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는 한 사람을 보내는 동시에 기억하는 행위다. 어떤 사람은 국화와 리본 같은 물건으로, 어떤 사람은 투쟁과 연대라는 행위로, 어떤 사람은 기억하거나 생존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기린다. 세상에는 수십 수백억 개의 삶이 있었고, 그만큼 다양한 형태의 죽음이 존재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훨씬 많은 갈래의 추모가 있었다. 사물로, 마음으로, 행동으로 우리가 당신과 함께한 시간이 있었노라고 말하는 그것이 때로 마냥 슬프지만은 않을 때도 있다. 당신과 함께 했던 시간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가 곁에 없다는 것,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은 분명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였다.
이런저런 추모의 형태를 글로 만날 때가 있다. 시로, 소설로, 수필로. 대체로 먹먹하고 안타깝다가 끝내는 슬프다. 하얀색으로 끈질기게 연결되는 여기 이 의문의 죽음도 그러하다. 생뚱맞게도 우리는 지금부터 ‘양말’이라는 물건으로 추모 의식을 치를 것이다. 그 양말은 어떤 사람의 발이었다가, 수몰된 트럭이 되었다가, 자전거였다가, 히치하이커가 될 것이다. 이게 무슨 조합인지는 몰라도, 본래 인간의 삶이란 부조화의 연속이려니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한 사람이 무사히 사후에 닿을 수 있도록 빌어주기 위해서는 그의 삶과 가장 ‘닮은 것’이 필요하다. 그러니 우리의 추모는 새하얀 양말에서 시작해보자.
그 양말의 주인은 종종 맨발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북독일인은 추위를 느끼지 않아
이준 작가의 소설을 세 편쯤 읽어보니 그의 추모 방식도, 그것이 이루어지는 ‘독일’이라는 공간도 이제는 익숙하다. 어떤 작가의 글이 마음에 들어 세 번 내리 읽기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안에서 일관된 매력을 발견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조로 확신을 가져보자면 그의 소설 속 배경은 늘 어딘가 이국적이다. 그리고 실제로, 높은 확률로 다른 나라다. “베를린에서 도면을 그리고 글도 씁니다”라는 작가의 말이 빈 것은 아니라는 듯 그는 자신의 소설에서 유감없이 자신이 경험한 나라의 속내를 읽기 편한 방식으로 풀어놓는다. 이준 작가의 배경 묘사는 새로운 동시에 이질적이지 않은 매력이 있다. 독일적인 동시에 한국적이다. 그의 소설 속 베를린은 마치 국내의 어느 도시 같다. 더 좁게는 지금 내가 사는 동네 같고, 그보다 더 좁혀보자면 우리집 안방 같다.
누구나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을 잘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자신이 잘 아는 공간일수록 묘사에 신경써야 한다. ‘나만 아는’ 그곳은 대부분의 타인에게 처음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머릿속에 완벽히 들어있는 장소를 독자에게 안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공간의 제시에 집중하다 묘사가 상세하게 늘어지면 독자는 쉽사리 흥미를 잃는다. 따라서 배경 묘사의 균형을 지키는 것은 작가에게 분명히 필요한 센스다. 이준 작가는 ‘베를린’, 더 나아가 독일이라는 생소한 지명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과감하지 않게, 균형있게 풀어낸다. 그의 묘사는 새롭지만 낯익다. 지루하지 않게 신선하다. 이런 공간묘사의 장점은 ‘언어’의 탁월한 선택에서도 이어진다.
이전의 두 작품과 달리 〈베를린까지 320킬로미터〉에서는 유독 독일어로 된 명사가 높은 빈도로 등장한다. 지명, 근무지, 거주 방식 등 그 이름의 분야도 다양하다. 여기서도 작가는 문맥에 맞지 않는 외국어를 과하게 사용하거나 (종종 이국적인 배경을 중심소재로 한 소설에서 발생하는 실수다) 눈에 띄게 적은 빈도로 사용하는 실수를 피해간다. 그는 시기적절한 단어를 알맞은 분량으로 선택한다. 특히 베를린에서만 사용하는 여러 단어들보다, 우리말로 ‘유령’이라고 번역되는 ‘가이스트’를 독일어 발음 그대로 써낸 것에서 간단하지만 눈에 띄는 배려를 보았다. 작가는 ‘나’와 카일이 독일어로 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관용구를 그대로 써낸 다음, 유령을 ‘가이스트’라고 한번 더 표기함으로써 이국적인 언어의 맛을 살렸다. 동시에 앞서 ‘귀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독자들은 ‘가이스트’의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이미 아고 있는 ‘귀신’과 동일시할 수 있어 상상에 부담이 없어진다.
이 소설과 배경을 같이 한다는 두 전작에서도 이런 장점이 눈에 띄었지만, 그것이 전면에 그럴듯하게 드러난다는 감상은 없었다. 그러나 〈베를린까지 320킬로미터〉에서는 이국적인 배경 선택의 장점이 확실히 두드러진다. ‘독일’이라는 나라를 배경으로 설정한 것이 보태줄 수 있는 매력 이상의 무언가가 이 소설 안에 있다. 그것은 바로 언어를 선택하는 면에서 보이는 작가의 센스와 그것을 적당한 밀도의 이야기 안에 섞을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애도, 추모의 또다른 방식
그렇다면 작가가 세 번째로 독일에서 풀어낸 이야기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 그것은 하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소설은 앞의 두 소설보다 진중한 무게의 감정을 담고 있다. 죽음은 언제나 그것을 포함한 이야기에 묵직한 중량감을 준다. 그렇기에 작가가 소설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다루기로 작정했다면 누가 죽었는지, 그가 왜 죽었는지, 그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 이준 작가는 일련의 고민 끝에 ‘얀’이라는 인물을 선택했고, 그의 죽음을 통해 피어나는 추모의 방법을 그렸다.
얀은 “어떤 파도를 열심히 갈망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어릴적 목격한 파도는 역동적이고 한편으로는 환상적이었다. 얀은 그것에 “삼켜진 적” 있었으며 그것에 매혹당했다. ‘파도’는 얀의 ‘욕망’이다. 그는 그것을 오랜 시간 갈망했고 끝내 다큐멘터리를 찍고자 팀을 꾸렸다. 그리고 그것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이런 얀의 이야기는 ‘파도를 갈망했던 한 청년’의 죽음을 효과적이고 간결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으면 어떤 암시도, 풍성한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의 죽음이 여러 갈래로 해석되길 바랐기 떄문에 ‘어린 히치하이커’를 등장시켰다. 함부르크 출신의 카일은 얀과도, 그의 친구들과도 접점이 없다. 생뚱맞게 히치하이킹으로 차에 올라탄 카일은 천진난만하며 겨울에 자전거 여행을 하는 모험심도 갖춘 인물이다. 그는 얀의 친구들에게 자신의 자전거가 사라진 이야기, 더 정확히는 자전거를 찾다가 침몰한 트럭을 본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설의 막바지에는 색채 이미지가 중심을 이루며 그것은 대체로 흰색이다. 그러므로 소설의 서두에 언급된 얀의 흰 양말과 후반에 카일이 발견한 흰색 트럭은 맞물려 동일시된다. 흰색은 예로부터 추모의 색으로 쓰이곤 했으니 양말과 트럭은 결국 어떤 죽음의 모양을 상징하는 듯하다. 독자들은 이 상징을 통해 카일이 얀의 연장선에 있다고 짐작한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조상을 조사하며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고 말할 때 하나의 문장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계속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거야. 이미 다들 죽어서 목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그래도 왠지 연결되는 걸 느껴.”
카일은 죽음으로 발생하는 단절이 아닌, 죽은 후의 ‘연결’을 말한다. 그에게 죽음은 ‘끊어짐’이 아닌 ‘또 다른 연결’이다. 그것은 얀을 떠나보낸 그의 친구들에게 잔잔한 위로를 준다. 카일은 얀이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 보낸 전령과 같다. 카일의 말에는 우리가 여전히 ‘추억’과 ‘기억’으로 닿아 있으며 죽음으로 끊을 수 없는 어떤 단단한 관계에 이미 얽혀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어린 히치하이커는 우연을 가장해 이 차에 탑승했지만, 모든 것은 계획된 일이었다. 작가의 은은하지만 가볍지 않은 위로가 피어나기 위해서는 카일이 꼭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가 히치하이킹을 한 것도, 조상의 그래프를 그리게 된 것도, 모두 이 자그마한 마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고 해석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의 표현처럼 얀의 계획은 ‘처참하게 실패’한 것일까. 그는 어쩌면 자신이 가장 원했던 마지막을 맞았다. 그것은 얀에게 성공이었으나 주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슬픈 실패였다. 그러나 흰 트럭과 양말과, 흰 국화는 얀의 욕망이 그 파도에 휩쓸리는 순간 비로소 완성되었으며 그로 인해 애도가 남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음을 위로한다.
이 퍼즐판의 끝에는
이준 작가가 공개한 세 편의 짧은 소설에는 모두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설명이 달려 있다. 말하자면 세 소설은 연작인 셈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완결되지 않는다는 점은 이준 작가의 소설을 계속 읽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다. 그의 소설은 각각이 하나의 퍼즐 조각과 같다. 이 조각들은 하나의 퍼즐판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일종의 부품이다. 작가의 단편이 하나씩 공개될 때마다 커다란 세계가 조금씩 굳게 세워지는 기분이 든다. 이 세계는 하나가 다른 하나와 맞물리는 방식으로 완성되고 있지만, 그 안에서 개개의 조각이 더욱 단단해지는 모습도 보인다. 이준 작가는 비단 거대한 건물을 짓는 것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그는 건물의 벽을 세우는 벽돌 하나하나의 견고함도 신경쓰고 있다.
하나 더, 이 돌과 돌 사이의 이음매를 정교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작가의 전작인 〈자매의 탄생〉과 〈발광하는 여자친구〉는 ‘리아’라는 인물을 통해 확실한 연결점이 보였다. 그러나 〈베를린까지 320킬로미터〉는 이전의 두 작품과 연관된다는 느낌을 크게 받지 못했다. 독일이라는 배경을 공유한다는 것 이상으로 세 소설의 유기적인 연결 지점이 보였으면 한다. (독립된 하나의 소설로는 메시지의 전달 면애서 완성도가 높은 편이다) 연작 소설의 맛은 세계관의 공유에 있으며 그것은 비단 공간의 공유뿐 아니라 인물과 사건, 소재와 주제의 공유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이준 작가의 작업은 섬세하다. 이런 작가의 섬세함은 독자에게 세밀하게 뻗어가는 즐거움을 준다. 독자들은 이준 작가의 세계에서 자매들의 사랑과 우정을 보았고, 어떤 K-남의 우매함을 보았으며 이제 막 희게 꽃핀 애도와 추모의 방식도 보았다. 이 꼼꼼하고도 다양한 이야기의 모양은 친절하고 새롭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미 나온 소설을 찾아 읽는 것을 넘어서 그의 다음 소설을 기다리고 있다.
이미 완성된 하나의 단편이 아닌 ‘연작’의 묘미는 역시 장편보다는 개별적으로 완결된 이야기를 같은 세계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일 테다. 문장과 단어에서 보이는 탁월한 장점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작가의 머릿속 베를린에서 뛰놀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영역이 더욱 확장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이 퍼즐판의 끝이 비로소 맞춰질 때 즐거운 여행을 했노라고 조각조각 회상할 수 있도록 이준 작가와 베를린에서의 소설이 끊임없이 뻗어 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