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정다운 시인의 양악 중에서 한 문장을 따와 패러디했습니다. ○○에 들어갈 단어는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가렸습니다. 아래에 다시 서술하겠습니다. 시의 전문도 아름답고 이 글과 잘 어울릴 것 같으니 한 번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나’의 눈에는 죽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처참한 시체들이 돌아다니는 세상은 오로지 ‘나’의 것입니다. ‘나’와 가장 절친하고 오래 알고 지낸 친구 은유도 ‘나’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은유는 죽은 사람들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시체들이 보이는 세상이 싫어 일곱 살 때 가위로 눈을 찌르려 시도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에서 ‘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신승하.
저는 괴담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주 읽거나 혹은 유튜브에서 영상을 찾아보곤 합니다. 죽은 사람들이 우리의 주위를 항상 떠돌아다니고 있고,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은 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죽은 자들은 자기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 기뻐 찾아온다고도 하죠. 하지만 승하가 보는 죽은 자들은 조금 다릅니다. 그들은 반투명하고, 승하의 시선을 느껴 집까지 따라오기도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곁에 머무릅니다. 그들이 반투명하기 때문에 승하는 시야가 좁아지고, 그런 승하의 사정을 누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승하는 대신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눈을 가립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승하가 머리카락 때문에 앞을 잘 보지 못한다고 착각하겠죠. 실은 전혀 다른 이유지만.
승하는 죽은 자들과 함께 자랍니다. 열여섯 살이 되어서야 죽은 사람들을 보는 일에 익숙해지고,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 편안하다고 느낍니다. ‘죽어야만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는 것 같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 완벽한 이해는 존재할 수 없지만, 오히려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그저 곁에 머무르는 죽은 자들은 승하에게 편안함을 제공합니다. 대화할 수 없기 때문에 애써 자신을 설명할 필요도 없고, 이해시킬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승하는 누군가 죽은 다음 자신을 찾아오길 바랍니다. 아무도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겠지만 승하는 다릅니다. 죽은 사람을 볼 수 있고, 함께 머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승하는 자신만이 죽은 자들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살아 있는 사람 누구도 죽은 자를 볼 수 없지만 승하는 아니니까요. 모두가 알지 못하는 것을 홀로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승하를 현실 세계에서 계속 유리시킵니다.
승하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며 자라 온 은유도 승하의 벽을 느낍니다. ‘네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 은유의 세계는 살아 있는 자의 세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 있는 자들과 상호 소통하고 생활하는 은유는, 죽은 자를 볼 수 없기에 승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 승하가 ‘내게는 죽은 자들이 보여’라고 말해줘도, 은유는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은유의 눈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승하는 은유에게 굳이 자신의 세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은유의 눈만은 마주할 수 있어도, 은유 역시 살아 있기에 승하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속된 세계의 단면이 조금 겹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나를 자신과 같은 선상에 두었다. 그게 싫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 하는 사람들. 승하는 점점 더 산 사람들과 멀어집니다.
그리고 열아홉 살. 이사 온 동네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가출했던 여학생이 뒷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승하는 범죄 소식에 관심을 보입니다. 정확히는, 살해당한 자와 마주치는 공상을 합니다. 여학생이 죽었다면 그 여학생을 유일하게 볼 수 있고, 인지할 수 있는 승하에게 당연히 찾아오리라는 생각으로. 소통할 수 없는 세계에 혼자 갇혀 있는 것은 외롭습니다. 죽은 자들이 상호작용하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면, 죽은 자들은 다른 죽은 자들에게 관심이 없거나 혹은 인지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승하는 죽은 자들을 모두 볼 수 있고, 그들에게 말을 걸 수도 있습니다. 비록 대답은 들려오지 않지만. 대신 그들은 승하를 따라 움직이거나 혹은 승하 주위를 맴돌면서 나름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때문에 승하는 죽은 자들을 면밀하게 관찰합니다.
승하는 자신에게 시선 공포증이 있다고 정의 내립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과 좀처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고 여깁니다. 승하는 죽은 자들을 관찰하면서 시선에 어떠한 힘이 있는지 알고 있기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관찰하면서 같은 일을 해낼 것을 알고 있기에 시선을 두려워합니다. 관찰은 많은 정보를 가져다줍니다. 셜록 홈즈는 의뢰인을 만났을 때 단 몇 초 만에 의뢰인의 거주지역, 직업, 버릇, 같이 사는 사람의 습관이나 애완동물의 종류, 방금 전에 먹은 음식까지 알아맞히죠. 승하는 죽은 자들을 관찰하면서 그들의 사망 원인, 사망 장소, 죽기 전에 한 행동 등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자들도 승하를 관찰하면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텅 비어 있는 곳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선이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혼자 가로막힌 것처럼 우물쭈물하거나. 그런 승하에게 사람들은 묻겠죠. ‘왜 그러니?’ 하고. 승하는 그런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설명해봤자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승하를 이상한 아이 혹은 귀신 들린 아이 취급하겠죠. 그래서 승하는 시선, 관찰, 그 뒤에 이어질 질문 그리고 질문의 결과로 나타날 타자성을 두려워합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러지 않거든요. 그저 승하의 세계에서 고요히 존재할 뿐이죠.
그리고 승하는 자신의 절친한 소꿉친구 은유를 죽이는 꿈을 꾸게 됩니다. 죽은 여학생을 마주했고, 그 여학생이 왜 죽었는지를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피해자가 발견되면서 승하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죽은 여학생들은 모두 은유를 닮았거든요. 연쇄 살인마는 나름의 규칙과 이유를 가지고 움직이는데, 이 연쇄 살인마의 타깃은 은유와 닮은 여자아이들입니다.
승하는 연쇄 살인마에게 은유가 노려질 것임을 직감합니다. 그리고 은유가 죽는다면, 얼굴도 모르는 연쇄 살인마가 아닌 자신의 손에 죽기를 바랍니다. 절친한 친구를 죽이고자 하는 욕망은, 일인칭으로 서술되기에 명확하게 그 이유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승하의 욕망이 어디에서 발현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승하는 은유가 죽지 않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은유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와 주기를 바랍니다. 이 두 욕망은 서로 상충합니다. 승하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는 죽은 자들이 돌아다니는 세계이기에, 이곳으로 들어오려면 은유는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승하는 동시에 은유가 죽지 않고 무사하길 바랍니다. 상충된 욕망은 서로 비틀리고, 얽힙니다. 은유의 죽음이 불가피하다면, 그렇다면. 은유를 자신의 세계로 이끄는 일은 자신이 해야 하지 않을까. 꿈속에서, 승하의 손에 죽은 은유는 평온하고 고요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승하에게 기대어 있습니다. 승하는 ‘그것은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다.’라고 생각합니다. 승하가 왜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왜 세상 모든 일이 자신과 무관하다는 태도로 일관하는지, 왜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 이해하게 된 은유는 승하에게 무의미한 질문을 던지지도 않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승하는 은유가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은유는 영혼만 남아 떠도는 모습으로 학교에 등장합니다. 그 모습은 승하만 볼 수 있습니다. 승하는 지난밤의 기억이 모호하고, 군데 군데 끊겨 흐름을 전부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은유를 죽였다는 것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승하는 자신이 다른 두 여학생도 죽인 것은 아닌지 혼란을 느낍니다. 그 기억은 없지만, 만약 살인을 저지를 때 승하의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무죄를 입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죽은 은유는 승하의 방까지 따라옵니다. 승하는 자신이 은유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신의 곁에 머무르는 은유의 모습에 평온함을 느낍니다. 승하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죽어도 큰 충격을 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어차피 죽은 사람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경험하게 되니, 소중한 사람이 죽어 자신의 곁에 머무르는 것을 보게 되니 약간의 동요를 느낍니다. ‘균형이 무너진다.’ 승하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은유의 죽음으로, 승하는 죽음과 상실, 단절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은유는 이곳에 있지만, 승하와 그 어떤 상호작용도 할 수 없고 심지어는 자신이 죽었는지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은유는 승하의 세계에 들어왔지만, 온전히 편입된 것은 아닙니다. 은유는 자신의 세계에 갇혔고, 승하는 그 세계에 침입할 수 없습니다. 함께 있는데도 유리된 기분. 아마 은유가 승하에게서 느꼈던 기분이겠죠.
승하는 자신이 은유를 죽였다고 확신하며 은유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체포되어 감옥에 잡혀갈 자신을 상상합니다. 어차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에 그 어떤 관심도 없는 승하는, 자신 역시 살아있기에 자신의 삶에도 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대신 자신의 곁에서 맴돌고 있는 은유에게 감옥까지 따라올 것이냐고 묻죠. 한편으로는 자신이 체포되는 순간 한을 푼 은유가 떠날 가능성도 고려해 둡니다.
승하는 은유에게 어디에서 죽었는지 질문하고, 그 질문에 반응한 것인지 혹은 그저 생전의 기억이 선명한 곳을 맴돌고 싶었던 것인지 은유는 천천히 승하를 안내합니다. 인적이 드문, 차도의 가드레일 너머 풀숲. 그곳까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던 승하는 자신이 은유를 죽인 게 아님을 확신하고, 앞머리를 넘겨 시야를 밝게 합니다. 그리고 은유의 눈을 마주 봅니다. 이전까지 승하는 자신의 세계에서 아늑하게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들 사이에서 고요하게 침묵하는 자신. 그 세계에서는 승하가 은유를 죽여도 이상한 점이 없습니다. 하지만 은유가 승하의 손에 죽지 않았음이 확실해진 순간, 승하는 머무르던 세계 밖으로 나와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죽은 자가 은유를 죽였을 리 없기 때문에, 살아 있는 자 중에 은유를 죽인 살인마가 있기 때문에. 또 은유가 자신을 비난하거나 원망하기 위해 곁에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은유는 승하에게 자신을 죽인 범인을 찾아 달라고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승하는 그날 은유를 위해 소설책을 한 장 한 장 넘겨 줍니다.
죽은 은유는 읽고 싶었던 소설을 읽을 수도 없고, 자신을 죽인 범인의 이름을 말할 수도 없습니다.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왔기에 죽음에 대해 친숙하게 느꼈고 또 그것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던 승하는, 죽음이 주는 단절과 상실에 대해 느끼게 됩니다. 사랑하는 친구는 죽었고, 더 이상 승하에게 말을 걸어오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손바닥을 마주 댈 수 없습니다. 그저 고요한 표정으로 곁에 서 있을 뿐. 그나마도 승하에게만 보이는 모습이죠. 승하는 은유가 죽었음을 실감합니다.
다음날 승하는 은유가 실종된 날 밤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남자아이와 만나게 됩니다. 커다란 기타 케이스를 들고 다니는 그는, 신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 승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알려 준 사실은 승하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사실 그런 건 없어. 네가 보는 건 죽은 사람들에 대한 산 사람의 기억이야.”
살아 있는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죽은 사람의 모습을 훔쳐볼 수 있었던 승하와 반대로, 신원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신원은 승하가 무엇을 보고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은, 승하가 지금까지 살아 온 세계를 통째로 부정하고 무너뜨립니다. 승하가 보고 있는 것은 죽은 자들 그 자체가 아닌 과거의 기억이었고, 그들이 승하에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승하가 그들을 보며 머릿속에 넣어 둔 기억에 반응하는 것이었으며, 결국 죽은 자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사라진다는 것. 허상. 살아 있는 자들의 기억을 볼 수 있는 신원은 승하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승하의 기억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신원은 승하에게 그 사실을 곧장 알려 주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승하가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죠. 은유를 죽이고, 승하의 기억을 수정하고, 승하의 반응을 살핀 다음 자신을 찾아올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신원을 찾아낸 승하는 신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고, 승하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붕괴합니다.
신원과 헤어지고 돌아온 승하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은유를 다시 바라봅니다. 그저 모두가 가지고 있는 기억을 형상화한 것에 불과한 은유. 목에서 피를 흘리며, 창백한 얼굴로 생전에 했던 행동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승하는 마침내 자신이 은유를 완전히 잃어버렸음을 깨닫습니다. 죽음은 상실이고, 그래서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함께 하던 유일한 친구가 더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고, 완전히 떠나 버렸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가혹합니다. ‘은유는 완전히 죽었다.’ 승하의 세계가 붕괴함에 따라 은유는 사라집니다. 상실감 속에서 승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합니다.
신원은 자신이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습니다. 신원 역시 자신의 세계에 갇혀 누구도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공고히 다져왔겠죠. 은유를 어떻게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신원의 모습은 공감 능력이 약간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신원에게 승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를 합니다. 신원이 승하의 기억을 뒤섞었던 것처럼, 승하도 신원의 기억을 뒤섞어 버립니다. 승하가 지금까지 봐 왔던 죽은 자들의 세계를 신원에게 선물합니다.
신원은 승하를 회유해 보려 하지만, 승하는 신원과 같아지기를 거부합니다. 신원이 승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원이 다른 사람을 죽였다면 승하는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승하에게 살아 있는 사람들은 큰 이슈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신원이 승하의 세계를 전복시켰어도, 승하는 천천히 적응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신원은 승하의 유일한 친구를 죽였고, 그 사실에 대해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며, 오히려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승하는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친구를 죽인 것에 대한 복수를 합니다. 신원은 자신만이 승하를 이해할 수 있으며 우리는 서로 같다고 설득하려 하지만, 승하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은유 때문입니다.
은유는 이제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리고 그것이 승하를 뼈저리게 아프게 만들지만, 은유에 대한 기억은 승하의 곁에 존재합니다. 승하가 은유를 온전히 기억하고 추억하는 만큼 그 모습은 계속 승하의 곁에 머무르겠죠. 목에서 피를 흘리는 창백한 무표정도, 승하가 기억하고 있는 다정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변할 겁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승하는 다시 기억을 되살릴 수 있겠죠.
죽은 자들을 볼 수 있다는, 어쩌면 흔한 소재일지도 모르는 시작에서 반전되는 흐름이 즐거웠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글 전체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승하의 독백이었습니다. 고요하고 또 적막한, 쓸쓸하고 또 외로운. 그렇지만 평온한 승하의 세계.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마저도 크게 슬프지 않았던 승하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상실과 죽음을 다시 알게 됩니다. 그렇게 세상에 대해 이해한 승하는 천천히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로 편입될 수 있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약간은 성장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은, 어쩌면 제 이해가 부족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이 모두 시체로 나타난다는 설정이었습니다. 신원처럼 살인자가 아닌 이상 시체를 직접 보고 그것으로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겠죠. 부검의나 경찰이 아닌 이상은요. 승하는 장기가 쏟아지거나 피부가 일어난 끔찍한 시체들에 대한 기억으로 만들어진 세계를 보고 있었는데, 보통은 그런 시체를 보기 힘들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그것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겠습니다만……. 보통은 죽은 사람을 떠올릴 때 그 사람과의 일상이나 추억, 좋았던 순간 등을 떠올린다고 생각되어서 좀비와 같은 시체들이 돌아다니는 세상에는 약간 의아함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세상에는 살인자들이 생각보다 많은 걸까요?
그 이외에는 오랜만에 읽은 취향의 글이었습니다. 승하가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아름다웠고, 신원에게 복수하는 장면은 통쾌했습니다. 또 승하가 자신의 세계가 뒤집어졌다는 걸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였기에 할 수 있는 복수 방법이었기 때문에 더욱 속이 시원했던 것 같습니다. 신원은 승하의 세계를 부쉈지만, 승하는 부서진 세계를 재구축해서 다시 안정을 되찾아 나갈 테니까요.
리뷰의 제목은 ‘내 모든 기억을 너에게 줄게’입니다. 원문은 ‘내 모든 쓸모를 너에게 줄게’인데, 리뷰를 쓰려고 마음 먹은 순간 이 문장이 떠올라서 제목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승하의, 시체에 대한 기억을 신원에게 덧씌우는 복수 방법이 유독 상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신원이 사람을 죽여 놓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범죄자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승하의 말마따나 ‘사람을 셋이나 죽이는 동안 네가 묻은 시체를 다시 보러 간 적은 한 번도 없었’죠. 신원은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사람을 셋이나 죽였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살아 있는 사람의 기억을 들여다보기 때문일까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오만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신원은 앞으로 모든 살아 있는 사람들을 시체로 보면서 자신이 저지른 살해가 어떤 것이었는지, 정확하게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알게 되겠죠. 시체들을 본 기억이 계속 쌓이면서, 벗어날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세계에 갇히게 될 겁니다. 그러면 누군가를 섣불리 죽일 생각은 하지 못하겠죠.
비록 은유는 죽었지만, 승하는 이제 자신의 곁에 머무르는 것이 은유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형상임을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서서히 은유를 잊어 가는 대신 은유를 볼 수 있는 승하는 계속 은유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은유의 형상이 온전히 승하의 것이 되겠지요. 그게 소중한 친구를 잃은 승하에게 위로와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은유가 승하에게 선물한 핀으로 앞머리를 걷어낸 승하는, 이제 조금 더 또렷하게 앞을 보고 살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겠죠.
승하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상상해 봅니다. 죽은 자에 대한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이니까, 은유가 파묻힌 곳을 찾아냈던 것처럼 살인자들의 기억을 읽어 실종된 사람들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겁니다. 어쩌면 죽은 이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기억을 읽어 그 사람들에게 죽은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죠. 그런 식으로 승하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은 자의 세계는 고요하지만, 외로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