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해력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고백해야겠네요.
그런 연유로 이론서 및 여러 책들은 탐독하고 있지만 조금만 어려워도 – 특히 폴 프라이의 문학 이론이라는 책을 읽고 좌절했습니다. – 80%는 이해하지 못하고 읽기만 하는 괴멸적인 독서를 진행하는 중입니다(…). 이 서글픈 사실을 고백하는 까닭은, 마지막 줄을 이해를 못했거든요. 2명의 카운트에서 진행된 자살은 철저하게 팀원에게 트롤링만을 시전하고 싶은 욕망의 화두인건지, 아니면 최후의 1인으로써의 세레모니인 건지 감이 잘 안옵니다. 그렇지만 제가 20%라도 이해하고 있는 게 정확하다면 이 소설은 철저한 트롤링의 이야기 입니다.
게임은 일종의 규칙으로 정해진 놀이입니다.
룰이라는 것은 우리의 자유를 일부 억제하는 행위와 마찬가지죠. 상호 간의 제약을 통해서 특정한 목적을 먼저 달성하는 것, 그 것의 대략적인 게임이라는 행위를 묘사하는 것이 되겠네요. 이 소설에서 다뤄지는 장르는 배틀 그라운드나 포트나이트 같은 서바이벌 FPS장르입니다. 아이템을 수집하고 상대를 공격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후의 승자가 되면 되는 그런 게임이지요.
그런 점에서 게임의 실황을 옮긴 일종의 ‘리플레이’지만, 굉장히 스타일리쉬하고 시원시원한 문체와는 다르게 플롯은 무척이나 단순합니다. 태생적인 한계라고 해야할까요. 이 지점에서 소설은 게임 내부가 아닌 게임 외적인 요소에 기대는 데 그 중 하나가 SF적인 요소인 아바타의 존재입니다.
이 소설에서 다뤄지는 아바타는 해당 플레이어를 빼다 박은 가상 플레이 AI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당 플레이어의 아바타는 고유한 소유물로 지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게임은 룰로 이뤄지는 경험을 얻기 위한 행위이지요. 설사 타인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AI이더라도, AI로 대체된 경험은 과연 가치가 있을까요. 이 소설은 그렇게 질문을 던지지만 답은 주지 않습니다. 단지, 트롤링으로 그 대답을 대체해버리지요.
소설 내에서 AI와 인간의 게임은 되지 않는 사회라고 합니다. 이 지점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어지는 것은 인간의 향유 경험일 것이구요. 하지만 그 관계성조차 무너뜨리는 AI의 존재는 무엇인가 탐탁치 않고, 그 것만으로도 화자가 트롤링할 이유는 충분해집니다.
놀이라는 특성상 게임은 무상성을 지닐 수 밖에 없습니다.
화자는 이 무상성을 명료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게임이라는 행위는 단지 유희일 뿐이며 아무런 가치조차 생산하지 않는 잉여활동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이 소설에서 이미 화자 자체가 인간간의 게임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연습 게임으로 지금 리플레이를 플레이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희적인 부가가치의 생산들이 과연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게임의 무상성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타인이 있기에 게임의 행위는 계속된다고 화자는 이야기 합니다. 트롤러의 입장에서는 트롤할 대상이 있기 때문에 트롤링을 하는 것이다, 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떤 점에서는 관계성을 환기하는 이야기로도 해석 됩니다.
어쨌든 이런 사회에서는 트롤만이 정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제 카이와는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의 두가지 장점을 들었는데 자유로움을 통한 재충전 그리고 위험성을 통한 도전 정신을 제시했습니다. 합목적성으로 승리하기 위함이 아닌 즐기기 위한 플레이와 패배라는 위험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신념은 분명 아름다울 것입니다. AI로 침윤되는 사회 속에서도 관계를 지키기 위한 트롤링이라니 어쩐지 눈물겨우면서도 응원하고 싶어지는, 그런 이상한 트롤링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