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땅에도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듯이, 어떤 사랑은 잉태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환경에서도 생겨난다. <까마귀도 행복을 꿈꾼다>의 연인, 레이븐과 휘안이 그렇다.
레이븐은 황제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생모는 출산 직후 사망했고, 생부인 황제는 사생아를 친자로 인정하지 않는 제국의 관습에 따라 레이븐을 하급관리의 양녀로 보냈다. 그렇게 초라한 고아로, 지저분한 부엌데기로 자란 레이븐은 열 살 때 황제의 명에 따라 특수부대의 자객이 된다. 주된 임무는 황제의 정적을 소리소문 없이 암살하는 것. 실패할 경우에는 자결하는 것이 규칙이다. 스물두 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어떤 임무에 실패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레이븐은 사제가 준 팔찌와 애마 ‘참새’만 데리고 적국인 화양국으로 망명한다. 변방을 지키는 장군이자, 훗날 알게되는 바에 따르면 이 나라의 원로회를 대표하는 화양군의 아들 휘안을 그렇게 만난다.
레이븐과 휘안은 도무지 사랑의 씨앗이 뿌리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서로를 발견한다. 레이븐은 플루넬 제국 출신이고 휘안은 플루넬 제국의 식민지였다가 최근에 독립한 화양국 출신이다. 적대적인 관계인 두 나라 사람들은 오랫동안 서로를 미워하고 꺼림칙하게 여겼다. 심지어 레이븐은 황제의 사생아이자 황제 직속 특수부대 자객 출신의 망명객이고, 휘안은 원로회 수장의 아들이자 변방을 수비하는 장군이다. 정치적 상황으로 보나, 출신 환경으로 보나, 사회적 지위로 보나 이들은 연민이나 애정 같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감정을 나눠서는 안 되는 사이임이 분명하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시작된 사랑을 지키기 위해, 레이븐은 적국의 언어와 예절을 배우고 휘안은 화양국의 지도자급 인사인 어머니와 누이를 설득한다. 과연 이들의 노력은 보답받을 수 있을까.
줄거리만 보면 황제의 사생아인 여자가 천신만고 끝에 적국의 왕자나 다름 없는 남자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 작품은 그렇게 단순한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다. 신데렐라와 마찬가지로 고아처럼 자랐고 부엌데기로 구박받았으며 자객으로서 밥 먹듯이 살인을 했던 레이븐은 화양국으로 망명해 지내면서 자신이 그동안 제국 국민으로서 구 식민지인 화양국의 언어나 문화, 풍습 등을 전혀 몰라도 되는 특혜를 누렸음을 깨닫는다. 반면 고위층의 자제이자 장군으로서 명예롭고 풍족한 삶을 살았던 휘안은 구 식민지 국민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한다고 믿었던(배웠던) 제국에 대한 적개심에 회의를 느낀다. 화양국 내부의 주전파들이 주장하는 대로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난다면 황제를 배신하고 제국에서 망명한 레이븐의 입지는 물론이고 목숨도 부지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각 인물의 국적, 계급, 지위 등에서 비롯된 정체성이 상호교차하면서 발생하는 긴장과 전복 또한 이 작품의 매력 포인트다.
조국을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시키고 화양국 원로회의 대표가 된 휘안의 어머니 화양공, 원로회의 최연소 원로이자 남다른 정치적 감각을 지닌 휘안의 누나 화란 같은 여성 캐릭터들의 존재도 눈여겨볼 만하다. 레이븐과 화양공, 화란은 모두 여성이고, 사생아, 혼혈 등 불우한 출생 배경을 지녔고, 군사, 정치 등 소위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분야에서 활동했거나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레이븐(까마귀)이 꿈꾸는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이들과 어떤 식으로 협력하거나 갈등할지 궁금하고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