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ni, Terra alia Spiritus! Adsum! 공모(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40일의 바다 (작가: 김아직, 작품정보)
리뷰어: 난네코, 23년 10월, 조회 61

※ 이 리뷰는 김아직 작가님의 <40일의 바다>를 읽고 작성하는 리뷰입니다. 

 

 

 

 

Veni, Terra alia Spiritus! Adsum!

오소서, 다른 땅의 영이여! 저 여기 있습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종교와 흑사병이 지배하는 중세 유럽 사회

3. Terra alia Spiritus : 기독교의 신이 아닌 다른 신에 대하여

4. 마치며

 

 

 

 

 

1. 들어가며

저는 김아직 작가님의 <40일의 바다>라는 작품을 올해 6월 13일에 첫번째로 읽고, 10월 16일에 두번째로 읽었습니다. 중세와 SF가 만난 스팀펑크(steampunk) 계열의 작품들은 제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지식들로 구현한 세계관에 작가가 창조한 환상적인 요소가 결합하여 과거를 재해석할 수 있습니다. 112매에 분량을 가진 중단편 <40일의 바다>은 스팀펑크 장르로서 훌륭합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중세 유럽 사회의 배경 속에서 SF 장르에 필요한 초자학적인 현상이 자연스럽게 녹아져 있습니다. 

당대 인물의 사고로, 당대 시대의 상황에 맞추어서 어우러지지요. 여기서 말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고증에 맞지 않는 무리수가 아니라 ‘정말로 저런 일이 있었을 것 같다!’ 라고 독자가 믿게 만들어버릴 정도로요! <40일의 바다>에 등장하는 주인공 니콜로(스페스 호의 이발사, 고향은 피렌체)와 그가 전하는 이야기가 정말로 1349년 성령강림대축일 즈음에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 수수께끼의 납으로 창고를 지은 귀족이 있다는 1561년 마르실리오 다 비스티치(피렌체의 서적상)의 기록도 정말로 실존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꼬리의 꼬리를 물면서 독자의 상상력을 넓혀줍니다. 그래서 <40일의 바다>가 브릿G의 중단편 일별베스트 3위(검색시간 2023년 10월 21일 오후 6시 21분)에 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브릿G가 추구하는 대표문구(Catchphrase)인 “이야기의 세계로 건너가는 방법”에 완전히 부합합니다. <40일의 바다>를 읽게 되면 주인공 니콜로가 되어 스페스 호에 탑승하여 중세 유럽으로 건너가니까요. 이게 바로 스팀펑크 장르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2. 종교와 흑사병이 지배하는 중세 유럽 사회

그러나, <40일의 바다>를 읽다보면, 중세 유럽인이 숨쉬듯이 당연하게 여기는 사고, 관념, 사회를 우리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발사가 외상외과 의사의 역할도 겸한다던지, 비단과 설탕을 운반하는 무역선에 탑승한 면죄사나 호위무사라는 생소한 직업을 가진 승객들, 흑사병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질병을 유행성 감염질환으로 의심하고 있음에도 의학의 견지에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관점에서 흑사병을 비롯한 질병은 하늘의 신이 내리는 진노의 화살로 비유하는 것들이지요.

이러한 괴리감은 우리가 1300년대에 살던 중세 유럽인이 아니라 2023년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지요. 따라서 <40일의 바다>의 이야기 속 세계로 건너가기 위해선, 우리가 14세기 경의 중세 유럽 사회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첫번째로, <40일의 바다>의 배경인 중세 유럽에는 베네치아라는 도시가 지중해의 향신료 무역을 주도했습니다. 지중해 향신료 무역을 완전히 독점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굉장히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 당시 대표적인 향신료인 후추가 파운드 단위로 거래되었습니다.

또한 중세 말기에 통용되던 상업 안내서 또한 향신료의 계량 단위들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베네치아가 향신료 무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향신료 수송을 전담하는 갤리 선단을 창설한 것입니다. 베네치아는 매년 정해진 기간에 후추, 생강, 계피 등의 향신료를 안정적으로 수송해서 공급함으로써 유럽 제일의 향신료 분배시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14세기 초에 베네치아 정부는 이집트에서 베네치아로 향신료를 수송하기 위해 갤리 선단 제도를 창설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군 왕국이 맘루크 제국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서유럽에서 맘루크 이슬람 제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십자군 공격을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넘쳐났습니다. 교황청도 이집트와의 교역을 중단한다는 일련의 칙령들을 반포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베네치아의 알렉산드리아 행 갤리선단은 1313년부터 1344년까지 운항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40일의 바다>에서 주인공 니콜로가 탑승한 스페스 호는 1349년에 알렉산드리아의 비단을 베네치아로 실어나르는 무역선입니다.

1345년부터는 갤리선단의 운항이 재개되었습니다. 따라서 작중에 등장하는 1349년 스페스 호의 항로인 알렉산드리아-베네치아 항로는 운행이 가능한 항로입니다. 키프로스에 들려서 설탕(달콤한 소금)을 싣지 않고 곧장 가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지요. <40일의 바다>는 고증을 철저하게 지키는 중단편 소설입니다. 김아직 작가님, 굉장합니다! 두번째로, 주인공인 니콜로(고향이 이탈리아의 피렌체, 직업은 이발사)가 흑사병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는 점입니다. 흑사병은 1347년 말 이탈리아 메시나에서 처음 발병한 이래 1353년까지 유럽 전역에 확산되며 엄청난 재난을 초래합니다.

흑사병은 1347년 10월에 시작하여 이탈리아 전체로 퍼집니다. 니콜로의 고향인 이탈리아의 피렌체는 1363년, 1374년, 1383년, 1390년, 1399년~1400년, 1411년, 1417년, 1430년, 1448년, 1456년, 1478년, 1495년~1498년에 흑사병이 발생했습니다. 1383년에 발생한 흑사병은 6월 중순까지 매일 60명에서 80명이 사망했고, 7월 중순에는 200명까지 증가했으며, 그리고 그 후에는 300명, 380명, 심지어 40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한 1399년~1400년 사이에 발생한 흑사병은 당시 피렌체 도시 주민의 약 1/4이 사망할 정도로 심각한 인명피해를 초래했습니다.

피렌체가 흑사병에 영향력에 들어간 것은 1348년 3월이며 첫 역병환자는 3월 말~4월 초에 출현했습니다. 피렌체 시 당국은 공기오염에 대한 조례를 제정하였고, 역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공표했습니다. 1348년 4월 11일에는 피렌체 시의 최고행정관인 ‘정의의 기수(Gonfaloniere de Giustizia)’와 12명의 ‘도시 지도자들(Buonomini)’이 공중보건 문제를 담당할 ‘8인 위원회(Otto di Custodia)’를 신설하고 그들에게 관련업무에 대한 전권을 부여합니다. 이들은 외부 상인과 여행객의 도시 출입을 통제하고, 오염원을 제거하며, 전염병에 감염된 자를 격리했습니다.

우리도 최근에 COVID-19이라는 전염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런 방역 대응과 행정력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과거의 사람들, 그러니까 1300년대에 살던 사람들도 이렇게 전염병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김아직 작가님께서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의 캔터베리 이야기(Tales of Caunterbury)』를 좋아하시니, <40일의 바다>에서 주인공 니콜로가 기이한 사건을 겪은 1349년 언저리에 해당되는 시기의 중세 잉글랜드에서 흑사병이 발발한 상황에 대해서도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1348년 초여름 잉글랜드 남부에 상륙한 흑사병이 다수의 희생자를 발생시킨 것은 8월부터였으며, 사망자가 발생하자 국왕은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전국적으로 기도회를 개최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1348년 8월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사망하자 요크 대주교는 각 교구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기 위해 금식과 특별기도회, 금요일마다 행렬의식을 거행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바램과 달리 절망적이게도 흑사병은 영국 전역으로 확산됩니다.

영국의 몇몇 역사가들은 1348년 이래 자국에서 발생한 흑사병이 교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교회의 폐허 혹은 교회발전의 전환점이라는 상충되는 입장을 보입니다. 영국은 흑사병과 관련하여 사료가 상당히 남아 있고, 특히 인구자료나 교회기록에 있어서 흥미로운 자료들이 많습니다. 잉글랜드의 10개 주교구에 13세기 후반 이래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주교 등록부(Bishop’s register)는 흑사병 시기의 성직자들의 변동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신뢰할만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또한 간헐적으로 발견되는 주교 감찰기록(visitation)도 성직자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따라서 성직자들은 흑사병으로 인한 사망률을 비교적 자세히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입니다. 비교적 자료가 충실한 10개의 주교등록부를 토대로 잉글랜드에서 최소 45%의 성직자가 사망했다고 추정이 가능하며, 가장 낮은 사망률을 보인 주교구는 요크 38.97%였고, 그 다음 순서로는 리치필드 39.6%, 링컨 40.1%, 헤어퍼드 43.2%, 우스터 44.5%, 바스와 웰스 47.6%, 일리 48.5%, 그리고 엑서터, 윈체스터, 노리치 주교구는 모두 48.8%로 집계됩니다.

성직자들의 사망률은 동일 주교구 내에서도 지역, 지위, 상주 여부 등에 따라 큰 차이를 보입니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제할 수 있던 잉글랜드 주교들의 사망률이 12%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잉글랜드 중부에 위치한 코벤트리와 리치필드 주교구 내에서 정주할 의무가 없던 주임사제는 흑사병 발병기 동안 33% 사망했고, 상주해야 했던 대리사제는 46%가 희생되었습니다. 교구민들은 흑사병으로 인해 사망자들과 1347년 말 이래 흑사병이 유례없이 큰 희생과 피해를 초래하며 주기적으로 반복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담당하던 각종 제의들과 사목활동에도 큰 차질을 초래합니다. 엑서터 주교좌성당처럼 곳곳에서 성가대의 규모를 축소하고, 제단 설치계획을 취소시키는 등의 조치들도 흔해졌습니다. 14세기 중엽 이래 주기적으로 반복된 흑사병은 잉글랜드의 성직자들을 큰 폭으로 감소시켰습니다. 잉글랜드는 1348년~1349년 사이의 흑사병으로 성직자의 절반 정도가 죽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40일의 바다>에서 주인공 니콜로가 흑사병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은 지당합니다. 1349년에 피렌체도 잉글랜드도 흑사병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40일의 바다>에서는 흑사병의 수호성인으로 ‘세바스티아누스 성인’이 언급됩니다. 성인공경(cultus Sanctorum)은 중세 내내 기독교 신앙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로, 특히 1347년 말 이래 흑사병이 유례없이 큰 희생과 피해를 초래하며 주기적으로 반복되었기 때문에, 흑사병의 출현 전후로 중세 유럽인들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신앙, 특히 하느님에게 중재해 주는 성인들에게 의존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성서의 성인들에게 높은 종교적 권위와 능력이 주어졌다고 간주했으며, 성인들이 크게 증가하고 기능적으로도 특화됨에 따라, 중세인들은 필요에 적합한 성인들에게 도움을 구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중세인들은 성인이 그의 무덤이나 성유골 및 유물에 ‘현존한다’고 믿었는데, 그들을 위해 기적을 베풀 수 있는 성인들이 종교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성인은 개인은 물론 도시와 공동체의 강력한 조력자이자, 기적을 통해 극단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치유자였습니다.

공동체가 수호성인을 정하고, 교회 및 종교기관을 특정 성인에게 헌납하는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성인들이 차츰 기능적으로 분화되면서, 각종 질병의 회복에 특별한 능력이 입증된 성인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중에는 구난성인(救難聖人 Holy Helpers)이 있었는데, 이들 14명의 성인은 14세기 이래 특별히 공경되었습니다. 흑사병에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로 인정된 성인은 ‘세바스티아누스’와 ‘로쿠스’입니다. 15세기 말 독일지역에서 저술된 흑사병 논고들은 마리아, 세바스티아누스, 로쿠스 이 세 명의 성인에게 기도하라고 빈번히 강조합니다.

세바스티아누스와 마리아는 이미 중세 성기에도 큰 인기를 누렸던 성인들입니다. 병사와 궁수의 수호성인 세바스티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284년~305년) 화살 세례를 받고도 죽지 않았다는 전설 때문에 흑사병이 발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흑사병 수호성인’이라는 별칭과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흑사병 발병 직후 피아첸차의 법률가 가브리엘 데 무시스는 많은 사람들이 성 세바스티아누스라면 죽음의 화살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주리라 믿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토마스 모어는 중세 말 잉글랜드에서 성직자들이 성인공경을 권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흑사병이 너무나 엄청난 역병이자 재난이었기 때문에, 중세인들은 성인공경을 함으로서 하느님에게 중재해 줄 것을 간절히 호소합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40일의 바다>를 읽기 위한 흑사병이 창궐하던 1300년대 유럽인의 사고방식과 중세 유럽 사회의 대한 배경지식은 어느정도 숙지하신 것으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이제 중세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3. Terra alia : 기독교의 신이 아닌 다른 신에 대하여

성당을 다니거나 신학대학에 다니시는 분들이라면 라틴어로 미사를 보는 경험이 많으실 것입니다. 라틴어 기도문 중에 Veni Sancte Spiritus(오소서, 성령님)라는 기도문도 아실 것입니다. 여기서 Spiritus는 ‘영성’이라고 번역이 됩니다. 라틴어 스피리투알리타스(spiritualitas)는 스피리투스(spiritus)를 어원으로 합니다. 동사인 스피라레(spirare)는 ‘불다(blow)’라는 어근에서 파생된 것이며 스피리투스(spiritus)는 호흡, 신의 호흡을 의미하고 성향, 성격, 신남, 활력, 용기와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불교에선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영원한 존재로서의 신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불교에서 신은 고정불변의 유일신이 아니라 윤회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행위 즉 업에 따라서 과보의 삶을 누리고 과보가 다하면 다른 존재로 윤회하고, 이러한 과보의 삶이 워낙 길어서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지, 신도 또한 업이 다하면 새로운 존재로 윤회하게 됩니다. 기독교에선 신은 유일하며 흙으로 사람을 빚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 인간을 창조합니다. 그렇게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등장합니다.

<40일의 바다>에선 이계의 신을 테라 알리아(Terra alia)라고 부릅니다. 기독교에서 믿는 신이 아닌 다른 땅의 신을 뜻합니다. 아마 김아직 작가님께서 창조한 Terra alia는 불교에서 말하는 신도 아닐 것입니다. 과연 신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인공지능(AI)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점철된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과학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사고는 끊임없이 확장되었고, 80억 명이 넘는 인류의 사회는 석기 시대나 청동기 시대와 비교조차 안 될만큼 복합화되고 다변화되었습니다.

튀르키예엔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라는 초기 선토기 신석기 시대의(early pre-Pottery Neolithic age)유적이 있습니다. 기원전 1만년~기원전 9천년 전에 설립된 유적입니다. 즉, 현재를 기준으로 약 1만2천2십3년 전~약 1만1천2십3년 전 쯤에 만들어진 유적입니다. 인류가 수렵 및 채집 생활과 농경 정주 공동체 생활을 함께 했다는 흔적을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거석 기념물이 많아서 전문적인 장인집단이 존재했으며 위계적이고 체계적인 인간 사회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이 가능합니다.

괴베클리 테페에 살았던 사람들도 복잡하고 전문화된 사회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도 신을 믿었을까요? 루터교 신학자 크리스토프 에른스트 루트하르트(Christoph Ernst Luthardt, 1823-1902)는 신학의 원전인 성경은 자연과학 서적이 아니라 종교 서적이며, 따라서 인간을 향한 자연의 진보에서 “자연적 발전뿐만 아니라 신의 창조 행위”를 파악한다고 지적합니다. 신학은 기본적으로 자연이 신의 창조물이라고 주장하며, 자연은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 원천을 제공합니다. 동시에 반대로 기독교 신학은 자연을 해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

 

자연에는 가장 열렬한 낭만적 상상으로도 부인되거나 진정될 수 없는 공허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자연신학이 다루어야 할 “자연”,

즉 안락의자에 앉은 신학자의 이상화된 허구가 아닌 가혹한 경험적 실재이다.

자연은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관찰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자연적 세계가 부패하고 모호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나아가 이 세계를 그 선함과 아름다움이 종종 불투명하고 숨겨져 있지만,

그럼에도 변형의 희망으로 빛을 발하는 도덕적으로, 심미적으로 다양한 실체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신학적 불편을 걸러내지 않고

자연적 질서의 역사에 대한 전체 비전 안에서 이것을 맥락화하려고 한다.

 

A. E. McGrath, A Fine-Tuned Universe. The Quest for God in Science and Theology. The 2009 Gifford Lectures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82.

 

신과 자연을 다루는 자연신학과 자연의 신학은 비슷해 보이지만 자연과 신이라는 두 개념을 상반된 방법론으로 다룬다.

자연신학은 자연적으로 신을 인식하고 통찰하는 반면, 자연의 신학은 신학적으로 자연을 탐구한다.

이러한 두 신학을 과학 철학적 용어로 재정의해 본다면 자연 신학은 신에 대한 자연적 학문으로, 자연의 신학은 자연에 대한 신학적 학문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자연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이를 기반으로 얻어진 자연 현상에 대한 법칙에 기초하여 신의 존재를 논증한다.

신 존재 증명을 위한 논증은 무신론에 대항한 기독교 변증학의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의 종말론적 의미에서 세계의 종말까지 신의 존재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신 존재 증명 자체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자연신학적 무신론 논쟁에서 끝없는 소모전이 계속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신학은 반대로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관점에서 자연과 자연 현상 및 법칙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찾는다.

이를 위해 다른 학문 분야로 분류되는 신학과 자연과학을 중재하는 매개체가 제시되는데, 그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매우 논쟁적이다.

 

윤지훈(2023). 자연신학 그리고/또는(and/or) 자연의 신학. 신학사상, -(201), 87-126

 

기독교적이 방식으로 해석하자면 자연은 신의 피조물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러분은 신의 피조물인가요? 저는 스스로를 그저 인간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무교이기 때문에, 저 자신이 누구의 창조물이고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인간이고, 하나의 생명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김아직 작가님이 창조한 Terra alia는 어떤 신일까요? 그것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4. 마치며

<40일의 바다>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리뷰글이 83매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무튼 제 리뷰따위는 잊어버려도 되니 김아직 작가님의 작품을 일독해주세요! 그럼 이만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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