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태엽 십자가 공모(비평)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크루시스(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약) (작가: CKN, 작품정보)
리뷰어: 냉동쌀, 21년 5월, 조회 81

선과 악의 대립은 인류의 탄생 이래 내려온 숙명입니다. 피어오르는 악에 맞서 선이 택한 다양한 방법은 여러 방향으로 악을 구속하려 했고, 제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시도 끝에, 여전히 우리는 도처에 악의가 피어 있는 꽃밭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시계태엽 오렌지, 한 번쯤은 들어보셨나요? 앤서니 버지스가 집필한 피카레스크 소설이기도 하고, 이를 각색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양쪽 모두 출간, 개봉 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제는 악의 억제입니다.

시계태엽 오렌지에서는 악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거의 고문에 가까운 ‘치료법’이 시행됩니다. 악명 높은 루도비코 요법. 그 치료법을 받은 사람은 폭력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마침내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그 요법을 시술받은 주인공은 선해졌을까요? 내재된 악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 결말은 직접 확인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영화와 소설은 결말이 조금 다르고, 저마다 주제를 잘 부각하고 있습니다.

크루시스는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약입니다. 전두엽의 활성화 어쩌고 하는, 문과에게는 보기 싫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악인을 선하게 만들어줍니다. 라틴어로 십자가라는 의미로, 참회의 상징이라고, 작품 내에서 제시됩니다.

약이라니, 한 알이면 마음 속 악의가 사라진다니, 오랜 시간 고문에 가까운 시술을 받아야 하는 루도비코 요법보다는 인도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왜 하필 가루약일까요? 알약 투약량도 정량화하기 편할 텐데. 어쩌면 제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흡수가 빠르다거나, 시판 제품이 아닌 프로토타입이라 가루 형태일 수밖에 없다거나, 주인공의 가족이 알약을 삼키지 못하는 체질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런 뒷사정을 모르는 제 눈에는, 영략없는 마약이 연상되는군요.

프롤로그, 주인공의 지인으로 추정되는 상윤이 형은 미친듯이 크루시스를 갈구합니다. 마약을 탐하는 중독자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첫 임상실험 대상자인 주인공의 누나 또한, 마약 중독으로 이성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가루 상태의 크루시스를 보고서는 진통 성분을 통해 마약 효과를 경험하겠다고 그대로 복용해버립니다.

인간을 선하게 만들어주는 약이 마약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마치 악마의 모습을 한 오버로드와 진배없습니다. 특히 상윤이 형이 악인으로의 회귀를 거부하며 크루시스를 탐하는 것은, 악인이 과거로부터 벗어나 선인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선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에 대한 갈망 또한 무용할 뿐입니다. 크루시스를 계속해서 복용한다고 선인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계속해서 다른 작품을 끌고 와서 죄송합니다만, 아무래도 이 대사보다 더 와닿는 설명은 없기에, 양해 부탁드립니다. 상술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태엽 오렌지의 한 대사입니다. 루도비코 요법을 받고 처음으로 악의를 느꼈다가 고통을 받는 주인공을 보며, 그 자리에 참석한 신부가 던진 한 마디입니다.

‘신이시여, 이 아이는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악의에 고통을 느끼니 선한 행동을 택할 수밖에 없음에도,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이 작품에까지 확장되는 대사입니다. 상윤이 형은 선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크루시스를 복용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스스로는 선한 선택을 할 수 없으리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크루시스와 루도비코의 같지만 다른 듯한 공통점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선 자와 시계태엽이 달린 자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저 살아가는 것입니다.

작품의 결말을 프롤로그로 제시하는 구조를 통해 더욱 비극적이고, 그 비극을 향해 걸어가는 주인공의 행보가 기대됩니다. 프롤로그를 포함하여 겨우 6회 남짓한 짧은 분량, 작품의 도입부에 불과한 시점임에도 강렬한 흡입력과 진중한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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