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은 어떨 때 가장 맛있을까.
맛있는 반찬에 감칠맛을 더해주는 조미료처럼, 이야기에도 특유의 풍미를 돋우는 재료가 있다. 이미 충분히 잘 구성된 서사에 이것저것을 알맞게 톡톡 뿌리면 독특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창작물을 읽고 보고 들은 적 있는 모두가 공감할 만하다. 어떤 작가는 문장으로, 어떤 작가는 문체로, 어떤 작가는 인물로, 어떤 작가는 대사로, 어떤 작가는 사건으로, 어떤 작가는 배경으로 승부한다. 독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맛을 찾아 배회하다가 ‘맛집’을 찾으면 정착한다. (나는 이 작가의 문장이 좋아. 나는 이 작가의 인물이 좋아. 나는 이 작가가 만드는 사건이 좋아. 아는 이 작가 소설의 모든 배경이 좋아.)
조미료는 소금과 설탕, 한국인에게 필수적인 고춧가루처럼 보편적으로 대부분의 음식에 어울리게 첨가되지만 강한 맛과 향을 가진 것들은 조화될 수 있는 특정 음식에 소량만 더해진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어울리는 서사에 조금씩 쓰여야 맛있는 요소가 있고, 대체로 해당 장르에 고루 들어맞아 독자에게 예상 가능한 즐거움을 주는 소재도 있다. ‘괴담’이라는 장르에서 조미료와 같은 성질을 꼽아 보자면 보편성, 일상성, 익명성 등이 있다. 여기서 ‘괴담’은 많은 자본이 투입된 상업 공포영화와는 스토리텔링의 결이 조금 다르다. 작고 소담한 이야기. 입에서 입으로 전해 왔을 법한 이야기. 그러나 일상적인 상황에서 느껴지는, 적당히 묵직한 공포가 괴담 안에는 깃들어 있다.
이런 맛을 지닌 괴담이라는 음식에 보편성과 일상성은 소금처럼 필요하다. 괴담의 배경이 우주, 자연재해, 전쟁처럼 거대하고 위급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서사’가 아닌 ‘이야기’의 무게를 지니기 때문이다. 괴담은 일상적이어야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벽에 화장실을 갔을 때, 학교에 꼭 풀어야 하는 문제집을 밤에 가지러 갈 때, 그러다 바닥에 떨어진 가발을 보았을 때. 독자가 공포를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괴담은 일상과 연결될 때 즐거움이 배가 된다. 일상성을 획득한다면 괴담의 맛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독자는 범세계적인 공포를 일상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괴담 속 주인공의 경험은 보편적일 때 힘을 얻는다. 도시화된 공간에서 대중은 엘리베이터를 한 번쯤 경험했으며, 대체로 자주 그것을 이용한다. 그들은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대체로 자발적으로 학교를 다닌다. 그리고 살다 보면 새벽에 화장실을 가게 되는 일은 모두에게 생각보다 종종 발생한다.
이렇게 일반적인 배경과 사건이 소설에 형성된다면 이것에 어떤 감질맛을 추가할 수 있을까. ‘익명성’은 이런 고민을 꽤 유연하게 해결한다. 물론 당신 앞에 선 사람이 ‘내가 겪은 일인데 말이야…’라고 시작하는 괴담도 실재성의 면에서 특수한 오싹함을 청자(또는 독자)에게 줄 수 있다. 정확히 그 반대편 끝에 있는 것이 ‘익명성’이다. 익명성은 ‘일반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공포를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익명의 사람이 겪은 일은 처음에 나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세상의 누군가 한번쯤’ 겪은 사건이다. 특정 사건의 당사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가 확실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가 내 옆에 앉은 사람일 수 있다. 어제 스친 행인일 수도 있고, 집에 있는 가족일 수도, 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편성과 일상성, 익명성은 이야기의 ‘조미료’라고 하기에는 심심해 보인다. 자극적이지도 않고 맵거나 짠 것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 ‘밍밍한’ 조미료를 사용하기 전에 소설 속 ‘자극’의 기능을 생각해 보자. 이야기에서 ‘자극’이란 무엇일까.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은 콘텐츠 소비자의 쾌락을 건드린다. 스토리텔링에 부합하는 수준의 폭력은 말초적인 자극 이상의 의미를 갖지만, 오로지 ‘매운’ 맛을 위한 폭력은 일시적인 감정의 변동을 일으킬 뿐이다. 공포도 이와 같다. 괴담 안에 은은히 깔린 공포는 독자가 그것을 읽거나 들을 때에는 분명하게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향유자가 일상으로 복귀한 후, 괴담 속 상황이 실제로 만들어졌을 때 극적인 공포가 형성된다.
이처럼 자극적인 감정인 공포에 폭력이 가미된다면 극성은 배가 될 수밖에 없다. 보편성, 일상성, 익명성은 강렬한 감정인 ‘두려움’을 중화하는 동시에 효과적으로 그것이 일상에 스미도록 한다. Q씨 작가의 소설 «괴담과 사람들-101가지 이야기’»는 이 세 속성을 모두 가졌다. 매 에피소드는 이야기의 전달자인 ‘Q’라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독자에게 전해진다. 괴담의 발화자와 청자가 모두 익명인 동시에 분명하지 않다. 짧은 분량으로 끊어지는 이야기는 촘촘한 서사성이 결여되어 있지만, 극단의 익명성을 얻는다. 한두 개의 중심 서사가 전체 맥락을 끌고 가는 방식이 아닌, 101가지나 되는 괴담을 나열하며, 작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작가는 질문과 대답으로 이 소설을 시작한다.
Q : 기이한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A : 네. 저와 옆에 있는 제 친구가 대학교 때 겪었던 일입니다. 과는 달랐지만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저희는…
이 짧은 두 줄의 대사로 독자는 이 소설의 모든 에피소드가 Q라는 사람이 타인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임을 암시한다. 독자는 은연중에 매 에피소드의 사건에 ‘경험자’를 부여한다. 한 번 청자를 거쳐 발화되는 이야기는 익명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갖는다. 이름 없는 자의 이야기는 ‘특정’ 청자의 손을 거쳐 가공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 사건은 완전히 허무하지 않고 ‘누군가’는 경험했으며 이를 발화한 사람이 있다.
작가는 자신의 필명도 소설 속 장치 중 하나로 활용한다. 청자이자 서술자인 익명의 ‘Q’는 작가의 필명인 Q씨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물론 모든 괴담이 실제 작가가 전해 들은 이야기인지, 어디까지가 창작인지는 독자로서 파악하기 어렵지만, 작가는 이러한 설정의 재미를 통해 현실 중 일부를 소설 속 배경으로 끌고 오는 효과까지 얻었다. 작가가 발화자라는 것을 파악한 독자는 소설 속 배경을 현실의 일부로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경계가 흐려진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알파벳의 익명 뒤에 숨은 101가지 이야기는 언제나 확장되고 재조립될 수 있다. 우리는 거대한 괴담의 ‘유니버스’ 안에 도착한 것이다.
버스를 타고 가는, 밤길을 걷는, 집에 혼자 있는, 기숙사에서 막 잠에 들려는, 장을 보고 지금 돌아온, 샤워하는, 밥 먹는, 옷을 갈아입는, 카페에 있는 당신에게 누군가 다가온다. ‘Q’라는 이름이 쓰인 명함을 내민 그는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기이한 이야기” 같은 건 알지 못한다는 당신. 경험해본 적 없고, 겪어본 적 없는 공포를 지어낼 바엔 이 불청객을 쫓아버리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분명 방금 전까지 혼자였는데.
오늘도 기약 없이 비어 있는 당신의 집 문을 누군가 두드린다.
똑, 똑, 똑.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