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쟁이가 지킨 세상,아니면 꿈 감상

대상작품: 붕괴 – 2 (작가: 요나렉, 작품정보)
리뷰어: 보네토, 17년 5월, 조회 67

요나렉 님은 상당히 특이한 세계관을 가지고 계신다.

마냥 흔할 듯한 판타지적 세계관은 아니다. 적어도 양판소에서 흔하게 이름 등장할 듯한 종족은 나오지 않는다. 전쟁 이후, 라는 말과 그 전의 묘사를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SF는 아니다. 정령과 마녀가 나오는 SF, 흔치 않을테니.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일관되게 암울한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희망이 나오다가도, 곧 부서지고야 말.

세상이 오직 새카맣다.

 

이 새카만 세상의 마지막에 : 최강의 기사 욘, 짐승 귀의 토메오, 그림자 없는 늑대 아코, 최면술사 아리아, 푸른 머리의 소년 소녀(인 줄 알았지만 정령왕과 그 부인이었던) 에비스와 노미니카가 있다.

아니, 있었다.

 

[선물]은 욘의 이야기였다.

[푸른 정령들]은 에비스와 노미니카의 이야기였다.

[붕괴]는- 아리아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아리아의 이야기로 끝난다. 외로운 최면술사는 꼭 갖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이토록 가련하게도.

 

* * *

 

키라는 이름의 검은 노인이 있다. 그 부인인 테이샤도 있다. 둘은 세계를 파괴하려 한다. …아니, 정말로 파괴하려 하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가 철칙인 악당이라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키는 몇 번이고 대치하던 상대를 향해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말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 이상함을 덮듯 세계가 절박한 꼴로 그 둘을 쫓는다. 쫓고, 다 몰락하고 멸망한다.

흰 노인도 있다. 그 노인의 이름은 아코. 키와 대치 중, 키는 몇 번이고 내 친구, 내 오래된 친구 등으로 아코를 말한다. 키는 아코를 죽이고 싶어하지 않지만, 아코는 키를 제거하고 싶어하는 것이 확실하다. 다만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술식을 사용할 수 있는 아리아를 보좌하고 있다. 그녀에게 힘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아는 죽지 않는다. 아리아는 먼 과거에 키와 아코, 둘에게 몇 번이고 죽임을 당한 후 재구성했던 전력이 있다. 아리아는 키를 몹시 껄끄러워하지만, 남편을 구해내기 위해 반쯤 자의 반쯤 타의로 이 파티에 있다. 남편과의 추억은 공고하다. 남편은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다. 아리아가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아리아는 그 기억을 위해 지금의 파티에서도 똑같이 음식을 차린다.

—다만 술식으로 차린 음식은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

 

* * *

 

분명히 아리아는 인간이 아니다. 이끼 같은 녹색 머리카락 뿐만이 아니라, 묘사 자체가 그렇다.

 

아리아는 이 세상의 허락을 받은 존재가 아니었다. 없었어야 할, 있어서는 안 되는 여자였다. 때문에 그녀의 모든 것은 그녀의 스스로의 힘으로 유지해야 했다.

(중략)

때문에 그녀는 더 인간답게 살아갈수록, 더 이성적으로, 더 감성적으로 살아갈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리고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정도로 축적된 그녀의 인격은 더욱 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했다.

남자를 유혹하여 쾌락과 목숨을 저울질하는 괴물이던 때의 그녀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경향이었다.

(중략)

에너지가 없다면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그녀는 그대로 무너진다.

인격도, 생각도, 감정도, 기억도, 습관도 모조리 무너져 사라진다. 아리아라는 존재의 밑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계속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아리아는 키 못지않게 처치곤란한 문제가 될 거란 언급이 이어진다. 이 묘사를 보며 그녀를 정의하기란 상당히 까다롭다. 그녀의 활약은 영화 인셉션의 아리아드네를 연상케한다. 최면술사라고 명칭이 주어져 있긴 하지만, 그녀가 제시하는 배경은 환상이 아니다. 물리력을 행사하는 환상이라니, 무서운 일 아닌가? 그녀는 배경을 조합하고, 자신의 형태를 바꾸고, 주변에 영향을 행사하는 크리쳐들(시체에서부터 촉수까지)을 생산해낸다. 그 힘으로 키를 공격한다. 키가 자신을 다시 박살낼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키를 상대한다.

이 인간이 아닌 그녀가 역시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남편을 찾아내어 예전과 같은 행복 속으로 돌아가는 것.

아리아는 혈투 속에서 자신이 위험해지자 도망을 택했다. 이미 회생불능 상태에 빠진 동료들도, 자신의 식탁에서 자신의 음식을 먹어 줄 사람이 부족하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에서 다 구해내어 앉혀 놓았다.

아코는 그런 그녀를 힐난하지 않았다. 다만 질문할 뿐이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더 묻겠다.”

(중략)

“너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나?”

 

이 때 그녀에게 새로운 호칭이 생겨난다 – 웃는 거짓말쟁이.

 

* * *

 

거짓말쟁이가 남편과 식사하는 꿈을 꾼다. 그 꿈에서 하얀 노인과, 머리가 푸른 소년소녀와, 짐승의 귀를 달고 있는 남자와, 눈을 감지 못하는 여자가 나온다. 아리아는 그 모두를 식탁에 앉힌다.

행복한 꿈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절망적인 전투뿐이었다. 파티의 절반이 괴멸했다. 전보다 더 무모한 전략을 구사했다. 그 전엔 아리아가 키를 견제할 술식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되었었다. 하지만 이번엔 키의 부인인 테이샤를 직접적으로 견제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리아는 테이샤를 꺾을 수 없어, 몇 번이고 몸을 재생해야 하는 고초를 겪었다.

아리아의 앞에 아코가 나타났다.

 

아코는 아리아의 말을 잘랐다.

 

“너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나.”

 

아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코는 다시 물었다.

 

“너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나.”

“키가 무서워. 죽는 게 무서워.”

 

아코는 아리아의 역할을 대신한다며 아리아를 피신시킨다. 아니, 사실 역할을 대신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코가 테이샤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은 키뿐이었다.”

 

과거의 동료, 또는 친우였을 것이 확실한 이 두 노인의 관계가 점점 미궁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가운데, 아코가 본체를 드러내며 테이샤를 공격한다.

그리고 아리아는 욘을 절명시키려는 키 앞에 섰다. 도망가도 좋다고 했으나, 키 앞에 섰다.

그렇게 죽는 게 무섭다면서, 키가 무섭다면서, 키 앞에 섰다.

 

* * *

 

키가 아리아를 정의한다.

 

“자네는 존재 자체가 거짓 덩어리야. 자네가 차지하는 공간, 자네가 살아가는 시간, 자네의 형태, 무게, 목소리도 모조리 거짓이지. 자네가 나를 보기 위해 눈에서 반사하는 빛마저도 다 거짓이란 말일세.”

(중략)

“자네는 이 세상의 오류야. 오류를 찾아 고치는 것은 내가 평생을 해온 일이었고. 자네가 나를 보는 눈빛마저도 나에게는 자넬 죽일 수단이 된다는 말일세. 이걸 모르고 내 앞에 알랑대는 것은 아니겠지?”

(중략)

“그래. 그게 자네의 진짜 모습이지. 두려움 앞에 일어서지 못 하고, 허세와 기만으로 용기를 대신 하려는 사기꾼.”

(중략)

“감히 기만자 따위가 나에게 손을 뻗치겠다는 건가!”

 

아리아는 비명을 질렀다.

아리아는 쓰러진 욘을 쳐다보았다.

아리아는 검붉은 눈동자를 가늘게 뜨고 키를 노려봤다.

아리아가, 거짓말쟁이 최면술사가 자신마저도 속이는 용기를 가지고 키에게 반격을 시작했다.

 

아리아가 현명한 자의 상을 말하고, 푸른 머리카락으로 변했다.

아리아의 공세가 흉흉했으나, 키에게는 별 피해가 없었다.

아리아가 담배 피는 호랑이의 상을 말하고, 전신에 강화식이 구성되었다.

키는 처음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다. 입가의 피를 닦았다.

아리아가 어리석은 왕국의 상을 말하고, 기괴한 인간들을 불러 일으켰다.

키는 역산하여 역공에 성공한 후, 아리아를 경멸했다.

아리아가 뒤집개의 상을 말했다.

이미 죽었다는 판정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욘이, 꿈을 꾸었다.

 

* * *

 

꿈 속에서, 욘이 궁금해하던 사실이 있다.

 

“저희는 키를 어떻게 이긴 겁니까?”

 

 

—욘은 오해하고 있었다. 이긴 것이 아니었다. 웃는 거짓말쟁이의 진심이 받아들여졌을 뿐이니까.

 

그녀가 마지막까지 살아있길 원한 것은 남편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남편이란 존재가 정말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건 맞는 걸까? 단 한 번도 현실의 남편이 등장한 적 없다. 언제나 꿈을 꿀 뿐이다. 그것은 과거인가, 현재인가, 아니면 스스로에게 덮어씌우고 있는 최면인가?

키는 그녀를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불렀다. 기만자라고 했다. 하지만 키는 정말로 빌런인가? 아코가 사실 빌런이라면? 선과 악이 모호한 것은 확실하다. 과연 누가 옳단 말인가?

그리고—

 

거짓말쟁이가 세상을 지킨 것이 확실했다. 아니면 모든 것이 거짓말쟁이가 잘 계획한, 또는 자신이 꿈꾸길 바랐던 꿈이었을 것이다. 여운과 수많은 의문들이 너무 오래 나를 괴롭혀서 나는 그저 리뷰를 다다다 써내려가며 우울해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