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자유로우라, 누구에게도 불리지 말고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무명의 별 (작가: 이시우, 작품정보)
리뷰어: 새벽마라, 22년 11월, 조회 78

무협은 어른들의 동화다. 어느 무협 소설 작법서에서 읽은 말이다. 이 말에 반항이라도 하듯, 이 소설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두 미성년자 주인공이다. 그러나 사실 미성년자 주인공이 특이한 건 아니다. 장르와 매체를 불문하고 미성년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은 드물지 않으니까. 심지어 <무명의 별>과 같은 무협 창작물에서조차 말이다. 그런 와중에 주인공의 나이가 작품을 판단하는 데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그럼에도 권별과 무명의 모험은 묘하게 그 점을 신경쓰게 만든다. 유독 풋풋하고, 유독 종잡기 어렵다. 뛰어난 재능과 속도감 있는 서사는 두 주인공이 미성년자라는 걸 잊게 하기는 커녕 더더욱 부각시기키만 할 뿐이다. 주인공 콤비의 곁에서 통영으로 함께 걸어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랜드볼룸 관객석에 초정된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둘을 지켜본다면 그런 인상은 더욱 강해진다.

어째서 그렇냐는 질문에 한 마디로 답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굳이 요약해본다면, 그들이 이름 없는 무명無名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려지길 바란 자들>

예로부터 불려진다는 것은 존재를 규정하는 행위였다. 우리에게 친숙한 저승사자는 망자의 이름을 세 번 불러 혼과 육신을 분리하고, 현대에조차 사람들이 처음 만난 상대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는 이름을 밝힌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이름을 단순히 “성명”으로 한정지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을 알면서도 다르게 지칭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권별이 무명성으로 불렸듯이, 권별이 장호비를 “선생님”으로 불렀듯이. 이런 예시들을 허용하기 시작하면 이름의 범위는 급격히 방대해진다. 매화당주나 봉황련주처럼 한 집단을 대표하는 직책 또한 이름일 것이고, 노야차와 산중노인처럼 인물의 특징을 함축하는 은유 또한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이름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앞서 “불림”을 존재의 규정이라 말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름은 우리의 존재를 설명한다. 이름을 가진 인물이 어디의 누구인지 설명하며, 살면서 무엇을 해 왔는지를 설명한다. 그럼으로서 이름을 가진 인물은 그 이름에 마땅한 대접을 받는다. 대접이라기엔 격렬하지만, 노야차의 방문이 통영의 유지들을 집결시킨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모든 사회적 존재는 예외 없이 “불려진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던 은자조차 은자라는 별명이 있었듯, 우리가 사회적 관계망 안에 있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항상 누구의 무엇이기를 피할 수 없다. 충분히 성숙하여 자신의 역할을 결정하고, 그 역할에 따른 의무를 책임지는 자들. 그런 자들을 우리는 어른이라고 부른다. 사족이지만, 신산객 구호성과 소야차 이소은에게서 미묘한 미숙함이 드러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스스로 신산객과 소야차의 별호를 자칭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계산”과 “노야차”라는 대상에 종속되기를 선택한다.

그렇다면 이제 “무협은 어른들의 동화”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문파의 몇 대 제자이자 별호와 성명을 지닌 채, 스승과 원수와 친구를 가진 무협 소설의 인물들은 항상 누군가의 무엇이니까. 모 문파의 소속으로서 지켜야 할 명분이 있고, 몇 대 제자의 배분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옳지 않다고 여긴다면 협의의 이름으로 칼을 뽑는다. 사회가 낳은 불문율을 끊어내고 자신의 힘으로 자유를 쟁취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동화라고 부르는 건, 그런 종류의 비아냥이다.

 

<왜 무명인가>

무명, 무명성. 생각해보면 기묘하다. 보통 주인공이 둘이라고 하면, 둘을 구분하기 위해서라도 이름을 다르게 지으니까. 무명이 별을 별이라 부르고, 별은 무명을 무명이라 부르기에 불편함이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앞서 이름을 어른이라는 뜻으로 치환해낸 논리에 따르면, 둘의 이름이 같았던 이유는 비교적 뚜렷해진다. 무림 세계를 모르고 살아온 별과, 무림 세계밖에 모르고 살아온 무명은 완전하지 않다. 어른으로서 자립하기에는 지식도 수단도 투박하기만 한 그들은, 그렇기에 이 소설 속에서 가장 미성년자스러운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이 표현이 오로지 미숙함을 강조하는 표현만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소위 어른이라는 존재들은 아이 이상으로 미숙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오고 가는 검과 권만을 대화로 삼아 온 어른들에게 어떠한 종류의 성숙함을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별의 미숙함이 장점으로 바뀌는 부분은 이 부분이다. 싸움과 충돌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해결해 온 어른들 세계의 불문율을 별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애먼 사람을 분질러놓겠다는 무명의 행동을 만류하고, 노야차와 충돌하는 통영의 유지들을 중재하며 상식과 평화를 논한다. 권별이 최초에 본인의 무위를 깨달았던 싸움조차 혈적검과 대화를 나눠보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임을 상기하면, 상식의 이름으로 무림 세계를 대하는 권별의 태도가 갖는 일관성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언제까지든 이름 없는 자일 수는 없다. 아이가 어른이 되듯, 선택의 시간은 찾아온다. 강대한 적 앞에서 친구마저 잃고 궁지에 몰린 권별에게 조력자는 묻는다. 도망치지 않겠느냐고. 힘을 길러 돌아온 다음에 복수를 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그것이 이성적으로는 최선의 판단임을 알면서도 권별은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적과 맞서 싸움으로서 이 여정의 결판을 짓겠다고 말하는 권별에게 노야차가 건네는 말이란 고고하다.

“시시하기 짝이 없는 세속의 이치와 도리를 따르거나, 남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무공을 익히는 것이 아니다. 선택에 따라오는 것을 네가 스스로 짊어지겠다는 걸 누가 말릴 수 있단 말이냐.”

그 말 이후 권별은 처음으로 자신이 고른 싸움 앞에 선다. 어른들의 사정에 휘말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벌인 싸움이 아니라, 감정과 치기에 휘둘려 함부로 저지른 폭력이 아니라. 정제된 적의와 명료한 결의로 은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밝히고 결착을 청한다. 이 장면에서 이름 없는 별은 “무명성”이라는 무림인으로 완성된다.

 

<맺음말>

주인공처럼 기억에 남는 어느 기점을 통해서 우리가 어른이 된다면 좋겠지만, 대다수는 그럴 수 없다. 어른이라는 이름은 어느샌가 다가와서 하나 둘 등짐을 늘려놓고는, 이제 당신은 이미 어른이라며 그에 맞는 행동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이 소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곧 어른이 될 그런 소년들에게 건네는 안내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혼란스럽고 두려운 격동의 시기에,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지켜내려면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에 대한.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