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인 고통과 절망의 수렁에 빠진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끝까지 저항하고 분투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나’는 다수의 시간축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시간여행을 하는 미래인에게 일방적으로 착취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미래인은 ‘나’에게 접근해 ‘신의 조각배’라는 장치를 심습니다. 조각배를 심는 장면의 묘사는 감각적으로 매우 잔혹합니다. 미래인이 ‘나’의 입천장에 압정을 박아 넣는 순간부터 ‘나’의 모든 감각정보는 영구적으로 미래인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지요. 둘의 권력관계는 구조적, 원천적으로 비대칭입니다. 이런 도식에서는 주인공이 아무리 미래인에 맞서 싸운다 한들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동력은 바로 그 원초적인 절망에서 나오지요.
미래인은 성공한 소설가고, ‘나’는 그 소설의 재료로 쓰이는 희생양입니다. 미래인인 ‘놈’이 쓰고 있는 소설의 중심 소재는 ‘나’의 고통입니다. 주인공을 의도적으로 극한 상황으로 몰아세운 다음 그 안에서 그가 느끼는 고통을 미래의 소설 속에서 유려한 문장으로 포장하는 식이죠. 그런데 이건 여느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패턴이잖아요.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먼저 위기가 있어야 하고, 독자의 반응을 끌어내려면 자극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모든 소설가가 자신의 피조물을 괴롭히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창작이란 행위가 일반적으로 누군가―특히 주인공―의 입천장에 압정을 박아 넣는 일과 흡사한 작업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영화란 지루한 부분을 커트한 인생’이라고 말했습니다. 소설도 마찬가지죠. 작가는 자신이 쓰고자 하는 이야기의 테마에 맞추어 인물을 동기화합니다. 주인공에게 모종의 추적 장치를 심어 놓고 온갖 지루한 일상들 사이를 넘나들게 하지요. 이건 일종의 시간의 마법이에요. 소설 속 시간은 결코 현실처럼 흐르지 않습니다. 인물들은 언제나 의도된 시간, 의도된 장소에 존재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주인공이 제 의지와 관계없이 한 시간에서 다른 시간으로 미끄러지는 설정은 충분한 개연성을 갖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소설 속 인물은 시간을 접어 달리는 존재일 뿐 아니라 특정 시간대에 박제된 존재이기도 해요. 독자는 책을 펼 때마다 같은 시간 속에서 마치 처음처럼 쳇바퀴를 굴리는 주인공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어차피 사라질 단 하나의 세상」은 바로 그 주인공이 끝없이 겪어야만 하는 고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 고통을 끝낼 방법은 정말 없을까요.
이야기 중반 이후에는 구원자 ‘너’가 등장합니다. ‘놈’과 마찬가지로 미래인인 구원자는 소설 속 주인공인 ‘나’의 감정에 이입하며 힘이 되어줍니다. ‘너’는 ‘나’를 위한 우주선을 띄웠고, ‘나’는 그곳에서 참된 위로를 받습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말하며 끊임없이 고통으로 밀어 넣는 ‘놈’과 달리, ‘너’만은 ‘나’를 온전히 목적으로 대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너’는 아마도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과 함께 고통받고 눈물 흘리는 독자가 아닐까요. 결국 이 작품은 창작과 소비의 경계―또는 무한한 굴레―에 갇혀 절망했던 인물이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독자에게 보내온 편지로 읽히게 됩니다.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이건 소설 속 인물의 고통에 동기화되어 같이 울어본 독자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일 것 같아서요. 건조한 시선과 냉소적인 태도로는 평생 가볼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종 잔혹하고 절망적인 묘사에도 끝끝내 ‘나’를 향한 희망과 온기가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이 작품의 기저에 흐르는 강한 연민과 공감 때문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