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非) 영웅의 도구화-‘쫄몹’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삼나무숲의 파수꾼 (작가: 이필원, 작품정보)
리뷰어: SewoL, 22년 3월, 조회 30

1.

 

오늘날 대한민국 독서 인구는 ‘자존감 수업’을 받으며 ‘미움받을 용기’를 길러 온 이들로, ‘나’에 대한 이해와 재발견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이 자아를 재정립하고 자기 삶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무시되기 일쑤였던 사회적 약자, 성 소수자, 소수민족 등 소외당하는 이들에 관한 관심 역시 함께 제고됐고,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도마 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최근 몇 년간 한국문학 시장을 견인해 온 ‘과학소설’은 근미래 배경을 묘사함으로써 일상에서 접하기 힘든 새로운 상황을 상정하였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상상해 보는 문학의 한 갈래이다. 일종의 사고실험으로도 인지되는 이 같은 상상을 바탕으로 과학소설, 소위 SF라는 장르는 우리가 일상처럼 받아들이는 정상성에 의심을 제기하며 주류의 논리 아래 배제되기 쉬운 비주류 또는 소외계층과 타자의 이야기를 발화의 중심에 올려놓는 작업을 오랫동안 이어왔다.

 

이필원 작가의 단편소설 「삼나무 숲의 파수꾼」 역시 이 같은 작업의 연장 선상에서 읽힐 수 있다. 방독면과 보호 슈트 없이는 숨을 쉬며 돌아다닐 수 없는 황폐해진 지구라는 배경은 김초엽 작가의 『지구 끝의 온실』을 연상케 한다. 『지구 끝의 온실』이 하나의 영웅담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개개인의 감정과 삶이 윤색되거나 도외시되는 현상을 포착했다면, 「삼나무 숲의 파수꾼」은 실제 영웅 신화를 빌려 영웅의 성장을 위해 도구화되고 마는 비(非) 영웅의 비애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하며 화해와 공생을 도모한다.

 

2.

 

(스포일러 주의!!)

 

“44구경 권총이나 수류탄, 스텔스기 따위”가 창과 방패를 대체한 시기로부터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미래. 살아 숨 쉬는 생명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진 지구를 배경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오랜 동면에서 깨어난 ‘해원’은 세상이 망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를 만끽하게 된 아이러니를 체감하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생명 활동 징후가 포착된다는 ‘삼나무숲’이 자리한 30A 구역. 잠시나마 방독면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는 생존자들과 거동이 불편한 바텐더 안드로이드가 있는 선술집에서 해원은 삼나무숲을 지키는 파수꾼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오직 살육으로써 숲에 대한 인간의 접근을 원천 봉쇄한다는 괴물은 몇 안 남은 생존자들에게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의 방으로 불청객이 찾아든다. “네가 만든 괴물은 네가 달래줘.” 하고 말하는 그녀의 칼날이 해원을 향하고, 해원은 그녀가 누군지 묻는다. 자신을 ‘후회하는 후손’이라고 밝히는 그녀에게 해원은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고, 다음날 두 사람은 함께 삼나무숲으로 향한다.

 

이윽고 삼나무숲에 들어선 두 사람을 맞이하는 것은 검을 들고 선 안드로이드다. 숲에서 나가라고 으름장을 놓는 파수꾼에게 해원은 말한다.

 

“나는 오랜 시간 끝에 네가 정의 내린 길가메시나 엔키두의 후손이 아니야. 너 또한 후와와가 아니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웅 신화인 ‘길가메시 서사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실재했던 고대 도시국가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의 일대기를 다룬 이야기다. 길가메시는 3분의 2는 신이고 3분의 1은 인간인 초인이다. 처음에는 신의 능력에 취해 폭정을 일삼는 폭군으로 묘사되는데, 소설 속에서 자기 능력을 과신한 끝에 지구를 파괴하고 마는 인류가 후에 ‘길가메시의 후손’이라 언급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길가메시는 그의 폭정을 제압하기 위해 신들이 내려보낸 괴물 엔키두와 몇 날 며칠을 싸운 끝에 결국 친구가 되고 명성을 드높이기 위한 모험에 함께 나서게 되는데, 그들의 첫 모험지가 바로 괴물 후와와가 지키는 삼나무숲이다. 길가메시는 지혜로운 간계와 담대함을 무기로 후와와와 싸워 이긴다. 후와와의 목을 자루에 담아 돌아온 길가메시를 백성들은 영웅으로 칭송한다.

 

그런데 후와와는 어째서 삼나무숲을 지키고 있었을까? 그리고 길가메시가 후와와를 물리쳐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3.

 

사실 삼나무숲은 신들이 지상에 내려올 때 이용하던 강림지였다. 신 중에서도 최고 실세를 지닌 ‘엔릴’이라는 신이 친히 일곱 가지 권능을 하사하며 후와와로 하여금 신들의 강림지를 지키게 했다. 그때 ‘샤마쉬’라는 태양신이 새 신전을 지으려고 보니 삼나무숲 땅이 탐나기도 하고 나무가 필요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최고 실세 엔릴을 직접 거스를 수는 없고, 마침 지나가는 반신반인이 있어 대신 후와와를 처치하도록 부추기니, 그가 바로 길가메시였던 것이다.

 

뭇 백성의 입장에서는 공포의 대상이 제거됨과 동시에 삼나무숲의 자원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마땅히 환영할 일이었겠으나, 본분을 다했을 뿐인 후와와로서는 퍽 억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신의 명령에 따라 숲을 지키다 신에게 죽임을 당한 꼴이니 말이다. 결국, 후와와의 죽음은 길가메시의 영웅화를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다. 영웅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소모되는 비 영웅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물론 모두 서사의 극적 재미를 위한 장치일 뿐이다. 롤 플레잉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위 ‘쫄몹’을 떠올리면 쉽다. 쫄몹은 플레이어를 강하게 만들고 보다 본격적인 드라마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다. 플레이어나 독자의 주된 관심사는 내 캐릭터와 주인공의 성장에 있으므로, 쫄몹의 죽음은 대개 조명되지 못한다.

 

하지만 주인공이 아닌 자들의 이야기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DC의 대표 빌런 ‘조커’나 디즈니의 악녀 ‘크루엘라’ 등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줄줄이 흥행을 거두며, 주인공이 아닌 자들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음을, 그리고 대중은 기꺼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시사했다. 주인공의 이야기에 곁다리로 끼어들 수밖에 없는 존재들, 주류가 아니기에 소외될 수밖에 없는 자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 ‘나’를 돌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대에 살고 있고, ‘나’는 타자와 별개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타자의 돌봄’ 역시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설 「삼나무숲의 파수꾼」이 신화 속 후와와의 애꿎은 처지에 주목하는 방식은 사뭇 독특하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부터 아득한 시간을 뛰어넘어 21세기 오늘보다도 먼 미래에 기계 몸을 빌려 현신하게 된 ‘미래형 후와와’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져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고 마는 기구한 운명에 처해 있다. 인간을 지키기 위해 태어났고 인간을 지키는 것만이 존재 의의였던 미래형 후와와에게 있어서 무분별한 환경 파괴와 전쟁에 따른 인간의 자멸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위협하고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키는 대사건이 된다. 이에 미래형 후와와는 말소되어 가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재확립할 목적으로 현실 위에 신화 속 상황을 오버랩하는 방식으로 자아를 재구성한다.

 

책을 읽고 새 삶을 살게 됐다는 케이스는 흔하다. 적어도 인간에게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 아닌 안드로이드가 같은 방식으로 자아정체성을 재확립하고, 또 그러기 위해 고른 텍스트가 하필이면 인류 최고(最古)의 문학작품이라는 점은 이필원 작가만의 유쾌한 발상이 두드러지는 지점이지 않을 수 없다.

 

4.

 

미래형 후와와의 내러티브는 해원과 그녀를 습격했던 불청객 여자가 나누는 대화에서 드러난다. 다소 밋밋한 연출이기는 해도, 이후 그들이 종전의 생존자들과 전혀 다른 태도와 방법으로 파수꾼을 대하게 되는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해 준다.

 

그들은 파수꾼을 ‘이해’했다. 해원이 선술집에서 만난 여자들도 파수꾼에 대해 모르지 않았지만, 단순히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앎과 이해 모두 대상을 정확히 인지하는 데서 출발하기는 하지만, 전자가 인지의 수준에서 그칠 뿐인 데 반해, 후자는 인지한 정보를 바탕으로 대상의 입장이 되어 보거나 되어 보려는 노력 모두를 포함한다. 그래서 ‘이해하다’라는 동사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대상을 잘 아는 수준의 정태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해하다’는 대상에 대해 알게 된 바를 바탕으로 역지사지의 정신 아래 다양한 적용을 실천하거나 실천해 보려는 과정 전체를 내포하는 단어다.

 

선술집의 여자들을 비롯한 종전의 생존자들에게는 파수꾼의 처지고 나발이고 파수꾼을 처치하는 것 외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입장 차에만 주목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삼나무숲을 안전하게 다닐 수 있기를 바랐고, 가장 인간다운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코자 했다. 하지만 해원과 불청객 여자는 파수꾼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게 한 인류의 ‘후회하는 후손’으로서, 선대를 대신해 미안함을 전했다. 상대가 느꼈을 부정적 감정의 인과를 잘 헤아려 본 후에 책임이 있다면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누구나 알고 있을 사과의 정석이겠지만,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상대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별도의 단계가 필요한 만큼 이해란 단순히 아는 것보다 당연히 더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하는 행위이다. 더 어렵고 더 오래 걸린다. 인간은 효율을 좋아하는 동물이므로 비교적 쉽고 빠른 길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 서사의 재미를 위해 ‘쫄몹’이 쓰이는 방식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픽션 아닌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보다 끔찍한 일이 더 있을까?

 

5.

 

얼마 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많은 수의 민간인 피해자가 발생했다. 원치 않는 전쟁에 투입된 양국의 수많은 군 청년들 또한 당연히 희생자로 보아야 한다. 푸틴은 어쩌면 이 전쟁으로 더욱 막강한 권세를 얻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비자발적으로 희생되어야만 하는 사람들의 삶과 다 써지지 못한 이야기는 과연 누가 책임져 줄 수 있을까?

 

이 땅에 희생되어야 하는 자나 소외되어야 하는 자는 없다. 그들의 희생과 소외가 우리의 무분별한 선택이 낳은 결과가 아닌지 두고두고 곱씹어 봐야 한다. 돌아가는 길이 멀고 힘들다는 이유로, 또는 목적이 정당하다는 이유로 지금도 당신은 쉽고 빠른 길을 택하고 있지는 않은가?

 

“44구경 권총이나 수류탄, 스텔스기 따위”가 정의가 되기도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소설, 이필원 작가의 「삼나무숲의 파수꾼」이었다.

 

ps. 한시라도 빨리 전쟁이 끝나기를 바란다. 더 많은 21세기형 후와와를 낳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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