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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스포일러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조금 더 나은 삶을 원하며 살아갑니다.
이 소설 역시 그런 인물들에 대해 다룹니다. 그럴 때 보통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려고는 생각하지는 않죠.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 것을 위하여 타인을 기꺼의 희생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그 이기심의 끔찍함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할 것은 없을 듯 합니다. 여기서는 인물들의 이름보다는 대명사로써 호명하여 구분을 용이하게 하려 합니다.
한 명은 무당입니다. 그는 자신의 영력을 위하여 딸을 새타니로 만드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딸은 그녀의 기지로 새타니가 되기 직전에 구출되었고, 그는 저주를 위해 쓰레기로 고독을 만들다 쓰레기에 압사당합니다. 그는 영력을 잃어버린 자신을 비관하다 극단에 이른, 그리고 딸의 목숨을 가볍게 여긴 인물입니다.
한 명은 자만심에 가득한 남성입니다. 그는 주식과 도박으로 빚쟁이가 된 이후,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낭설인 ‘약지가 검지보다 기다란 사람만이 불운한 천재의 징후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말에 꽂힌 후 그 손가락을 컬렉팅하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실제로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운이 해소되지 않자 실제 살아있는 사람의 손가락에 서약의 반지를 끼우면 괜찮아질까 싶어 이 글의 또다른 주인공인 여자와 사귀게 됩니다. 그는 누군가를 죽였던 전적으로 모은 손가락을 매개로 삼아 취생의 쓰레기와 악취가 끝없이 그를 맴돈 후에 먹잇감이 됩니다.
한 명은 남자의 일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여성입니다. 그의 죽음 직후 그녀는 처분하려고 내놓은 애견 카페에 분양되지 않고 남아있는 개들을 확인하며 그들의 죽음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개로부터 더럽혀진 옷을 버림으로써 취생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죠. 그녀는 무당에게 찾아가 살려달라고 하자, 무당은 아무것도 죽이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의심이 들어 다른 무당을 찾아가자, 그 무당이 사실은 새타니가 될 뻔한 인물이며 취생을 부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종용합니다. 그녀는 끝내 자신의 개들을 죽여 새타니로 만들어 맞서려고 하지만, 그 사유로 죽게 됩니다.
이 소설은 중반까지 ‘그 것’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저 악취와 곰팡이로만 지독하게 분위기를 환기시킬 따름입니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강력한 서스펜스를 제시합니다. 우리는 그 것을 모르기 때문에,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긴장하게 됩니다. 잘못된 사실은 알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알 수 없는 위협은 악취와 곰팡이로만 유령처럼 가시화된 채 부유하는 무언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서스펜스는 각 인물들의 이면이라는 반전이 제기될 때 가장 화려하게 해소됩니다.
이 알 수 없음은 또 다른 기능을 하는 데, 각 인물에 대한 소격화의 보조적인 유화책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순수한 악인들에 대해 이입하면서 컨텐츠들을 소비하지 않습니다. 작품들은 윤리적인 이유로 악인들을 제시할 때 그에 마땅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주제의식적 장치를 부여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호러에서는 그 공포감을 위해서 대체적으로 인물에 대한 이입을 유도해야합니다. 그런 인물이 악인이라서, 당연하게 죽었다고 하면 그것은 공포라기보단 권선징악적 결론에 가깝겠죠.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의 죄악을 최대한 가린 채로 알 수 없는 공포를 유지하며 이입을 유도합니다. 우리는 그 알 수 없음에 공감하는 만큼, 윤리적인 소격화의 가시화가 지연되며 남성에게 이입합니다.
이 지점에서 서스펜스의 해소와 반전은 중첩되며 강렬한 효과를 불러 일으킵니다. 하지만 서스펜스는 끝났고 인물에는 소격화가 일어난 후입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똑같은 반전이 반복된다면, 그 것은 신선하기보단 식상할 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에서는 남자의 행적을 서술한 후 더불어 여자의 행적을 자세하게 기술합니다. 여자는 남자와는 다른 또다른 악인이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반전은 연장 됩니다. 그렇게 악행들이 켜켜이 쌓일 때, 소설은 이 사건의 해결사이자 진정한 피해자인 무당의 딸을 제시합니다.
피해자로써 이야기하는 목숨의 가치는 엄중하고도 진중합니다. 그렇기에 그녀의 경험론적인 경고는 강력한 금제로써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공포소설의 문법이 으레 그렇듯 이 금제는 무너지기 마련인 모래성 같은 것입니다. 하다 못해 벌레 하나 잡을 때조차 천지신명에 기도하라는 이야기는 우스우면서도 동시에 섬뜩합니다. 그 것이 인물에 하는 경고이기 때문에, 대상되는 인물이 악인일수록 적나라한 풍자가 됩니다. 동시에 금제가 가볍기에 누구나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겁습니다. 그렇게 금제가 부숴지고 파국이 일어나며 우리는 그 것을 바라보는 피해자의 눈에 따라 슬픔과 연민을 느낍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 버려야만 하는 것들은 없는 것은 없습니다.
과거를 딛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다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취생에게 잡아먹힌 두 사람은 과거를 터부시하다가 참변을 당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사건을 조망하는 무당의 딸은 과거의 비극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대비가 됩니다.
여기서 공포는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과 실체 없는 것을 마주할 때의 공포입니다. 인부의 실수로 봉인이 풀리고 풀려난 그 불쌍한 존재는 그 본성에 따라 쓰레기같은 인간을 소각하러 배회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바로잡아줄 존재가 우리 곁에 없기에, 더 이상 그 것의 본질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공포를 환기합니다. 그렇게 이 소설 내의 세 인물의 비극은 우리의 무서움으로 확장됩니다.
그렇게 소격화된 비극이기에 이 소설은 고전적입니다.
아니 민담적이라고 해야할까요. 전형적인 권선징악형의 마무리와 함께 그것이 유래되어 퍼져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결말과, 우리에게도 벌어질 수 있다라는 제시는 지극히 교훈적입니다. 여기서 교훈은 생명을 소중히 하라, 그리고 돈에 취하지 마라가 되겠죠. 그 것들이 금제로써 호명될 때 ‘취생’이라는 알 수 없는 것에 이름이 붙여집니다. 그렇게 가시화된 도덕은 옛이야기가 말해주는 민담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민담의 재구성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마치며
기이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다지 많지 않은 와중 소재를 잘 살린 훌륭한 공포 소설을 읽게 되어 재미있었고 즐거웠습니다. 앞으로도 작가님의 건필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