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있는 이야기와 독자에게 전달된 이야기 사이의 간극에 대해 공모(비평)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혈장인 이야기 – 붉은 반지의 여행자 (작가: 이광명, 작품정보)
리뷰어: 탁문배, 22년 5월, 조회 43

최근 지인들이 재미있다고 추천해 주는 웹소설들을 쭉 훑으니 여전한 갓세계물의 범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지난 달에는 누가 영민 0명으로 시작하는 영주님이라는 작품을 추천하면서 이세계 전생이 아니라순수한 이세계물이라고 소개해서 판타지면 판타지지 순수한 이세계물은 무슨 삼다수바 같은 소리냐며 빈축을 사는 걸 봤습니다. 어려서 매우 순수한 이세계물인 드래곤라자를 읽다가 결국 이렇게(?) 20세기 소년으로서는 감회가 삼삼한 에피소드였습죠.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런 계통발생학적인 구분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무슨 색인을 붙이건 간에 이야기란 그저 재미있거나 재미가 없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장르 자체가 이야기의 질을 결정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당연히 그 재미있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는 상당히 복잡미묘해서 내가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냐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만, 소극적인 측면에서 없으면 상당히 곤란해질 요소는 분명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장르소설, 순수한 이세계물이라도 말입니다.       

 

 

이하 스포일러의 마력이 감지됨.

 

 

문장에 대해서.

독서 경험이 이야기의 바다를 헤치고 나아가는 항해라면 문장은 기관실입니다. 땀내나는 어깨들이 열심히 석탄을 퍼날라야 하는 노동의 현장이라는 뜻도 되겠지만, 그보다도 기관이 제대로 안 돌아간다면 배가 앞으로 가질 않을 겁니다. 기왕지사 잘 나가는 김에 아름답고 섬세하며 기발하기까지 하면 금상첨화겠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한 속도로 잘 굴러가기만 한다면야. 고로 고만고만한 독자인 저의 수준에서 문장이 멈춰서거나 역회전하지 않으려면 기본적인 원칙에만 신경쓰면 됩니다. 예를 들어 다음은 도입부에 나오는 대목인데,

 

 검은 몽둥이를 든 경비병들은 사내를 향해 치켜들며 주변 상황을 살펴보았다.

 

경비병들이 사내를 향해 무엇을 치켜들었는지가 빠져 있습니다. 아마도 검은 몽둥이겠지만 그렇다면 경비병들을 수식하는 대신 목적어 자리에 들어가는 편이 나았겠지요.

 

 브뤼니게의 말에 의하면 과거 산 뒤에서 거주하던 마녀 마트로나는 사람들을 홀리고 다닌 죄목으로 화형에 처했다고 했다.

 

이 경우에는 주어가 누락되었습니다. 뭐 맥락상 당연히 왕이나 동네 사람들이 파이어펀치 하긴 했겠지요. 그래도 술어를 처해졌다고로 바꾸거나 화형에 처한 주체가 필요한 부분입니다이런 종류의 실수가 대단히 많은 것은 아니고, 아마도 고쳐쓰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상당히 자주 보이는 를 혼동한 문장과 함께 독서를 심히 방해하는 요인이 됩니다.

한편, 명시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나 제법 신경이 쓰였던 점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전지적 시점을 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자신이 없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분위기를 보니 두 사람은 당시에 자리에 없었던 듯했다. 간트는 실망한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자 한 경비병이 기억이 난다는 듯이 입을 작게 벌리며 소리를 냈다.

 

연속되는 모든 문장에듯하다혹은 듯이가 들어 있습니다. 비슷한 의미로, 딱히 그럴 필요가 없는 문장에서 보이다같았다도 자주 발견됩니다. 요즘 각종 인터뷰를 유심히 보면좋은 것 같아요라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불필요하게 한 발 물러서는 태도입니다. 좋거나 좋지 않음을 느끼는 주체는 나 자신인데, 갑자기 자아의 탐구에 나선 것이 아닌 바에야 스스로의 기분을 추정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전지적 시점에서 서술자는 이야기의 지배자입니다. 확신하지 못하는 인물이 따로 있거나, 특별히 의뭉스러워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이러면 이렇고 저러면 저렇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대사에 대해서.

독특하게도, 서술은 딱히 그렇지 않은데도 인물들의 대사가 상당히 강렬한 번역투를 보여줍니다.

 

 “그건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아. 중요한 건 자네는 아주 큰 위험에 처했다는 거야. 보통 큰 위험이 아니지.”

 “이 살인자야! 당장 몸에 두른 무기를 전부 버려라!”

 “내가 궁금해서 그런데 자네는 무엇을 보고 원한이 서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건가?”

 “그것이 어떤 고민을 주느냐?”

 

작가님께서 해외에 오래 거주하신 분이 아니라면, 위 대사들은 배경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입말에서 멀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목적상 충분히 그럴 수 있고, 대개의 경우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말하는 대로 쓰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말하는 대로 쓴다고 곧 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사의 경우, 현실에서는 하오체는 커녕 하게체를 쓰는 사람도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오나 하게체를 배제할 경우 말씨를 통해 인물의 개성을 드러낼 수단이 현저히 줄어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나 중세서양 배경의 소설이라면 문화의 차이상 어느 정도의 어색함은 피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사실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버지.’같은 대사는 언제 들어도 멋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한국어로 소설을 쓰기에 가상의 중세 유럽 왕정국가에서 살아 숨쉬는 등장인물들도 어디까지나 듕귁에 달은 나랏말싸므로 대사를 읊어야 합니다. 상당히 섬세한 절충이 필요한 부분이죠. 균형을 잘못 맞추면 인물들이 한글화를 잘못 외주 맡긴 외국 게임 캐릭터처럼 말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게임이야 한국 게임시장 사정상 이나마도 해주는 게 어디냐 하고 감지덕지 하겠지만, 영화나 소설에서는 제대로 된 번역가라면 용납하지 않을 일입니다(어머니…?).

또 속도감 있는 전개를 위함인것으로 보이나, 아무래도 인물들의 언동이 몇 단계를 건너뛰거나, 필요한 대화가 생략된 경우가 보입니다. 일례로,

 

 “믿을 수 없겠지만 나는 방금까지의 기억이 없소!”

 화가 난 야를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가까이 다가왔다.

 “빌어먹을 녀석! 네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내 말을 좀 믿어달라니까!”

 

방금 전까지 주인공인 간트는 음모에 빠져 수없이 많은 야를의 부하들을 시체로 만들어 놓은 상태입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칼을 버리고 투항을 하는 것인데, 방금 전까지 사람을 무더기로 도륙내놓던 자가 갑자기 칼을 버리고 황당한 주장을 할 경우, 화를 내기보다는 일단 믿을 수 없다며 경계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행동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인공도 자신을 믿어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후에 갑자기 근위병이 다가오고, 이미 심각한 상황에서 더 심각한 상황(마녀 출몰)을 보고하자 갑자기 야를과 브뤼니게는 간트의 말이 믿을 만하다고 여겼는지 셋이서 함께 홀로 향합니다. 이건 줄거리상의 문제기도 하지만, 명백히 필요한 대화가 결여된 상황입니다

빠른 전개를 지향하는 요즘 웹소설 중에는 인물들의 대화 이외의 요소를 거의 생략해버리는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소설의 동력원인 갈등은 인물들간의 갈등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설사 그렇더라도 이야기를 밀고 나갈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대사만 재미있어도 계속 읽어나가게 만들 수 있지요. 실제로 영화 시나리오는 거의 대부분이 대사기도 하구요. 달리 말해 인물들간의 대화가 팽팽히 조여지지 않으면 다른 요소로 이걸 벌충하기 어렵습니다.

 

줄거리에 대해서.

본 작품은 전형적인 이방인 서사입니다. 전형적이라고 해서 뭔가 식상하다거나 뻔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떤 시나리오 전문가는 모든 이야기를 일곱가지 유형 중 하나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던데(생각해보면 7은 상당히 큰 숫자이기도 합니다만), 아직까지 반례를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는 그만큼 검증된 이야기고, 변주실력이 뛰어나다면 얼마든지 독창적인 이야기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을에서 3대째 감자 농사를 지어온 한스 보다는 역시 마녀와 마법사들과 일반인들 사이에서 암약하는 혈장인이라는 존재가 훨씬 더 매력적이죠.

탐정소설의 주인공처럼(이 이야기에는 상당부분 추리의 요소도 있습니다), 주인공 간트는 싸움도 잘하고 마법(이 아니라 고대어지만)도 잘 쓰고 여자(마녀)에게도 인기가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매력적인 주인공은 사건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주인공이 무엇을 하든 혹은 하지 못했든 간에 에젤카의 마법은 실패했을 것이고, 국왕시해는 미수에 그쳤을 것입니다.

주인공은 반드시 능동적인 필요가 있으며, 주인공의 활약에 의해 세계가 변화해야 한다는 등의 이론을 설파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공이 이것저것 애써봤는데 어차피 안 될 일이라서 안 되는 서사구조는 그리스 신화에도 있고, 코스믹 호러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 어느 쪽으로도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국왕은 사실 인간의 형상을 갖춘 쓰레기였고, 안타깝지만 에젤카는 원수를 갚지 못하며 주인공은 뒷맛 씁쓸한 비극의 목격자로 남습니다. 그런데 이 구조에서 혈장인이라는 특수한 직종의 역할은 무엇이며, 그가 왜 등장해야 했을까요? 약에 취해 병사들을 죽여서 에젤카가 국왕에게 접근할 기회를 만들려고? 그리고 에젤카는 굳이 국왕에게 저주를 건 다음 다시 접근해서 마법을 통해 그를 죽이려고 드는데, 이런 방식을 택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설명이 안 되거나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본 작품은 아마도 연작의 도입부에 해당하고, 이를 감안하면 몇 가지 설정은 다음 이야기를 위해 남겨놓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주인공의 능력을 보여주는 데 치중해서 정작 그 능력이 발휘되는 맥락이 다소 설득력이 없어진 점은 상당히 아쉬웠습니다.

 

어쩌면 이런 시비조에다 음험하기까지 한 평가에 대해 작가님이 억울한 감정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 자신은 꼬우면 니가 뛰든가라는 반론에서 절대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는 기본적인 맞춤법은 커녕 띄어쓰기도 잘 모르는 사람이고, 글이라고 써 놓은 난장에는 비문이 한무더기입니다. 그러나 어느 바닥이나 마찬가지로, 톱플레이어들은 자기 일로 너무 바쁘신 관계로 다른 사람의 글에 입 댈 시간이 없으시기에 모자란 제가 감히 모자란 리뷰를 남깁니다. 그럼에도 굳이 왜? 라고 묻는다면, 이야기를 하려는 의욕이 느껴져서라고 하겠습니다.

넘겨짚자면 작가님께서 이 작품을 쓰시면서 어떤 인물, 어떤 장면을 그리고자 하였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묘사된 방식이나 배치된 위치가 다소 거칠지라도요저는 문학 전공자가 아니고, 전문적인 작문 교육을 받은 적도 없기에 남의 글쓰기 실력 향상에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은 기술적인 것이고, 연습하고 궁리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체계적으로 배운다면 빨리 습득하겠지만, 그저 계속 써 나가는 시행착오를 통해서도 익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욕구는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일처럼, 능력보다 의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작가님의 이야기는 회를 거듭할수록 나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가님께서 계속 글을 쓰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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