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식하지 않고 번식하는 인간.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인간 생식의 다양한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먼 미래의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번식할까. 특히 오래 전부터 장르로서의 SF는 여성이 임신하지 않는 사회를 다루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배양 수조, 인공포궁, 3D 프린터 등 번식의 방법은 다양했으며 인간들이 그렇게 다음 세대를 만드는 이유 또한 여러 가지였다. SF 작가들은 우생학과 인간 착취의 비판 등 심도 있는 논의부터 단순 유희에 이르기까지 콘텐츠 속 체외 임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인공생식은 인간과 인간이 만나 다른 인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여성의 고통을 줄이기 때문에 여성해방의 면에서도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 번식을 위한 생식은 한 인간과 다른 인간의 생식세포를 결합하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특정 사회적 주제를 다루기 위해, 또는 획일화된 사회상을 반영하기 위해 인간 ‘복제’를 등장시키는 스토리텔링도 꾸준히 생산되는 중이다.
인간 복제는 한 사람과 동일한 유전자형의 사람을 한 명부터 무한대로 복사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 복제는 왜 서사로서 매력적일까.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투영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복제인간은 치료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신체 전반을 복제하는 것이 아닌 특정 세포를 배양해 장기를 만들어 이식하는 기술은 이미 개발되었다. 자신의 세포를 배양해 복제한 장기는 다른 사람이나 동물의 장기보다 이식 후 부작용이 덜하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사고처럼 위급한 순간에 곧바로 쓰일 수 없다. 그렇다면 이미 완성된 신체 부위를 가진 인간을 만들어 그런 급박한 경우를 대비한다면 어떨까. 분명 훨씬 효율적이고 안전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은 복제를 통해 자신의 생명을 ‘연속’할 수도 있다. 신체의 노화로 생명을 ‘연장’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만,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가 개발된다면 새로운 신체에 기존의 기억을 이식해 다음 수명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인간은 복제를 통해 노동력을 증대할 수도 있다. 로봇에 비해 인간 신체 유지에는 많은 자원이 필요하지만, 의사소통의 면에서 편리함이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인간 복제는 엄격한 윤리적 잣대로 금지된다. 일반적으로 인간복제가 상용화된다면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대두될 것은 ‘누가 원본인가’ 하는 논쟁이다. 분명 인간 복제는 태초의 원본에서 복사본을 제작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원본과 복사본이 동시대에 존재할 경우, 특히 생명의 연속이 아닌 치료와 노동력을 목적으로 인간 복제를 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점이 문제시될 수 있다. 둘의 유전형질이 동일한데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우월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모순이기 떄문이다. 둘째로 이런 인간 복제는 대체로 생명 존재를 수단화한다는 문제에 부딪힌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인간 복제가 실현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치료 목적의 장기 배양에서 인간을 복제하는 단계로 쉽사리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도, 분명한 이점이 있지만 노동력을 위해 인간 생산을 시도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세 번째로 인간 복제는 계층 간 불평등을 심화할 수 있다. 인간 복제가 존재하지 않는 현 상황에서도 인간 사회는 양극화의 극단을 달리고 있다. 이는 주로 경제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지만, 의학 기술의 발달에 따라 수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인간복제까지 실현된다면 어떨까. 이는 새로운 노예제의 탄생으로 이어져 돈 많은 사람이 다시금 노동력을 독점하는 사회 구조를 만들 수도 있다.
전술하였듯 이런 윤리적 질문의 반대편에는 항상 인간의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의 폭발을 제한하기 위한 윤리적 질문이 있기에 수많은 SF 작가들은 윤리와 인간의 욕망을 대척점에 놓고 주로 그들의 끝없는 욕심을 강조해 왔다. 그리고 여기, 드디어 인간 복제의 ‘템플릿’을 상상하기에 이른 소설이 있다. 무제한으로 인간을 복제해 진짜 노동력으로 삼는 세상. 인간이 거의 절멸한 범지구적인 사건 이후, 밀폐된 공간에서 끊임없이 복제된 인간들. 일련번호로 불리는 그들이 자신의 세상에 발생한 오류를 깨닫고 단절되어 있던 곳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그들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 세계에 일어난 오류는 ‘템플릿’의 고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불완전한 멸망
사피엔스 작가의 단편 〈템플릿(Template)〉은 “어느 미친 천재”가 인터넷망을 파괴할 바이러스와 웜을 개발하며 핵무기를 제어할 수 없게 된 이후의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종말의 날’이라 일컫는 그 시점 이후로 인간은 커다란 공동체인 ‘국가’나 ‘도시’의 단위를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만든 작은 사회에 거주하기 시작한다. ‘온실’이나 ‘공장’이라는 곳에 갇혀 저들만의 기준과 관점으로 새로운 집단을 만든 것이다. ‘L10539869318170417’, 줄여서 ‘0417’이라고 불리는 엘도 그 집단 중 하나에 소속되어 있다. 그가 속한 집단은 본래부터 공장이었다. 무엇을 만드는 곳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공장의 최고 기술자는 자신의 원형을 대대에 남기기 위해 인간을 복제하는 ‘템플릿’을 제작한다. ‘종말의 날’ 이후로 이 공장은 인간을 찍어내는 곳이 된다. 템플릿을 사용하는 3D 프린터는 전기를 통해 가동되는데 그 전기를 돌리는 데에도 복제된 인간이 사용된다.
예로부터 ‘공장’은 대량으로 노동력을 소모하는 곳이었다. 기계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인간이 손과 발을 놀려 공장을 가동하곤 했다. 때문에 인간을 가장 많이 수단화하고 도구화하는 곳도 공장이었다. 어떤 인권도 보장되지 않은 채 노동하는 사람들. 불과 수십 년 전만해도 그런 사람들이 공장 노동력의 대부분이었다. 또한 공장은 기본적으로 같은 물건을 일정하게 찍어내는 곳이기도 하다. 사피엔스 작가는 이 점을 예리하게 포착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인간들과 그들의 힘을 어떤 잣대에 구애받지 않고 비인간적으로 소모하는 공간 배경으로 공장을 가져온다. 공장은 획일적인 물건을 찍어내는 동시에 생산자인 인간을 획일화하기 때문이다.1
그런 공장에서 신중하게 관리해야 하는 것은 ‘템플릿이다.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하기에 템플릿의 고장은 공장에 큰 손해다. 템플릿이 고장난다면 생산품에 하자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공장에서는 이미 인간이 도구 이상의 존재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량품은 가차없이 폐기된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노동력의 손실을 두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공장의 L과 M, T들은 템플릿을 찾기 위한 원정대로 차출된다. 공장 밖의 ‘여자’라는 종족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은, 그리고 그 ‘여자’가 ‘사람’에 비해 몸집이 작고 어깨가 좁고 가슴이 둥글다는 묘사는 공장 안이 남성 권력으로 작동하는 사회라는 것을 은유한다. (작가는 템플릿의 원형이 되는 인물들의 이름을 이태수 씨, 백인재 박사, 최희중 전무 등 우리 사회에서 통념상 남성의 것으로 설정한다) 남성에게서 찍혀 나온 남성들의 사회에서 사람의 기준은 ‘남성’이며 여성은 여전히 템플릿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다.
이렇게 남성적, 인공적, 폭력적인 공장에서 벗어나 ‘0417’이 마주한 것은 여성적, 자연적, 치유적인 장소인 온실이다. 〈템플릿〉에서 공장의 대척점에 세워진 온실은 인간이 스스로 생식, 발생, 번식하며 대지모신을 섬기는 곳이다. 온실에는 세 가지 종류의 인간뿐인 공장보다 훨씬 다양한 인간종이 살고 있다. 그들은 일련번호가 아닌 고유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곳에 템플릿을 찾기 위해 도착한 ‘0417’은 그곳의 사람들과 대화한다. 종말 이전의 생활 방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던 사람들은 공장에서 온 사람들의 왜곡되어 버린 사회상과 생각에 이질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들은 이방인에 불과한 L과 M, T에게 엘, 엠, 티라는 호칭을 부여하며 친절하게 대해준다.
여기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공장의 사람들이 인간의 성행위를 목격하는 장면이다. 공장에는 없는 인간의 생식을 본 L, M, T는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M785962는 ‘0417’에게 자신이 본 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0417’ 또한 그것을 본다. 그러나 M과 T의 행동에서는 단순 유희 외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0417’은 그 장면에서 눈을 떨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인간과 매우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소설 안에서 이 점이 좀 더 강조된다면 좋겠다.) ‘0417’은 온실의 인간에게 모종의 유대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과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어 한다. 번식이 아닌 생활 방식 전반, 그리고 더 나아가 ‘엘’이라는 이름이 새로이 붙은 자신에 대해 그는 한층 더 깊이 고민한다. 그 고민의 끝에서 그는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랐는지 물어준 유일한 존재인 희나를 사랑하게 된다.
진짜 템플릿은 어디에 있지?
그러나 안온한 나날은 오래 가지 않는다. 온실 속 인간인 조유나가 ‘인간의 열매’인 아기를 낳고 혼인준비를 할 무렵, 공장에서 온 인간들은 행동을 개시한다. 그들에게 조유나의 출산은 그저 ‘템플릿의 정상 작동’ 유무를 판단하는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다. M의 죽음을 기점으로 해 소설의 온도는 다시 한 번 바뀐다. 공장의 사람들이 온실에 들이닥치고 온실 속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아비규환 속에서 독자들은 인간 복제를 넘어선 잔인함을 발견한다. 남성-인공-폭력이 여성-자연-치유를 정복하려는 시도는 ‘종말의 날’ 이후에도 서슴없이 행해진다. 결국 그들은 애써 발견한 템플릿을 파괴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공장의 사고방식을 유지하는 한 “템플릿을 찾아!”라는 공허한 외침은 그들의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진짜 템플릿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이미 인간의 안에 있다. 단순히 다음 인간을 생산하고 싶다는 기계적인 욕망만 있더라도 우리는 그 템플릿을 잘 지켜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인간들은 어떤가. ‘종말의 날’이 도래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멸망하고 있다. 마치 템플릿으로 자신을 복제하던 공장 안의 남성들처럼. 짜인 틀로 생명을 도구화하던 그들처럼. 여성을 사람에서 분리하고, 동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으며, 단지 그녀들의 생산력만을 숭배하는 그 남자들처럼.
이 소설의 결말은 여성과 어린아이를 귀한 줄 모르고, 생명과 자연을 파괴하는 이들에게는 다음 세대가 아닌 멸망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사람을 찍어내는 템플릿을 탐욕스럽게 찾아다니는 공장의 사람들은 그들의 기이한 목적을 아루어줄 여성을 찾았음에도 보호하지 못했다. 그들은 온실 속 사람들을 절멸시키는 동시에 여자들을 없앴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여성에게서 아이가 발생하는 방식을 온전히 이해했다면, 더 큰 성적 폭력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어떤 방법으로은 그들은 템플릿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며 대를 이을 수 없을 것이다. ‘템플릿’은 그들이 만들어낸, 생산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서히 공장 속 사회는 고장나고, 망가지며 사라질 것이다.
두 개의 상반되는 공간, 한쪽이 다른 쪽을 제압하면 해결될 듯했던 문제는 결국 연쇄적인 종말을 불러왔다. 사피엔스 작가의 이 소설이 크게 눈에 띄는 이유는 지극히 이분화된 두 장소에서 인간의 여러 속성을 고루 대비했다는 데 있다.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자연의 법칙을 따르던 온실의 사람들, 그들은 효율보다는 공존을 선택했다. 지금 우리는 공장과 온실 중 어디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을까. 그 끝을 미리 상상해둔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인류의 끝을 감히 가늠해본다. 공장과 온실 중 어느 쪽의 결과를 따를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다.
이 짧은 소설 속 사람들은 종말로 인해 나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여전히 템플릿을 찾아 원정대를 보내는 인간들이여. 그대들의 안에는 이미 템플릿이 있다. 당신들은 어리석게도 템플릿을 없애고 싶어 안달이다. 이 템플릿들은 당신들과 같은 종이지만 까닭없이 지켜지지 못한다. ‘충분한 사랑’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들은 ‘여성’이라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