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신체의 무고함에 대하여 공모(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지속 가능한 죽음으로부터 (작가: 위래, 작품정보)
리뷰어: NahrDijla, 22년 1월, 조회 129

<지속 가능한 죽음으로부터>는 좀비와 공존하게 된 사회의 이야기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이후 세상은 변화했다. 좀비의 노동력 자체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시작은 좀비 인력거였다. 인력거를 좀비에 매달고 고기를 내건 낚싯대를 드리움으로써 좀비의 이동 방향을 조정하는 것이다. 그 이후 좀비가 가지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발전부터 사회 여러 부분에서 좀비가 이용되기 시작한다.

상조 회사 ‘지속 가능한 죽음’은 이런 맥락에서 시작한 스타트업 회사이다. 회원을 모집하여 회원의 신체는 좀비로 만들어 일을 하게하고 뇌만 적출하여 메타버스에 탑승 시키는 것이다. 그 상조 회사 지속 가능한 죽음에 근무하는 여정은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풀려난 좀비에 의해 쫓기게 된다. 그리고 도망 중 만난 보라는 이 습격의 배후가 자신임을 밝힌다. 이유는 회사가, 호레이쇼의 대형 자본에 먹혀 세상을 더욱 망가뜨리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여정은 좀비에 의해 물려 죽거나, 직장을 잃고 회사에서 대여해준 좀비 두 구를 돌려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한다. 바로 지문 인식으로만 뇌 보관함을 열 수 있게 한 것이다. 덕분에 사건은 철학적인 관점으로 이동하여 여정에게 책임이 가지 않고 마무리된다. 그렇게 보라는 상조 회사에 강제로 가입하게 되고, 여정은 회사의 지부장에 까지 고속 승진한다.

 

소설에서 신체와 정신은 분리된 채 좀비로써 유용된다.

일반적으로 좀비는 정신의 결손이다. 자극에만 반응하는 단순한 구조를 취한다. 감각들은 퇴화하고 원초적인 느낌에만 의존하는 것이다. 그런 좀비들은 대개 피아 구분 없이 모든 인간을 먹어 치우는 존재로써 그려진다. 그 속에서 살아남는 이야기가 좀비 아포칼립스의 주요한 스토리이다. 이 스토리에서 좀비는 실질적인 위협이자 ‘죽여도 되는’ 인간의 대체재로 등장한다. 좀비 클리셰 속에서 러프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소설처럼 좀비 클리셰를 비튼 작품에서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모든 좀비는 죽여도 된다. 좀비는 인간다운 삶에 대한 공격이다.

하지만 좀비 클리셰를 비튼 이 소설에서 좀비는 소유물로 전락한다. 그리고 사회를 유지하는 산업 역군이다. 그렇게 신체만이 유용되는 상황의 기저엔 좀비 바이러스가 정복된 듯 보인다는 사실이 놓여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할까. 좀비의 수가 점점 늘어나 좀비의 노동가치가 떨어지며, 지속 가능한 죽음에서 제공한 메타 버스 속의 회원들이 알바를 구해야한다는 이야기는, 어쩐지 좀비가 사회를 침윤하는 것이 아닌 역설적으로 정복해나가는 것을 떠오르게 한다.

 

그 것은 분리된 신체와 정신의 위계가 전복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체는 정신에 종속된다. 우리가 정신이라는 것을 어찌 정의 내려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의식적인 관점에서는 우리의 정신이 행하려는 의도에 따라 신체가 움직인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죽음’에서 제공하는 메타버스 서비스는 이를 전복한다. 이에 신체가 제공하는 전력에 의해서 메타버스가 가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육체의 노동력에 정신이 기생 한다고도 볼 수 있는 이 상황은 일반적인 정신과 육체의 구도와는 다르다. 그리하여 육체에게 책임을 묻기엔, 육체에는 능동적인 의지가 없다. 주체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주체가 되어버린 신체들은, 그 자체로 사회를 전복한다.

그렇다면 신체와 정신의 관계는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문제는 신체와 정신 역시 자의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라고 생각하는 주체는 그 스스로가 신체를 택할 수 없다. 우리가 태어난 사실 자체 또한 증명되지 못한 자의성 일 뿐, 둘의 상관관계를 증명할 수 없다.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책임 역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관점에서 육체는 그 죄에서 무고하다.

 

하지만 정신 역시 무고할까.

소설에서 구현된 메타버스는 밀레니엄 이상의 것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한 지속 가능한 죽음 ‘레드캔’은 ‘연고도 없고 불우한 청년들을’ 마치 좀비처럼 끊임없이 집어 삼킨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청년들이 차지해야 할 산업 역군의 자리는 좀비가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좀비의 수는 지속적으로 늘어 노동력의 가치가 절하된다. 이 구조적인 모순은 사회를 침윤하는 공격의 직접적인 가시화이다.

좀비가 된 후 다시금 좀비에서 인간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요원하다. 정확히는 메타버스에서 세상으로 돌아올 방법은 요원하다. 신체는 이미 좀비가 되었고 뇌는 적출 되었기 때문에 이를 되돌리기는 불가능 해 보인다. 이 소설이 좀비 펑크에서 호러적인 이미지를 가져오는 부분은 이 부분이다. 과포화된 메타 버스의 세계는 보라의 비명 소리로 대체되는 무언가가 되었다. 정신은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파국을 맞는다. 그렇다면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정신의 선택은 과연 무고할까? 그리고 이를 가속화하고 강제하는 자본 고위층에게는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소수에 의해 대부분이 점유되는 자본주의 폐해는 그렇게 현실로 끌어 올려진다. 

좀비 펑크가 제시하는 현실은 비현실적이다. 동시에 우리의 삶의 면면을 반영하고 있어 섬뜩하기도 하다. 자본에 의해 인간성이 빼앗긴 삶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소설은 그런 삶들이 극단에 닿을 때를 선연하게 다루고 있다.

케인즈파 경제학자인 존 퀴긴은 그의 저서 『좀비 경제학 : 죽지 못해 남아 있는 다섯 가지 경제 사상』에서 신자유주의를 좀비에 비유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다뤄지는 경제 체제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는 않아 보인다. 좀비같은 사회상에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무고하게 좀비가 되며, 정신적으로 좀비적인 파국에 이른다.

스스로의 좀비에 의해 스스로의 뇌가 파먹힌 사실이 자살이라면 역설적으로 좀비 역시 사람으로 봐야할까. 이 좀비화의 과정 사이에서 인간다움을 고찰하는 것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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