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꿈을 거의 꾸지 않는 편이었다.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어도 꿈을 꾸는 일은 거의 없었다. 중대사를 앞두고 길몽이든 흉몽이든 꿈을 척척 꾼다는 이야기나 개꿈을 꿔서 잠을 설쳤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늘 신기했다. 어떻게 꿈을 꾸고 기억하는 거지?
요새 나는 이런 의문에 스스로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피곤하면 된다. 피곤한데다 스트레스를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왕창 받으면 숙면이 불가하다. 그 이야기는 선잠을 자기 쉽다는 이야기고 예전보다 꿈을 꿀 확률이 높아진다는 이야기다. 며칠 전에는 좀비떼에 쫓기는 개꿈도 꿨지 뭐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세혁은 나와는 달리 꿈을 자주 꾸는 타입이다. 어렸을 때부터 주구장창 꿈을 꾸다 보니, 이제는 자각몽도 자유자재로 능숙하게 다루는 경지에까지 올랐다. 본인의 선택이 불만족스러웠던 세혁에게 자각몽은 훌륭한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사실 당시 나는 신경쓰는 게 별로 없었다. 내가 빠져 있었던 건 오로지 꿈의 세계였다. 마치 신대륙을 탐험하듯 밤마다 꿈의 세계를 여행했다. 그때는 오히려 현실이 하루하루를 살고나면 없어지는 일회용 같았다.”
라는 세혁의 말을 보면, 본인이 얼마나 자각몽에 심취해있었는지 알 것 같다. 당시 부모님의 반대로 가고 싶었던 수학과 대신 타협해 입학한 물리학과에 정을 붙일 수도 없고,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니 평소 자신이 좋아하고 즐기던 것에 더더욱 빠져들 수밖에. 현실이 불만족스러우면 도피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당연지사 아닐까?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꿈 속 세상이라면 나같아도 후자에 몰입하겠다.
“동기들은 민태를 시기하고 나는 한심하게 보았다. 결국 난 이렇게 뒤처지고 말았으니 말았으니까.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생이 되면서 나 역시 삶의 무게에 눌리고 말았고 꿈의 세계도 민태도 점점 멀어졌다. 나는 그때 낭비했던 시간을 여전히 다 복구하지 못한 채 이렇게 허덕이며 살고 있다.”
나중에 세혁이 대학교 동창인 민태를 떠올리며 했던 생각이다. 나는 이야기의 어떤 부분보다도 세혁의 이 말이 가장 와닿았다. 꿈 속을 헤매며 살았던 그 시간. 괴로웠던 현실에서 약간의 행복이나마 맛보게 해주었던 시간을 낭비라고 표현하는 세혁의 입장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같은 경우에는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평범한 생활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아예 모르고 있었던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꿈으로 현실도피를 할 때는 편하고 달콤했으나, 깨어나는 순간 세혁과 내 앞에 놓인 것은 고통이었다. 나 또한 흘려보낸 인생을 복구하지 못하고 여전히 허덕이는 중이고.
독자와 공감대 형성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
바로 이것이 이야기가 독자를 끌어당길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 생각한다. 세혁이 걸어온 길과 느꼈던 감정이 내가 걸어온 길과 느꼈던 것과 정말 꼭 같았기 때문에, 나는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아무리 주인공이 고통을 호소하고 행복을 외친다한들, 공감이 가지 않으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순식간이기 때문에. 덕택에 나는 세혁이 범법 행위를 저지를 때는 마치 내가 저지른 것처럼 조마조마하게 가슴을 졸이며 읽었고, 고민을 할 땐 그 고민이 내 고민인 것처럼 같이 머리를 쥐어뜯었으며, 안도감을 느낄 땐 이제 한시름 돌렸구나 싶어 안심이 되었다.
이후 전개되는 스토리에서도 꿈이 꽤나 큰 역할을 한다. 왜? 라는 의문이 들 때마다 꿈을 잘 짚어보면 실마리가 보인다. 무심히 흘려보냈던 것, 아무 생각 없이 스쳐지나갔던 것 모두가 세혁의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다 꿈으로 나타나 경고를 보내고, 결국 세혁은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게 된다. 그래도 이후 세혁의 행보가 그렇게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그 옆에 남아있는 믿음직한 친구들 덕택일 것이다. 인생을 낭비했든, 복구를 하지 못해 나락으로 처져 살아가든 옆에서 온기를 전해줄 사람이 있다면 버티지 못할 이유도 없으니까. 세혁의 마지막을 보면 그런 내 생각이 아주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여전히 세혁은 공시생일 것이고, 허비한 시간을 복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또 해볼 만 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을까?
언젠가 세혁과 나 모두 흘려보냈던 시간을 원래대로 복구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