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서없이 밀실에 갇혀 있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이 왜 갇혀 있느냐부터 생존 방법까지 시시각각 들이닥치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하나씩 풀어나가야 합니다. 수년 전 혜성처럼 등장하여 어느새 미스테리물의 트렌드가 되어버린 쏘우 스타일의 미스테리 공식입니다. 물론 영화 쏘우가 감금 미스테리물의 시초라 하기엔 그 전에 큐브라는 영화도 있었고(장르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미스테리물의 어르신 격이라 할 수 있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긜고 아무도 없었다’도 여전히 사랑받는 현역이시지만 쏘우라는 영화가 후에 나올 많은 영화 , 소설에 큰 영향을 끼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고립된 장소는 모든 미스테리 작가들이 군침을 삼키는 최적의 살인 환경(쓰고 보니 표현이 좀…)입니다. 등장 인물의 동선을 짜기도 쉽고 최근 발달한 기술의 이용 없이 클래시컬한 트릭을 만들기에도 용이하지요. 무엇보다 초반부터 독자들의 몰입도를 높이기에 이만한 환경이 없습니다. ‘우리가 왜 감금되었나’에서 출발하다보니 일반적인 추리소설에서 등장하는 도입부를 건너뛰게 되는 효과가 있으니까요. 여러 가지로 유용한 추리 소설의 배경이긴 한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너무나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작가분들께 사랑받는 미스테리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밀실 감금 미스테리를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알아내야 할 것이 많아질 수록 이야기의 본질이 흐려지는 걸 경험한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지요. 처음부터 다양한 수수께끼를 던져주고 하나씩 풀어나가는 매력이 있는 반면에 추리소설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살인 사건과 그 해결 과정에 있어서의 몰입도가 떨어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하면서 처음에 든 생각도 그런 부분에 대한 염려였습니다.
오랜만에 모인 작가 및 작가지망생 7인은 술을 진탕 마신 뒤 모두 처음 보는 장소에 자신들이 감금되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들 앞에 나타난 중년 남자는 과거에 그들 중 누군가가 저지른 살인에 대해 알고 있다며 제한 시간 내에 살인자를 찾아내지 못 하면 모두를 죽이겠다는 말도 안 되는 협박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당연하겠지만 살인범이 스스로 죄를 자백할 리는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제대로 된 단서도 없이 과거 자신들의 친구였던 한 여학생을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을 찾을 수 있을까요?
이 작품은 최근 트렌드에 매우 부합하는 깔끔하고 정리된 오프닝을 보여줍니다. 그렇다 보니 초반부를 읽으면서 ‘결국은 모두의 과거 이야기가 하나씩 나오면서 서로 의심하다가 자기들끼리 해치고 나중엔 죄 없는 한 명만 남는 이야기겠구나’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이야기를 따라갔는데 이게 왠 걸, 이 작품은 그리 단순한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초반부에는 예상대로 자신의 범행을 애매하게 인정하는 A, B가 먼저 등장하는데, 추리 소설 좀 읽어봤다 하는 독자분이라면 왠지 이대로 끝까지 갈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모두 하시게 될 만한 진행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중반으로 가면서 이야기의 전개 방향이 정통 밀실 미스테리로 바뀌면서 사건을 쫓는 재미가 훅 하고 들어오게 됩니다.
납치범이자 협박범이 죽은 이후부터 작가와 독자와의 진정한 머리 싸움이 시작되는 겁니다. 사건의 조각들이 얼마나 꼼꼼하게 들어맞아 있는가는 저 또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뭐라 단정지을 수 없지만, 중요한 건 진짜배기 추리 소설을 읽을 때의 긴장감과 사건 해결을 위해 글자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등장인물과 함께 풀어나가는 재미가 이 소설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뛰어난 추리 소설을 읽다보면 말도 안 되는 범인의 등장이나 기상 천외한 트릭보다는 읽는 순간 ‘아 그랬구나’ 하고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에 더 재미를 느끼고 감탄하게 됩니다. 이 작품 또한 그렇습니다. 처음엔 꽝 하는 반전이나 있겠거니 하고 보다가 점점 작가님이 만들어 놓으신 치밀한 무대에 빠져들어 범인을 함께 쫓고 있더군요. 오랜만에 정통 추리소설을 읽는 쾌감을 느꼈다고 할까요? 읽기 시작하면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이라 그런지 감동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걸 다 원하는 욕심 많은(?) 작가님이기 때문에 독자가 기대하는 여러 장치들을 소설 속에 준비해두셨습니다. 반전도 그 중 하나겠죠.
이 작품은 최근의 트렌드를 어느 정도 따르면서도 정통 미스테리의 장점 또한 놓지 않은, 쉽지 않은 일을 해낸 멋진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통 추리소설 팬과 최근의 미스테리물을 좋아하는 분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이라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겠죠. 사과라는 여학생을 중심으로 촘촘하게 얽힌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 또한 잘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중간 중간 하나 둘씩 밝혀지는 비밀에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인물 하나하나의 개성있는 성격을 꼼꼼하게 설정해 놓으신 것도 작품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장점입니다.
브릿G의 독자 여러분 중, 쏘우 스타일의 미스테리를 좋아하시는 분들과 애거서 크리스티의 향수를 다시 맛보고 싶으신 분들, 그리고 정통 추리 소설을 즐기시는 분들께 이 작품 ‘A와 B의 살인’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브릿G에 계신 분들 거의 모두가 이 중 하나에 속하지 않을까 싶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