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그녀들의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무라사키 이야기 (작가: Victoria, 작품정보)
리뷰어: 니나Nina, 22년 2월, 조회 41

무라사키 이야기의 초반부를 읽었을 땐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이 떠올랐다. 주인공이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남편에게 맹목적으로 의지하도록 오랜 시간 길들여져 있다가, 서서히 자신의 처지를 객관화하게 된 후 자아를 찾는다는 플롯이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노라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적당한 남편감을 골라 가정을 꾸렸지만 무라사키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겐지에게 팔려와, 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이성상으로 자라도록 정신적 고문을 당해왔다. 일거수일투족, 그녀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겐지 가의 정교한 시스템은 숨 막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설이지만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점을 감안하면 그 시대엔 있을 법한 이야기로 여겨진다는 점이 슬프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이건 뭐 인형의 집보다 더 한 불행 포르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말부에 더 큰 통쾌감을 주고자 하는 작가의 큰 그림이라면 납득되니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무라사키 아가씨와 그 시종 후지노하나의 은밀하고 애틋한 우정은 언뜻 영화 아가씨의 히데코와 숙희가 연상될 정도로 아찔했다. 그것이 동성애 코드이든 아니든, 이즈미와의 관계까지 마저 이어지는 여성 연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혼자 힘으로 억압적인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기약할 순 없다. 서로가 서로의 조력자가 되어주는 것. 그것은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독자의 삶에서도 현재진행형이 되어야 하는 일일 것이다. 그녀들의 빼앗긴 들에 따뜻한 봄이 드리우길 바라본다. 단 하나 아쉬운 점은 극의 중반부에 있다. 겐지의 명령으로 인해 후지노하나가 주인공으로부터 자취를 감추게 되었을 때, 주인공은 겐지와 겐지의 시종을 드는 하인들에게 크게 반발하며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동안 변화의 전조 현상이 있었으나 너무 드라마틱한 행동 변화라 주인공의 감정선이 다소 따라가기 힘들었고, 이외에도 전개가 뚝뚝 끊어지는 부분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전반적인 줄거리와 주제의식이 뛰어났기 때문에 저자의 스토리텔링 능력을 높이 산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진다. 또 어떤 독보적인 여성 서사를 그리고 인상적인 장면을 남길까. 앞으로 공개될 작품들을 더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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