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종종 영원히 사는 삶을 상상한다. 오랜 시간 다양한 이들의 손과 입에서 영생을 바라는 마음은 이야기로 승화되었다..죽음과 삶은 인류가 살아오는 모든 순간의 논쟁거리였으며, 가장 철학적이고도 신화적인 이야기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탄생했다. 영생은 여전히 증명되지 못한 채 수많은 가설을 낳고 있다. 그 가설의 끝에서 밝혀지는 건 언제나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것뿐이다. 삶에서 죽음으로의 이동은 오랜 시간 인간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것은 인생의 끝에 존재하는 통과의례이며 누구나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죽음에서 삶으로의 이동, 즉 죽음의 초월은 신의 영역이다.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도 부활이 인간의 영역 밖이라는 점에는 공감한다. 질병을 거스르는 것은 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다는 지금도 불가(不可)의 영역이며 현재의 과학과 의술로는 정복하지 못할 한계로 설정되어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지금도 사회윤리적인 이야깃거리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정복 불가능’한 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껏 죽음을 극복했다는 사람들의 말은 거짓으로 판명나거나 증명되지 못했다. 남들보다 더딘 노화를 경험했거나 오랜 시간을 살았다는 역사서, 경전 속 대부분 인물의 삶은 지금에 사실로 밝힐 방법이 없다. 질병과 죽음의 비밀은 해결되지 않은 채 오늘도 수많은 이별을 낳는다. 그것은 인간이 영원히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모호한 현상과 눈속임이 아닌, 병과 노화를 막고 더 나아가 한 생명의 끝을 연장하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의 노력과 실험이 계속되고 있다. 만약 누군가 인간의 몸으로 죽음을 초월했다면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확실히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다.
그런데 누군가, 단 한 사람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며 당당하게 세상에 나왔다. 그런 그의 집에서 발견된 건 다름 아닌 223구의 시신이었다.
당신들이 정복하지 못한 것은
이동건 작가의 소설 <구원의 역설>은 제목에서 죽음을 극복을 ‘구원’이라 가정하며 시작한다. 죽음을 거스르는 것은 인간에게 두 가지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은 두려운 미지의 영역인 동시에 인류 전체의 해방과 구원을 뜻한다. <구원의 역설>은 죽음을 인간의 명백한 한계로 설정하는 동시에 한 남자가 이 모든 것을 극복했다는 다소 놀라운 설정으로 시작된다. 노련한 의사도, 신비한 종교의 신자나 교주도 아닌 젊은 청년 이영한이 세상에 등장한 건 한 여성의 납치 신고 때문이었다. 그 뒤를 따르던 기자와 경찰들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이영한의 집에서는 법적, 도덕적으로 금기시되는 수준의 인체 실험을 감행한 흔적이 속속 발견된다. 그가 왜 이런 일을 했는지, 어떤 이유로 모든 질병을 극복하게 되었는지보다 사람들에게 빨리 이슈가 된 건 그가 ‘죽음을 정복’했다는 사실 자체였다.
이영한을 둘러싼 인물은 대부분 익명으로 1이나 ㅇ 등의 기호로만 불린다. (하지만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이 도중에 속속 등장하기 때문에 작가 나름대로 일관된 익명성의 기준을 만들었으면 한다.) 그들은 모두 범죄 또는 질병에 깊이 얽힌 기억을 갖고 있다. 이영한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1’은 딸이 치료할 수 없는 수준의 병을 앓고 있으며 검사 ‘ㅇ’은 정의감과 사명보다는 범죄에 치를 떨게 만든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검사가 되었다. 이들이 이영한을 바라보는 시선은 상반된다. ‘1’은 이영한을 딸의 구원자처럼 바라본다. 그는 소설 속에서 이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ㅇ’은 그 대척점에 있다. 그는 이영한이 죽어야 하는 파렴치한이라는 데에 한치의 흔들림도 없다. 이영한은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셈이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단순히 이영한을 기준으로 그가 ‘사형’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의 양쪽에 서 있다. 그러나 사람의 의견 또는 생각이 예외 없이 양쪽으로 갈라서기만 할까. 찬성 또는 반대의 의견을 내는 극단의 사람들 안에는 수많은 스펙트럼의 목소리가 있다. 그들도 이 소설에 등장한다면 어떨까. 그들의 행동은 분명히 <구원의 역설>을 풍성히 만들 수 있다. 이영한의 죽음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인물은 없었을까. 또는 그의 죽음이 ‘껄끄러운’ 수준으로만 다가오는 이들은 없었을까. 누군가의 죽음과 기괴한 인체실험을 유쾌한 안줏거리나 가십거리 정도로 떠들어대는 사람들, 이영환을 향한 언론의 가벼운 보도나 지나친 신격화는 없었을까. 아무리 잔혹한 범죄가 발생해 사회의 공분을 사더라도 그걸 받아들이는 이들의 반응과 감정의 온도는 서로 다르기 마련이다. 이 소설에서는 충분히 더 많은 범죄 사례와 그에 따른 대중의 반응을 조사하고 면밀히 관찰할 때 확장될 수 있는 이야기의 넓이가 보인다.
<구원의 역설>은 여러 인물의 서사를 교차한다.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시위나 자극적인 언동이 높은 빈도로 드러난다. 이영한이라는 인물 한 명이 분위기를 차분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좀 더 소설의 톤을 정돈하는 동시에 이야기의 깊이를 만드는 방법은 개별 인물의 ‘심리’에 집중하는 것이다. 언뜻 변호사와 검사의 내면을 진술하는 듯한 장면이 보이지만, 면밀히 따져보면 그건 해당 인물의 전사(과거 사건이나 뒷이야기)를 풀어놓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들은 이영한을 판단하는 데에 자신의 과거와 주변 상황을 끌어올 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1’과 ‘ㅇ’이라는 인물 설정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영한의 행동에 표면적인 찬반 의사를 결정하는 것 외의 내밀한 심리 묘사가 있다면 소설은 ‘심리 스릴러’ 또는 추리 장르로서의 깊이를 가질 수 있다.
이영한은 그들의 중심에 서 있다. 당연히 법적 도덕적 기준으로 회생할 수 없을 수준의 매장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삽시간에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무리를 형성한다. 그들은 이영한의 석방을 원한다.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작가가 소설에서 보여준 인물의 극단적인 이분화는 자칫 플롯을 단순화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진다. 하지만 이 소설이 복잡다단한 양태를 보이는 이유는 이영한의 인물 설정이 일반적인 범죄자와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이영한은 스스로 교주가 되거나 자신을 신격화하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둘러싼 주변이 극단적으로 뜨거워진다. 그는 자신의 능력치를 정확히 알고 있으며 냉정하고 기만적인 태도로 그것을 세상에 내보이기를 원한다. 그런 이영한의 대사는 상당히 일관적으로 주변인의 욕망을 자극한다. 작가는 범죄자의 입을 통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생각거리를 던진다. 열띤 의견을 불태우는 모든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자극받지 않는 사람은 이영한뿐이다. 그는 ‘당신들과 나는 다르다’는 전제 하에 자신의 목숨까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인다.
‘당신들’이 정복하지 못한 것을 비로소 ‘내’가 정복했다는 듯이.
내가 정복한 것은
이영한이 정복하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전술했듯 <구원의 역설>은 이영한을 둘러싼 이해관계에 집중하는 소설이다. 그렇다면 중심 인물인 이영한의 역할과 무게, 전사가 중요하다. 그러나 이 소설에 드러난 이영한의 이야기는 매우 적은 분량이다. 이영한의 잔혹한 행동, 수많은 인체실험을 이끌어간 동기는 의외로 예상 가능하고 평범하다. ‘1’과 ‘ㅇ’ 등의 인물이 단순한 의견을 내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그들의 뒷이야기가 소설에 적절한 분량으로 풀렸기 때문이다. ‘1’의 딸과 ‘ㅇ’의 어머니 역시 전형적인 인물상이지만 주요 서사에 깊이 개입해 ‘1’과 ‘ㅇ’의 행동에 지속적인 동기를 부여한다. 결정적으로 ‘1’과 ‘ㅇ’은 전형적으로 행동해도 괜찮은 인물이다. 그러나 이영한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한 사건이나 인물은 좀 더 특별해야 한다. 수많은 암환자의 가족 중 왜 이영한에게는 비범한 능력이 발현됐을까. 그의 수술 장면이나 이후의 환자들이 회복하는 형세는 분명 보통의 기술로는 불가능한 수준이다. 그런 힘이 이영한에게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영한의 이야기가 충분히 설명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사회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를 신격화하는 수많은 사람의 소리가 큰 분량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가 한낱 평범하고 별 것 아닌 사람이라는 게 드러나거나 설명되지 않는다면 이 소설은 가해자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하지 못한 채 그를 우상시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나’로 대표되는 이영한의 부재를 채우는 것은 서사의 중심을 단단히 만드는 동시에 독자에게 느껴질 소설의 도덕적인 결함을 충족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내’가 정복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왜 이해할 수 없는 실험을 계속해야만 했을까. ‘당신’들이 정복하지 못한 것의 설명은 충분하다. 이제는 ‘내’가 정복한 것이 설명되어야 할 차례다.
‘구원의 역설’은 영화의 시나리오처럼 뚜렷한 장면의 진행과 개별 인물의 과감한 행태, 그리고 다양한 사회 이슈를 포괄할 수 있는 주제로 서두에서 독자를 사로잡는 힘이 인상적인 소설이다. 다소의 철학적인 논조로 던져지는 도발적인 대사도 이 소설을 읽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인물 설정을 넓게 세분화하고 플롯의 곁가지를 다양하게 뻗는 동시에 이영한의 서사를 충분히 보충한다면 훨씬 풍성하고 무게 있는 좋은 소설이 탄생할 조짐이 보인다. 장면을 뻗어가는 역량은 이미 작가에게 주어졌으니 이야기가 지나가는 길을 촘촘히 채우기만 하면 된다. 소설을 둘러싸는 메시지가 이미 형성되었으니 살아있는 인물들이 설득력 있는 사건 안에서 그들의 서사를 자유롭게 풀어내기를 바란다.
죽음에 나름의 일관된 생각을 가지고 이리저리 장면을 꿰어맞추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 가는 시간이 즐거웠다. 영상으로 만들었을 때 매력적인 하나의 대본처럼 보였기 때문에 선명한 이미지의 장점을 잃지 않는 소설이 이동건 작가의 손에서 유감없이 쓰이기를 바란다. 무거운 주제의 중량은 덜어내고 그 안에 나름의 서사를 채우는 과감함이 예사롭지는 않다. 다양한 조사와 관찰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가 뻗어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