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특히 로맨스는 갈등에 기초한다. 발단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위기를 맞고 절정에 오른다. ‘절정’은 갈등의 최고조를 의미하며 이 부분을 읽는 독자는 비로소 작품에 가장 깊이 빠져 있다는 걸 느낀다. 어떤 일을 방해할수록 더욱 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닌가.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장벽이 애인과 자신 사이에 있다면, 주인공은 그것을 뛰어넘는 사랑을 하고자 한다. 관객과 시청자, 독자는 가로막힌 관계를 안타까워하는 한편 힘찬 응원을 보낸다. 인물을 방해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서사를 클라이막스로 이끌고 간다. 따라서 로맨스를 쓰는 작가들의 지대한 관심사 중 하나는 이 ‘장벽’을 적당하게 세우는 데에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가로막은 ‘집안’의 다툼부터 막장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출생의 비밀, 갑자기 회사에서 보내는 해외 출장 등은 스토리텔링에서 사랑을 일시적으로 방해하지만 결국 더욱 견고하게 한다.
그렇다면 사랑을 방해하는 극강의 장벽은 무엇일까. 리얼리즘은 가문과 현실적 어려움 등 주로 인물 간 관계를 극한으로 내몬다, 판타지, 또는 환상소설에서는 좀 더 폭넓은 장치가 사용된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은 ‘종(種)’의 차이를 이용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동양의 구미호부터 서양의 흡혈귀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 이물과 인간의 사랑은 종의 장벽에 가로막히곤 했다. 이런 난관은 가문과 출생의 비밀, 해외 출장으로 인한 문제와는 다른 느낌이다. 애초에 생명에 맞먹는 것을 담보로 해야 하는 관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산화 작가의 단편 「희박한 환각」은 해양생물과 인간의 사랑을 그린다. 이경희 작가의 「꼬리가 없는 하얀 요호 설화」에는 사람을 사랑한 구미호가 나온다. 그나마 두 작품의 동물과 이물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인간의 관점에서 이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사람을 해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만약 인간과 이물이 포식과 피식의 관계에 있다면, 그 사랑은 정말로 큰 위기를 맞는다. 포식자가 피식자를 사랑하거나 피식자가 포식자를 마음에 품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만화 『도쿄 구울』에서 식인을 하는 구울이 숨어 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설령 구울과 사람이 사귈 수 있더라도, 공개 연애를 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뻔하다. 동양에 구울이 있다면, 서양에는 사람의 피를 먹는 흡혈귀가 있다. 흡혈귀는 구울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 흰 피부에 햇빛을 잘 보지 못한다는 등 신비하게 묘사되는 흡혈귀가 도심에 출몰했다고 상상해 보자. 사람을 해치지 않더라도 당장 비상사태가 선포되지 않겠는가.
안채윤 작가의 《흑해》는 바로 이 흡혈귀와 인간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종이 다르고, 심지어 한쪽이 다른 쪽의 피를 먹어야 살 수 있다. (이 작품은 흡혈귀가 죽은 사람의 피를 먹어도 살 수 있다는 설정이지만, 위화감과 공포를 조성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소름이 돋는다. 특별히 《흑해》는 이종(異種) 간의 사랑을 다방면으로 활용하는데 흡혈귀의 ‘영생을 산다’라는 내용이 두드러진다. 불멸의 흡혈귀와 필멸의 인간은 어떤 사랑을 할까. 필시 영원을 사는 쪽은 애인을 잊지 못해 괴로워할 것이다. 이토록 장애물이 많은 사랑이라니. 함부로 시작할 수는 없지만, 시작만 하면 반드시 애틋하다. 그러니 이런 우여곡절의 사랑을 택한 작가의 안목은 실로 탁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초월하기 : 종(種)과 시간과 공간을
《흑해》의 시작은 정통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실제의 지명과 공간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면 독자들은 순도 높은 판타지 로맨스로 이해할 가능성이 있었다. 나르바, 체르, 피에르 등 인물의 이름도 이국적이다. 비밀스러운 숲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금기는 흡혈귀에 대한 공포를 극단으로 몰고 간다. 강렬한 붉은색으로 치장했을 것 같은 흡혈귀의 이미지와 달리 주인공 나르바 앞에 등장한 것은 푸른 눈의 체르였다. 작가는 이런 체르의 모습을 통해 흡혈귀 이미지의 반전을 꾀한 듯하다. 체르는 전혀 위협적이지도 않고 나르바를 공격하지도 않는다. 최초의 만남은 체르와 피에르가 나르바를 구하며 시작되며 둘은 사랑에 빠진다. 사건은 기껏해야 마을 안에서, 더 넓게는 하나의 국가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용의 진행은 독자의 추측을 넘어선다.
체르는 타국의 침략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두 연인이 맞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죽음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고작 몇 회 만에 ‘첫 번째’ 죽음을 맞는 체르는 환생을 기약한다. 500년도 더 걸린다는 환생은 인간의 수명이라면 어림없지만, 나르바는 체르의 피를 마시고 흡혈귀가 된다.
이 작품은 전체적인 설정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역사적인 사건이나 실제 지명을 소설 안에 적절히 녹여냄으로써 환상성과 현실성의 경계에 교묘히 위치를 잡았다. 특히 나르바와 체르의 짧은 첫 인연 동안 흡혈귀 종족에 대한 설명이 매우 자세히 나온다. 두 개의 집단과 그들의 생활 모습이 배경에서 그칠 수 있음에도 이후의 장면에서 분명한 복선으로 작용한다. ‘흡혈귀 종족’은 도입부에서 이미 강렬한 암시를 담는다.
나르바의 이후 행보는 아주 의외다. 순식간에 500년이 흐르고 때는 1919년 경성. 완전한 이국적 (특히 서양적) 색채를 가진 초반과 달리 체르의 죽음 이후의 장면은 모두 일제강점기 한반도를 배경으로 한다. 공간의 급격한 전환은 나르바의 삶에 큰 전환이 온 순간을 기점으로 사건을 나누는 한편, 체르가 환생할 곳이 대한민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음을 보인다. 흡혈귀로 500년을 살아온 나르바에게 인간의 모습은 없다. 나르바는 동굴에 살며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을 돕는다. 이때 ‘채훈’이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500년 후의 시간, 체르와 이름이 비슷한 이 사내가 환생일까. 언뜻 그렇게 보이지만 독자들의 예상을 깨고 채훈은 나르바에게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르바의 행동이 반전이다. 그녀는 명백히 체르가 아닌 이 사내를 사랑한다. 독자들은 미묘한 관계의 어긋남을 느낀다. 나르바는 체르를 기다려야만 한다. 모진 갈등과 방황이 모두 체르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르바는 갑작스레 채훈을 사랑한다. 이 부분에서는 제논의 전사와 흡혈귀 종족의 총체적인 특징이 큰 역할을 한다. 흡혈귀는 살아있는 사람의 피를 먹으면 그 사람으로 모습이 바뀐다. 제논은 자신이 사랑한 사람의 피를 마시고 그의 모습이 되어다. 그의 말은 나르바에게 선택의 길을 열어준다, 나르바는 주저함 없이 채훈이 사랑하던 여인의 피를 마신다.
그 직후 채훈과 나르바의 관계는 잘 풀릴 듯했다. 그러나 채훈은 일본인의 방화로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나르바가 채 슬퍼할 시간도 없이 체르의 환생인 샤오룬이 조선 땅을 밟는다. 후반부의 급한 전개는 예상할 수 없는 운명의 흐름을 보여준다. 의외로 체르의 환생은 중국인이었다. (사소한 반전과 내용의 전환도 작품을 읽는 재미가 된다) 눈에 흰자만 남은 어린아이가 운명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런 사소한 신비성이 다시금 작품에 환상성을 더한다. 작품의 초반과 마찬가지로 후반은 다시금 흡혈귀와 인간의 사랑을 맞을 준비를 한다. 경성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의 물결 안에서.
이 무렵 식민지였던 한국의 공간을 작가는 면밀히 표현했다. 제암리 학살사건에서 채훈의 동료가 사망하거나 유관순으로 암시되는 소녀가 등장하는 등 독립운동의 과정을 비교적 세세하게 다룬다. 역사 교과서나 신문기사, 뉴스에서 한 번쯤 보았을 법한 굵직한 사건부터 스스로 관심이 없다면 모를 작은 일까지. 그 안에 실제와 가상의 인물을 적절히 배치한 것은 다시 한번 소설에 실재감을 부여한다. 《흑해》에서 두드러지는 ‘장면묘사’와 선명한 인물의 움직임, 상상이 쉬운 동시에 예스러운 문장의 특징은 웹툰 등 이미지 콘텐츠로서의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실제 역사적 사건 안에 나르바는 슬그머니 끼어 들어간다. 주동자를 알 수 없도록 동굴에서 이루어진 광범위한 전단 살포부터 독립운동에 필요한 붉은 염료를 모아둔 피로 제공하는 등 흡혈귀의 능력과 특징을 십분 발휘한다. 역사의 기록에서 뒷배경이 밝혀지지 않은 사건을 상상으로 채워 넣는 작가의 능력이 탁월했다. 안채윤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역사 소설을 쓸 때 장점이 두드러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르바는 운명을 따라 온 샤오룬을 힘써 사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샤오룬 역시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을 위기에 처한다. 독자들은 이 장면에서 처음 체르가 나르바를 구해주었던 것을 떠올린다. 이제는 500년이 지나, 나르바가 체르를 구한다. 인물이 처한 상황의 역전은 작품을 예상과 다른 결말로 이끌고 간다. 흑해로, 체르는 나르바를 환생시키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이제는 그가 다음을 기다릴 차례다.
체르와 나르바는 종과 시간, 공간을 모두 뛰어넘어 사랑을 이어간다. 주인공 격인 두 인물이 인간과 사람, 사람과 인간을 넘나든다. 그들은 오직 하나의 종에 머무르지 않는다. 500년이라는 시간은 어떤가. 감히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작가는 타임머신도 없이 ‘흡혈귀’라는 인물의 설정 하나로 이루어냈다.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모종의 사유로’ 나르바는 한반도를 찾았고 중국인인 샤오룬, 체르의 환생과 재회한다.
가장 힘든 사랑, 모든 관계와 제한을 초월한 인연의 끈은 환생에 환생을 거듭하여 이어진다.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억만의 장애물이 있더라도 결국은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
맺으며
《흑해》 안의 사랑은 정말 ‘모든 것’을 이루는 마법과도 같다. 예상하기 쉬운 진행과 결말 같은가. 하지만 나르바에게는 사랑이 마냥 쉽지는 않았다. 500년 안에 나르바는 셰익스피어와 모차르트를 보았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멋있는 장면과 풍경을 만났을 것이다. 좋은 것을 볼 때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난다고들 한다. 나르바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체르와 함께하고 싶어하며 보냈을까.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틴 나르바에게 새로운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을 큰 혼란이다. 그러나 작가는 나르바에게 영원히 한 사람을 향해 복무하는 마음을 주지 않았다. 금기를 깨더라도 나르바에게는 사랑을 할 이유가 있었다. 모습을 바꾸고 거짓을 말해서라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체르도 1900년 이후를 살아가며 그런 사랑을 할까. 아니면 그는 이후 나르바 한 사람을 위해 500년을 살까. 체르는 500년 후 어떤 세상에서 살게 될까. 그건 정말 먼 미래다.
축하하고 기뻐할 틈도 없이 두 인물은 만나고 이별을 한다. 함께한 찰나를 위해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견딘다. 그 안에는 타국의 역사와 세계의 이해관계가 얽힌다. 고국과 타국이 없는 그들은 영원한 방랑자이다. 그러나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우리는 두 존재의 사랑을 본다. 아무것도 가로막지 못했던, 어쩌면 먹고 먹히는 관계여야 했던 그들의 사랑을 조금은 멀리에서, 때로는 아주 치열하게 지켜보고 싶다. 그들은 누구보다 강하게 한 시대를 버텨냈다.
환생을 이루어준다는 바다가 있었다. 내가 그 안에 흘려보내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어느새 손에 들린 건 능숙하지 않은 사랑의 과정이다. 얽히고설킨, 그러나 그 끝은 분명한 운명의 물결이 우리를 이끌고 있다.
초월과 시대라는 거창함을 다 걷어버린 어떤 순수한 사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