. 나를 경애하고 원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시작부터 나는 귀했으며 끝까지 귀하리라. 손에 잡으면 무겁지만 목에 걸면 가벼우며 혀에 닿으면 고귀하다. 나로 만든 사슬로 묶으면 여자든 남자든 떠나지 못한다. 나의 이름은 무엇인가?
마녀는 이 질문에 대하여 2가지 답을 한다. 두번째 답이 더 진리에 가깝다. 2가지의 답이 궁금하다면 지금 바로 이 소설 <눈의 셀키>를 읽어보도록. 긴 설명을 하기 보다 각자 읽고, 저마다의 평을 가지고 또 한번 이야기를 해보고픈 소설이었다. 눈 덮인 바닷가의 풍경이 잘 그려지고, 특히나 늙은 마녀가 처음으로 갖게 되는 ‘순수’에 가까운 사랑을 읽는 독자마저 느낄 수 있게끔 만든 이 소설, 길이가 짧아서 빠르게 읽었고, 동시에 아쉬웠다.
이 소설이 더 길게 쓰여질 수도 있을 거 같단 생각이 든다. 아름다웠고, 서글펐으며, 동시에 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