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발전에 따른 인간 다움에 대한 정의는 다양한 해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는 인공지능과 로봇을 소재로 한 작품의 주제 담론 중 하나로, 창조물과 피조물 간의 관계성에 그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이 창조물과 피조물 간의 관계성을 양육자 – 피양육자의 관계성으로 치환하여 묘사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특징을 지닙니다.
정체성의 담론에서 중요한 것은 ‘나’의 존재가 어떻게 설정되고 표현 되느냐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것이 관계성으로 진입할 때, 이 관계성의 가치평가가 몰가치해질 때가 있습니다. 인간과 로봇간의 차이, 그리고 종속, 역할 등 다양한 요소들이, 제 역할을 할 때의 울림이 아닌, 그 것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됨으로써 관계성의 평가는 무의미해집니다. 그리고 이 뛰어넘는 방식이 영적인 이야기로까지 승화하게 된다면, 방향은 개인으로써의 존립의 영역에 닿게 됩니다. 이는 소프트 SF의 사회적 맥락의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관계성을 뛰어 넘는 방식이 역전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개인의 역할으로써 인간과 로봇의 정체성을 다루는 것이 아닌, 이 관계성을 성립시키는 기술, 시스템, 사회망 등, 차이성과 종속, 역할등이 매몰된다면 디스토피아의 맥락에 맞닿게 됩니다. 이 경우에도 관계성은 역설적으로 몰가치해집니다. 물론 이는 제 역할을 할 때의 몰가치함과 다르긴 합니다. 전자는 우리가 내리는 가치평가에 전제하는 정체성의 차이를 극복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디스토피아는 위의 과정 속에서 개인의 가치를 거세하고, 존재를 도구화하면서 이면을 드러냅니다.
이 이면에 존재하는 개인은 골드만이 지적한 문제적 개인으로 강력하게 표상됩니다. (언젠가 사회주의 비평 방식을 차용했을 때 사용한 내용을 다시금 인용하면) ‘골드만은 소설을 ‘문제적 인물이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서사 양식’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시스템에 종속된 타락한 사회에서 올가의 방식은 이런 사회적인 모순을 폭로하고 현실을 비판합니다.
디스토피아는 이 방식의 가장 강력한 표현법 중 하나입니다. 개인이 매몰되고 몰가치화되는 과정 속에서 주인공은 참된 가치를 표현하고자 합니다. 단지, 소설 내의 세계에서, 그 세계의 규칙을 배반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오히려 배반하려하기에 개인은 타락한 인물로써 비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지점으로 인하여 관계성의 가치는 몰가치해지지만, 역설적으로 의미를 가집니다.
이 관계성의 몰가치함은 바벨에서는 양육자 – 피양육자 / 기술(인공지능을 포함한) – 인간의 도식으로 이뤄집니다.
바벨에서 살고 있던 주인공인 올가는 자신의 친구인 연우가 실종처리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추적해 나갑니다. 그 과정에서 연우의 인공지능 양육자인 파이아니에게 연우가 ‘과거에 있다’라는 말을 듣고 어릴 적 거주하던 보육원으로 길을 떠납니다. 그 길은 바벨에서의 거주 권한을 뺏길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렇게 보육원에 도착한 올가는, 자신의 선택으로 간 줄 알았던 바벨행이, 사실은 제한적인 정보만을 제공한 보육원 원장에 의한 유도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연우가 원장의 손자인 것도요. 원장은 바벨 초기 개발 연구원이었던 자신의 권한을 포기하여, 연우와 올가가 스스로 바벨에 남을 수 있는 여지를 줍니다. 그렇게 둘은 고민하고 결정하며 이야기는 마무리 됩니다.
이런 기술 / 인간의 관점이 현대의 양육자와 피양육자의 관계를 비춘다면 어떨까요. 어린 나이의 사람은 자신에게 놓인 환경과 인간 관계에 끊없이 영향 받으며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합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주체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모방일 뿐이긴 해도, 이런 모방의 연쇄 속에서 자신을 찾는 것이야말로, 이런 관계성의 가치평가를 몰가치하게 하며, 진정한 가치의 추구가 될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기술에 의해 자신의 선택마저 유도되고 암시적으로 간섭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정체성과 가치는 주체적인 선택이 아닌 기술에 의해 매몰된 몰가치한 것이 됩니다. 역설적으로 이 몰가치함이 몰가치답기 위해서 올가는 자신의 선택과 인간성의 주체성을 희망합니다. 즉, ‘타락한 사회’에서의 타락한 인물로써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스토피아는 그녀의 희망을 거세합니다. 역설적으로 자신의 선택조차 거세된 상황에서 그녀의 욕망은 추동하고 있습니다.
알레고리적으로 이런 역설적인 추동은 타자화된 개인의 소격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여기서 타자화란, 문제적 개인들이 사회로부터 유리 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소격화는, 이 타자화 자체를 문제 제기 하는 데 기여하는데, 소격화를 통해 낯설어진 개인들은 이 사회의 요소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인식하는 거울상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시점을 앙육자 – 기술 도식으로 옮겨보면, 이들이 시스템을 공고히하는 주체이지만, 흥미롭게도, 오히려 거세의 주체인 시스템의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이들 역시 타자화된 개인이 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억압의 주체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이들이 아닌 시스템 자체가 됩니다. 다만, 양육자 – 기술들은 피양육자 – 인간의 선택을 인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인지한다는 지점에서야 우리는 피양육자들이 직접적으로 가시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피양육자들의 시선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닌, 양육자 – 기술의 수동적인 입장에서 피양육자들의 선택을 바라보게 됩니다. 즉 시스템에 의해 도구화된 상황 속에서야 이들의 선택이 비주체성이 소격화가 이뤄집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이를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까닭은 인물들의 소격화가 이루어진 후에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바벨은 SF 디스토피아의 세계관을 통해 사고 실험을 강력하게 추동하면서 주제의식을 치밀하게 끌고 가는 작품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고, 추리서사와 반전도 재미있게 삽입되어서 즐겁게 읽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세계관 자체에 대한 묘사가 비교적 적어 이 세계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재미있는 작품을 써주신 달리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