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독서 취향 하나를 밝히자면 단편 SF를 좋아하는 편이다. 이게 다 아이작 아시모프와 아서 C 클라크 때문인데, 그 유명한 전설의 밤(Nightfall, 1941년)이라든지, 여기저기서 많이들 차용되는 최후의 질문 (The Last Question, 1956년) 같은 작품이 실려있던 세계 SF 걸작선(고려원 출판)을 낱장이 닳도록 읽고 또 읽고 계속해서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청소년기를 보냈던 탓이다. 지금도 멀티백이라는 단어만 보이면 그때의 그 흥분감이 기억난다. 나이를 먹고 접하게 된 아서 C 클라크의 단편 모음집은 다른 의미에서 굉장히 아끼는 책이다. 어린 시절 구할 길이 없던 그의 단편들을 뒤늦게나마 황금가지에서 모음집으로 출판했을 때 쾌재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여담이지만 전자책 e-ink으로 넘어오면서 숙청 당했던 내 책장 속 수많은 종이책들 사이에서 해당 단편집 세트만큼은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 단편이 주는 위트와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SF라는 장르를 만나면서 한계가 없는 곳으로 달려가곤 한다. 그래서 SF 단편집을 좋아하고 항상 기대를 가지고 대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조금 관대해진다.
이번에 읽게 된 ‘세계의 규칙을 디버깅하는 방법’도 그런한 장르에 속한다. 여고생 주인공이 아빠로부터 장난스럽게 배달 받은 석판이 세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물건임을 알게 되면서 치열한 쟁탈전이 일어난다는 … 이제는 거의 클리셰가 되어 버린 내용을 기반으로 작가는 한편의 블랙 코미디를 준비한듯하다.
문체는 한없이 가볍다. 라이트 노벨이라기보다는 양판소 웹 소설 느낌이다. 빠른 전개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템포를 높인 느낌이다. 게다가 극의 전개가 종종 개연성 따위는 무시하고 진행된다. 그저 정해진 결말을 향해 그렇게 일직선으로 달려갈 뿐이다. 의문이 들만한 부분은 등장인물들이 알아서 대사로 빠르게 답을 알려준다. 등장인물들도 전형적이다 못해 아예 개그가 아닐까 싶은 부분도 있다. 분석이 어쩌고 할 부분들이 아니다. 그래서 블랙 코미디라고 느꼈다. 작가의 의도가 빤히 보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문단의 딱 한 문장이 가슴 한편에 소소한 울림을 만든다. 작가는 그 한마디 말을 효과적이고 인상적으로 전하기 위해 이런 정신없고 어처구니없는 코미디를 구성했고 그 결과 꽤 유쾌한 독서 시간이 될 수 있었다. 이런 맛이 SF 장르의 단편이 가지는 고유의 장맛들 중 하나가 아닐까. 정장 빼입고 썰어먹는 스테이크도 맛있지만 길가에서 사 먹는 떡볶이도 맛있기는 매한가지다. 물론 그 맛있다의 뉘앙스는 다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