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제목은 별 의미 없습니다. 이야기 안에 등장하는 두 여성 모두 입술에 대한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버려서..
1.
전 사실 브릿G에서 연재 작품은 잘 읽지 않습니다. 연재 소설의 상당수가 판타지 장르이고 전 판타지와는 상성이 별로 좋지 않아서요. 그래서 ‘은사와 은사’의 리뷰 의뢰를 받았을 때도 조금 걱정이었습니다. 내가 이 작품의 장르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까? 하는 점에서 말이죠. 결과적으로 말하면, 덕분에 판타지 장르에도 관심이 생겼습니다.
2.
작품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인트로에서는 겹차원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최신 과학이론을 언급하며 겹차원을 설명하고 있어요. 그리고 전 칼 세이건과 스티븐 호킹에게 발목 잡혀 물리학과 천문학으로 학위까지 받은 과학소년(또는 아저씨)입니다. 업계비밀 하나 알려드리면, 저처럼 자연과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오히려 과학적 고증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요. 그런거 따졌다가 재미 없어질 걸 아니까. 적당하 구슬려 흘릴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해요. 오히려 상상과 이론이 적절히 섞인 세계를 보면 마구 흥분합니다. 작가분께서 교양이 넓으신 걸로 보아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겹차원은 실제로 연구되고 있는 개념이에요.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스케일의 차원에서 고작 수 센티미터 떨어진 곳에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는 가설이 있어요. 그리고 그 공간들이 팔랑거리면서 부딪히면 빅뱅이든 빅크런치든 뭔가가 일어난다나 뭐라나(사실 제 분야가 아니라 잘 모릅니다!).
이런 흥미진진한 가설에 이야기를 덧붙인다는 건 정말 짜릿한 일이죠. 과연 어떤 이야기가 가능할까? 알코올을 마구마구 들이키며 겹차원을 이야기하는 알프레아 헉슬리는 뭐하는 사람인가? 셰익스피어 교수는 도대체 어떤 꼴을 당한 건가?
기대감이 가슴에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작품의 전반부는 ‘인디아나 존스’와 ‘미이라(1999년작! 2017년작 아님!)를 연상시키는 미스테리 탐험물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거 역시 제 취향을 자극했어요. 과학소년이기도 했지만 고대문명 미스테리 매니아이기도 했거든요. 유명한 초고대문명 지지자인 그래이엄 핸콕의 ‘신의 지문‘ 따위를 읽으면서 케찰코아틀이라는 깃털 달린 뱀에 대한 상상을 키웠었죠. 그런데 작품 속에도 뱀이나와요! 은빛 뱀. ‘코아틀’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흥분이 턱 밑까지 이르렀습니다. 어릴 적 살짝 들여다 보았던 세계가 여기서 다시 다른 모습으로 살아나는구나! 하면서요. 게다가 알프레아 헉슬리는 강하고 매력적이며 독특한 센스를 지닌 10대 소녀입니다. 어여쁜 소녀가 무기를 휘두르며 고대유적지에서 은빛 뱀과 싸우는 장면을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나요?
3.
하지만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이야기의 흐름이 정체된 것처럼 느껴졌어요. 콜라병을 한참 흔들어 놓고 이제 병을 따기만 하면 폭발할 것 같은데, 뚜껑을 조금만 열어서 김빼는 소리만 듣고 그냥 냉장고에 집어 넣어버린 느낌이랄까요..? 너무 애매한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
초반에 깔아둔 많은 흥미로운 소재들이 적절히 정리되지 않고 끝나버린 것 같아요. 주인공과 플라토닉한 관계였던 셰익스피어 교수의 정체와 죽음에 대한 궁금증도 잔뜩 부풀어 올랐는데 은빛 뱀에게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만 제시되고 주인공도 너무 쉽게 납득해버리는 것 같아요. 은빛 뱀과의 싸움도,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라고 하기에는 주인공들이 그렇게 큰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 같구요.
그리고 알프레아 헉슬리는 굉장히 인상적인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독한 술을 벌컥벌컥 들이킨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소위 ’라노벨’에 등장하는 여자주인공 같은 전형적인 모습도 조금씩 보여요. 신비로운 등장, 강한 힘, 특별한 경험이나 지식, 막힘 없는 말솜씨, 어린 나이, 앳된 모습, 그리고 츤데레한 성격. 이런 캐릭터는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하지만 라노벨에서 쉽게 소비되고 있는 캐릭터인 만큼 다루기 어려운 캐릭터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아쉽게도 이 작품에서 알프레아 헉슬리는 엄청난 주량을 제외하고는 그 이상의 개성이 부여되지 않은 채 이야기와 함께 사라집니다.
연작의 일부라서 그런 걸까요? 그럴 수도 있어요. 만약 장편소설의 초반부였다면 충분히 이해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별개의 중단편으로 구분했다면, 그 안에서 최소한의 리듬과 완결성은 확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면, 영화 ‘반지의 제왕’이나 ‘대부’, 또는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의 작품들은 연작 또는 같은 세계관이면서도 각각의 작품이 하나의 이야기로 발단부터 절정/결말을 가지며 완결성을 이루고 있지만, 몇 년 전에 개봉한 ‘배트맨 대 수퍼맨’은 큰 이야기의 일부를 그리려다가 결국 이도저도 아닌 결과물이 나와버렸죠.
(극단적인 예입니다! 이 작품을 감히 ‘배트맨 대 수퍼맨’ 따위에 비교하는 게 아니라구요!)
물론 모든 이야기에 발단부터 결말까지의 전형적인 구조와 완결성을 요구하는 건 부당해요. 원고지 200장 이하의 단편에는 더욱 부당하죠. 하지만 그것들이 일반적인 장르소설을 읽을 땐 대개 요구되는 특징이라는 것도 사실이죠. 작가분이 그리고 있는 큰 세계관 속 한 사건을 담아내기에는 원고지 200장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공지에 있는 차트가 더 큰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 전 알고 있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Phase One은 하나의 연재작으로 올리셨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아직 ‘Jade Decustis 3부작’과 ‘동굴 속의 닻’를 읽지는 않았지만요.
4.
작가분께서 독설을 원하시는 것 같아 위에서는 자잘한 단점들을 좀 거창하게 늘어놓아 봤습니다. 하지만 결코 수준 낮은 작품이 아니에요.
조금만 읽어도 작가분이 많은 배경조사를 했고 세계관을 철저하게 짜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위에서 말한 단점들도 말하자면 ‘장편 소설의 앞부분만 따로 떼어 놓은‘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정말 장편 소설의 앞부분이었다면 오히려 뒷이야기에 대한 기대와 흥분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해냈을 거예요.
또한 문장도 수려합니다. 군더더기 없이 담담한 문체로 필요한 것만 여유롭게 서술해 나가서 막힘이 없어요. 중간중간 나도 이런 묘사를 써보고 싶다라고 생각하기도 했구요. 외국어가 자주 등장해 흐름이 끊기기도 하지만, 한국인이 외국을 여행하는 상황을 오히려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ARTIFEX WORLD TALES도 스타트를 끊었으니, 조만간 나머지 작품들도 읽을 예정입니다. 그러고나면 작가님의 세계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겠지요. 겹차원을 어떻게 다룰지, 궁금해집니다. 특히 ‘시부야 어셈블’이 기대되네요. 제가 일본에서 10년 정도 살다가 왔거든요. 시부야가 매력적인 배경이기도 하고, 가까이 있던 장소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도 흥미로우니까요.
앞서 말한 것처럼, 저는 판타지 장르에 익숙하지 않지만, 이런 스타일이라면 도전해 볼 마음도 생깁니다. 장르 편식은 좋지 않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브릿G의 다른 연재 작품들에도 관심이 생기네요.
작품 잘 읽었습니다. 큰 세계관을 장기적으로 그려나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거라 생각해요. 끝까지 노력하셔서 마지막 매듭까지 지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담: 스마트폰이 있는데 국제전화 비용을 걱정하는 부분은 조금 의아했어요. 우리에겐 스카이프가 있으니까요!
여담2: me.com이라니! 이건 애플의 흑역사 모바일미가 남긴 유산 중 유일하게 가치있는 것 아닙니까?! 대학생이라는 작가분의 나이를 의심하게 됩니다..
여담3: 작가분이 자신의 재능을 너무 낮춰보고 계신 것 같아요. 충분히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해요. 초보 글쟁이인 제가 말하기도 좀 그렇지만, 작가분의 문장은 깔끔하면서도 여유가 있고, 그 안에 담긴 사색도 다른 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