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스스한 분위기가 잘 묻어 나는 동양풍 호러 소설입니다. 이 으스스한 느낌은 대부분 괴물 ‘책망량’의 존재감에서 기인합니다. 책망량은 낡은 서고에서 종이에 먹으로 쓰인 문장들을 먹고 삽니다. 그리고 그 문장을 쓴 사람은 책망량에게 차츰 영혼을 갉아 먹히게 되지요. 책망량은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운 외모로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서장, 그리고 제1편과 제2편으로 나뉘어 전개되고 있습니다. 서장은 괴물 책망량의 캐릭터를 묘사하면서 이야기의 기본적인 설정을 설명하는 데 할애되었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1편부터 시작되죠. 리뷰를 쓰는 시점에 저는 24회, 즉 제2편의 6화까지 읽었습니다. 1편에 등장하는 주인공 ‘송이채’는 10살 어린아이인데, 2편에서는 어느덧 혼례를 앞둔 사내로 묘사됩니다. 1편과 2편 사이에 몇 년의 시간 간격이 존재하는 셈이죠.
1편은 이채와 책망량의 만남에 얽힌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어린 이채의 속마음을 여러 차례 공들여 묘사합니다. 책망량을 길들이려는 이채의 행동은 물론 위험하고 경솔했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만큼 가슴 아픈 사정이 있거든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이채가 집안에서 겪어야 했던 정서적 결핍, 그 빈자리를 채워준 누나 ‘미정’의 혼례를 앞두고 이채가 느끼는 외로움, 박탈감 같은 것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이건 아마도, 어린이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반영된 결과일 거예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이면에 있을 어린이의 욕구에 주목하기보다, 그저 철없는 한때의 치기로 간주하고 마는 어른들의 무심함을 지적하는 거죠. 물론 이야기 속에서 이채가 벌이는 모든 경솔한 일들을 주변 어른의 책임으로만 떠넘길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어린 이채의 입장을 더 많이 대변하려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듯 보이고, 덕분에 독자는 이채의 내면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죠.
작가의 세심한 태도는 2편에서도 이어집니다. 2편에는 이채의 정혼자 ‘선혜’가 새롭게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여성의 역할을 협소하게 규격화하는 시류 속에서 선혜가 느껴야 했을 좌절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죠. 혼기에 이른 이채와 선혜의 집안에서는 활발히 혼담을 나누지만 정작 당사자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선혜는 역사를 더 공부하고 싶어 하고, 이채는 여전히 외로워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책망량에게 쏟아붓습니다. 두 사람의 결핍은 혼인이 아닌 책을 매개로만 해소될 수 있죠. 이후에도 ‘책’에 관한 모티브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동력으로 작용할 것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안타깝고 끔찍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장면들도 있습니다. 예컨대 미정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던 이채가 끝내 누나의 남편이 쓴 연서를 훔쳐 책망량에게 내어줌으로써 그의 영혼을 갉아먹게 만드는 장면이 그렇죠. 이채가 누나의 불행을 바랐던 건 아니었음에도 결과적으로 가족이 겪는 불행의 원흉이 되어가는 모습은 이 이야기를 더욱 비극적으로 몰아갑니다. 미정 또한 당대를 살아가는 한 명의 여성이고, 남편의 이른 죽음으로 겪게 될 고난이 충분히 짐작되기 때문에 그 비극성은 더욱 짙어지죠. 무엇보다 이채의 잘못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날 리 없으니까요. 이 불안한 심리가 이야기 전체를 장악하면서 작품의 인상을 돋보이게 합니다.
한편 이 작품에서 단연 눈에 띄는 캐릭터는 책망량입니다. 책망량은 시종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냉소하고 조롱합니다. 책망량은 제가 먹이로 삼은 문장들을 빠짐없이 기억하며 그를 바탕으로 인간이란 존재를 파악해가죠. 그에게 인간은 그저 볼품없고 유한한 존재일 뿐입니다. 인간이 만든 기록이란 것도 그들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죠. 책망량의 오만한 시각은 이 작품의 불안하고 무력한 심리를 더욱 강화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2편부터는 흥미로운 관찰자가 등장해서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해줍니다. 선혜의 집 종으로 새로 들어온 이 이름 없는 ‘소년’은 이채와 선혜 사이를 오가며 제삼자의 시선으로 둘을 주시하죠. 앞으로 이채와 선혜, 그리고 책망량 사이의 관계에 이 소년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사뭇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