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이담>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오컬트 전문 심부름 센터물’이 되겠습니다. 오컬트 사건과 심부름 센터라니. 듣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조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번쯤 들춰보지 않고 배길 수가 없죠. 한편으로, 그토록 자연스레 흥미를 끄는 조합이라면 이미 충분히 다루어졌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만큼 새로운 방식을 요구한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보통 오컬트물은 서양 신화나 기독교 문화에 기댄 내용이 많은데, <기이담>은 오직 한국의 신화와 전설, 악귀, 요괴 등만을 차용해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개인적으로 그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한국적인 소재를 끌어낸 것 자체만을 새롭다고 볼 수는 없겠죠. (한국적 오컬트 소재에 ‘사건-해결’구성을 보여준 소설이라면 <퇴마록>이나 <신비소설 무> 등 많이 있었으니까요) <기이담>에서 신선하게 느낀 점이라면 현대적 업데이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단순한 퇴마물이나 무속 소재가 주기 쉬운 토속적인 정서가 아닌, 지금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기이한 이야기의 괴상한 부분에는 그 시대의 불안이나 고민이 담겨 있기 마련이니까요.
2.
자연히, 한 가지 질문이 생겨납니다. 왜 한국의 신화와 전설일까요?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서? 독특한 분위기를 주기 위해서? ‘아니, 재미만 있으면 됐지, 그런 질문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사실 틀린 말도 아니죠). 하지만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다면, 그 재미란 것이 금방 공허해지고 만다고 믿습니다.
요즘처럼 믿음이 얕은 시대가 아니라 조선시대라면 그 정도도 차원이 다를 것이다. 지금이야 신이 있네 없네 하는 마당인지라 아무리 숭엄한 동상을 세워도 신격이 깃들 정도로 정기가 모이지 않지만…
신이 죽었다던 니체의 선언을 끌어오지 않아도, 사람들은 점점 신을 믿지 않는 시대입니다. 신이라는 관념 자체가 냉소를 부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세상이 발전할수록 이런 경향은 심해지겠지요. 하지만 신이 부재한 자리에서 인간은, 인간의 삶은 정말 괜찮은 걸까요? <기이담>은 한국의 신화와 전설을 끌어모아 신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지상과 천국으로 나뉘는 서양의 이원론적인 신이 아닌, 산과 강, 우물과 집, 장승 등 평이한 장소에 존재하며 사람들의 염원과 공물을 먹고 살던, 그런 우리의 신들을 통해서 말이죠.
3.
과연 신은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혜호와 승환에게 던져진 질문. 누구나 한 번쯤 되뇌어본 질문이 아닐까요. 가끔 믿기지 않거나, 압도적으로 부조리한 일을 목도할 때면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신이 존재할까요?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요. 왜 착한 사람들이 벌을 받고, 악한 인간들이 승승장구하며, 아무 의미 없는 고통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떨어지는 걸까요.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장승을 베었다가 끔찍한 벌을 받은 혜호나, 부모가 지은 죄 때문에 자신들을 지켜주어야 할 성주신들에게 공격당하는 승환이 그런 것처럼요. 그 신들이란 존재는 어찌나 쩨쩨한지. 조금이라도 신에게 저항하거나 그들의 처사를 비켜 가려는 자들에게는 어김없이 동티와 재액이 떨어집니다. 그런 일을 보고 겪다 보면 우리는 혜호처럼 도전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토록 지엄하신 법이라면, 아예 뼈에다 땅땅 새겨놓으시지 그랬습니까! 아예 다른 길로는 눈길조차 못 주게끔 외길로만 만들어 놓으시지 그랬습니까!”
세상이 왜 이토록 엉망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세상을 만들어놓은 신의 탓인지, 신의 의도를 짓밟을 정도로 인간이 간악한 탓인지. 어째서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신은 우리를 이끌어주지 않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런 원망으로 마음속에서 신이 사라지고 나면, 인간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사랑은 희박해지고, 각자의 욕망만 극도로 추구하면서 미움과 싸움만 늘어나고 말겠죠. 정처를 잃은 마음은 쉽게 분별을 잃기도 합니다. 얼마 전 화제였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에서 우리는 신이 부재한 자리를 파렴치한 사기꾼들이 어떻게 파고드는지, 얼마나 끔찍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유린하는지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죠.
4.
신들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군요.
더욱 짙어진 노인의 미소를 보며 승환은 자신의 답을 확신했다. 승환은 그가 분명히 자신의 마음 속을 읽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노인은 지금까지처럼 얇게 뜬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대신, 우듬진 나무뿌리에 기대어 웃으며 말했다.
[그 증거는 무엇이냐?]
“저희에게 ‘자유’를 주었으니까요.”
<기이담>이 제시하는 결론은 따뜻합니다. 신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준 자유의지가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우리는 신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손님신처럼 아무 목적이나 의도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지장아기씨 팔자였던 진혁의 케이스에서 보듯, 신은 나름대로 연민을 가지고 최대한 조정해주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는 알 수 없는 것뿐이죠. 그리고 신이 모든 걸 정해놓은 듯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는 자유의지로 삶을 선택합니다. 욕망을 위해, 혹은 사랑 때문에. 아니면 그저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신이 만든 가혹한 질서를 비켜 가려 애씁니다.
어쩌면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도 필요한, 신에 대한 올바른 관념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신, 혹은 세상의 거대한 질서가 우리를 사랑하고 연민한다는 사실을 믿고, 우리의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어떻게든 해보려 노력하는 것. 그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신벌을 받아 오백여 년을 지상을 떠돌며 사람들을 돌봐야 했던 혜호가 마침내 동생을 어떻게 재회했는지 알게 됐을 때처럼. 오직 자신의 의지로 나눠진 진혁의 저주가 거꾸로 두억시니로부터 승환을 구했듯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신은 결코 아득히 높은 곳에 고고히 혼자 앉아 있지 않을 겁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염원과 공물을 가지고 찾아오길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5.
이 리뷰의 제목은 헐스루인 공주가 사탕병을 꺼내기 위해 받침대로 사용했던 두 권의 책 중 하나인 <신에게로의 사색적 산책>에서 따왔습니다. 기이담의 주제는 ‘신에게로의 도전적 산책’이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신은 왜 우리를 이 모양 이 꼴로 놔두냐는 도전적 질문으로 시작해, 끝내 폭넓은 사랑과 연민, 이해의 순간으로 돌아오는 그런 산책 말입니다.
6.
아쉬웠던 점 딱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갈까 합니다. <기이담>은 옴니버스식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각 에피소드마다 소주제를 품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소설의 몸통과 대주제를 형성하죠. 이런 형식에서는 특색있는 소주제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을 구슬처럼 꿰뚫는 대주제의 역할은 필수적입니다. <기이담>의 에피소드들은 아주 재미있었지만, 그것들을 관통할 만한 메인플롯이 다소 약한 느낌을 주는 건 아쉬웠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소설을 읽을 때 일어난 일보다는 일어날 일에 관심이 많다는 스티븐 킹의 조언을 좋아합니다. <기이담>의 분량은 대개 인물들의 전사에 할애되어 있고, 그에 비해 그 인물들이 펼쳐나가는 서사는 부족한 편입니다. 각각의 소주제들은 작품의 큰주제로 묶이지만, 서사적으로는 응집력이 약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앨리 앨리 라마 사박디니’에피소드의 두억시니와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동수자와의 만남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요. 출간을 앞두고 작가님도 새로 수정을 하고 계신 듯 하니, 어떻게 가다듬어 나오게 될지 기대하며 기다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