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과 출산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자 새로운 삶을 이어간다는 의미이기에 응당 모두에게 축복받아야 할 사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생명은 잉태와 동시에 모두에게 환영받으며 탄생을 준비하지만 어떤 생명은 심지어 품어준 어머니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며 그 모진 삶을 끊어갈 것을 외부로부터 강요받습니다.
삶은 참으로 불공평하고 삶을 살아간다는 건 그러한 삶에 익숙해져야 함을 의미한다는데, 본인이야 이미 태어났으니 그렇게 유감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건 어찌저찌 가능하겠지만서도, 다음에 내 피를 이어갈 다음 생명에게도 이걸 그대로 반복하게 한다는 건 굉장히 고민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 자신이 겪어보았기에 이 길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겠지요.
주인공은 여성으로 태어났고 여성으로 살아왔으며 그 과정에서 여성이기에 겪게 되는 많은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세월이 지나며 조금씩 나아진다고는 하지만 그 짙은 어둠 속에서도 더더욱 어두운 곳에 해당하는 삶을 살아왔던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이러한 삶을 살아가게 한다는 결정을 내리기 어렵고,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공감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어두운 수술실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낙태에 관련된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낙태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예전에는 삶은 태어난 김에 살아가는 것 정도로 인지했지만 오늘날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삶은 적어도 그것보다는 좀 더 나은 것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태어날 아기 본인의 의사는 물을 수 없지만 통계적으로 심정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탄생이 살아가야 하는 길은 산모와 아이 모두에게 있어 너무나도 좁고 구불구불한 천길 낭떠러지길과 같아 감히 타인에게 한 번 겪어보라 말할 수 없는 길이기에 그녀는 오늘도 메스를 듭니다.
편견 억압 강박 비난 고통…이 이야기는 낙태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되 그와 비슷한 사회적 시선을 받는 다른 음지의 이야기 또한 다룹니다. 특별히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그렇게 되어버린 것을 ‘잘못’되었다며 비난하는 외부의 시선은 축복받지 못한 아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감정과 결합을 축복이 아닌 비난의 대상으로 규정짓습니다. 소극적으로 문제를 제거하는 것에서 그치던 주인공은(그런 그녀가 댓가로 받아드는 오렌지는 여러모로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사건이 진행되며 본인이 저항해야 할, 그리고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이가 아닌 다른 것을 향해 메스를 들고, 어두운 수술실로부터 밝은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이후 그녀의 미래가 어찌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메스의 댓가를 달콤하고 신,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버리는 오렌지가 아닌 축적의 의미가 있는 금전으로 바꾸고 그걸 쓰게 된 시점에서 최소한 그녀 자신의, 그리고 그녀 주변의 사람들에게 있어 보다 진취적인 미래로의 가능성이 열렸음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정해진 표기법이 클리닝이라지만 그와 관계없이 크리닝이 좋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태영과 같이, 당당해진 그들의 삶에 좀 더 환한 별빛이 다가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이상 클리닝 감상 후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