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소설가와 맞서 싸우는 악의 독서가
– 독자 반응 비평을 중심으로 –
아래의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악의 소설가’는 무엇일까요. 악의 소설가가 펼쳐내는 책은 범죄자의 시선을 중심으로 치밀하게 쓰여진 소설입니다. 그렇기에 범죄의 온상이 온전하게 드러난 소설은 지나칠 정도로 포르노라는 지적을 받게 됩니다. 이에 대해 작가님은 상반된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범죄 행위를 전시하는 불쾌한 포르노 같아 윤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것 역시 소설의 기능이기에 괜찮다는 입장입니다.
분명, 범죄를 다루는 소설은, 그 소재의 위법성만큼의 영향력을 조심해야 합니다. 단순히 불쾌함마저 안전하게 소비될 수 있다는 것이 소설의 기능이라는 지점은, 어쩌면 장르 소설의 향유성을 다룬 이야기일지도 모르나, 다소 원심적인 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작가님은 철저하게 고증을 유지하려는 선영의 자세를 들어 또 하나의 입장인 ‘고발’을 듭니다만, 독자의 입장이 아니라는 점은 지적해야 합니다.
그렇게 고발의 단계에 이른 순간 우리는 가치판단을 강요받습니다. 이런 지점에서 충분한 선행 지식과 관점이 필요하므로 작중 인물들이 독서에 조예가 있는 인물로 설정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동시에 선영을 제외한 세 인물들은 작중의 소설을 읽는 관점의 상징계이기에 이 인물들이 복수의 내포 독자로 설정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포 독자란 작가가 글을 쓸 때 청자로 설정한 가상의 독자를 뜻합니다. 그리하여 복수의 내포 독자 간의 갈등을 통하여 독자가 해석하는 영역의 불확정성이 확보됩니다. 즉 독자의 입장과 해석의 설정됩니다. 독자는 글을 읽으면서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 받기 때문입니다.
블라이히는 주관의 교실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모든 지식은 주관적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기에 객관적 지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단순히 특정한 공동체가 객관적으로 참이라고 믿는 것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다뤄지는 윤리에 대한 문제는 문학의 전반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국소적인 영역으로 추락합니다. 작가 S의 소설이 범죄 소설의 환유라 한다고 하더라도, 독자의 영역으로 시점이 이동한 순간, 독자의 경험은 파편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도 있지만 좀 더 다른 이유가 있는데 2번 주제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를 통하여 사회 문제 등과 같은 현실 지향적이 아닌 독자의 경험 지향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작품 자체에 대한 경험과 판단을 근간으로 한 윤리성에 대한 고찰입니다.
2.
이 소설에서 S에 대한 민지의 반응은 병적입니다. 그렇게나 싫어하는 소설가이지만, ‘깔 때 까더라도 읽고 나서 깐다.’는 신념하에 그토록 미워하는 S의 소설을 전부 읽어낼 정도이니까요. 이는 정체성 주제적인 입장에서 비난을 통한 텍스트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홀랜드는 정체성 주제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3가지 단계 혹은 양식으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했습니다. 첫 번째는 텍스트에 의해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되는 방어 단계, 그리고 방어 기제를 안정시킨 뒤 심리적 평정을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환상 단계, 그리고 두 단계를 추상적 해석으로 탈바꿈시키는 변형 단계입니다.
민지는 변형 단계에서, S의 소설을 사디즘적인 소설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 비난의 미적 근거가 되는 민지의 문학관은 소설에 그다지 잘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단지 ‘재미와 감동을 주기는커녕 불쾌함만을 주는 것은’ 작가 자격의 미달이라고 하면서요. 이 부분은 많은 부분을 시사함과 동시에 모호함만을 줍니다. 어쩌면 방어 기제에 억압된 고통이라고 할지라도, 미적 인식이 아닌, 향유적인 입장과 포르노적임을 규탄하는 윤리적인 입장을 이야기하는 일반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불쾌함이라는 감정은 주관적입니다. 비록 포르노적이라고 제가 이야기하긴 했으나, 이 포르노적임을 증명하려는 노력은 이 소설에선 없습니다. 단지 즐거움과 재미라는 일반론을 근거로 하기 때문일까요? 순문학적 숭고함으로 다름을 부정하려는 인식이 민지에게 있기 때문일까요? 이 지점에서 이야기는 광의적인 입장에서 국소적인 위치로 전위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근거가 부족한, 작품을 포르노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창작자 윤리 연대에서 작가 S를 규탄하려는 노력으로 발전합니다. 루머의 재생산과 출판사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 등, 이들의 행위는 윤리를 대의명문으로 주장하나 윤리성을 호도합니다. 이 해석 공동체의 존재는, 독자의 해석에 대한 강력한 공유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의 윤리적 역설 또한 동시에 보여줍니다.
끝에서 선영이 S라는 익명을 버리고 본명을 사용하게 된 후 판매량이 급감했다는 이야기는 다소 의미심장합니다. 더욱이 작가 S의 폭력적이고 도발적인 글의 성격 탓에, 그를 남자로 거의 확정하고 있었다는 맥락은 가부장적인 편견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3.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점은 순문예의 형식을 가지고서 장르 소설을 소재로 이야기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지점에서는 순문예의 ‘장르 소설’에 대한 편견에 대한 메타포로 읽히기도 합니다.
재제가 되는 스릴러 장르는 두말할 것도 없고 장르 소설에서 주요한 지위를 가지고 웹소설 역시 사이다 패스라는 등 지나치게 소모적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스릴러는 현실 고발적이라는 지점에서, 웹소설들은 현대의 지위에 대한 상실과 환상에 맞닿아 있는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지나친 비약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앞선 이런 이야기는 이 소설에서 다루는 창작 윤리라는 관점의 변방에 위치한 듯 해 크게 관련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에 대한 본질적인 고찰을 하기에는 하나의 관점이 될 것 같아, 부득이하게 지적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