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되돌린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보통 ‘시간여행’을 떠올린다. 몸과 영혼이 함께 과거나 미래로 옮겨가는 내용의 스토리텔링은 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콘텐츠에서 시도되었다. 주로 ‘타임머신’ 형태의 기기를 이용하는 이러한 이동 방식은 SF 장르에서 여러 방식으로 실험되었다. 하지만 시간을 여행하는 방식은 물리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SF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영혼의 움직임을 통해 보다 자유로운 인물의 이동을 추구했으며 전생 체험을 통해 여러 시간대의 자신을 경험하는 『죽음』이라는 장편을 펴내기도 했다.
육체는 현실에 있는 채로 영혼만 시간을 넘나드는 상상력은 훨씬 구체화하기 쉽다. 몸에 혼이 갇혀 있다면 오히려 제약 사항이 많다. 하인라인을 비롯한 SF 작가들이 쓴 타임리프 소설에서 주인공은 간혹 여행한 시간대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나 외양을 바꾸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영혼은 일반적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외적 모습에 자유롭다. 최근에는 가상현실이나 VR 등의 기술을 이용해 영혼과 같은 ‘아바타’가 시간을 건너는 가공의 배경을 기대해 봄직하다.
서두를 이렇게 떼었지만, 오메르타 작가의 소설 〈한 걸음에 삼백 리〉는 생각보다 ‘시간여행’의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여행’의 측면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은 오히려 강력한 타임리프 소설이다. 일면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그의 소설에 적용한 ‘영혼의 이동’에 좀 더 중심을 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육체의 이동에 필요한 것이 과학과 기술이라면, 영혼의 이동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를테면, 강한 믿음이 아닐까.
시간의 되돌림은 굳은 의지와 그것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짤랑짤랑 방울 소리가 있다.
돌아가고 싶은 때와 장소가 있느냐?
〈한 걸음에 삼백 리〉는 독특하게도 무속신앙의 색이 진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타임리프’라 함은 자고로 미래 기술 발전의 산물이라는 고전적 관념에서 과감히 돌아선 이 작품은 무속인 할머니를 둔 ‘가을’이라는 주인공이 겪은 일련의 사건을 다룬다. 시간의 거스름을 설화적으로 풀어낸 이경희 작가의 〈꼬리가 없는 하얀 요호 설화〉와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두 작품에서 인물이 시간을 거스르는 방식은 확연히 다르다.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육체’와 ‘영혼’이 함께 이동하느냐 아니냐에서 발생한다.
가을은 자신의 친구인 (한편으로는 연인으로 보이는) 다미의 죽음을 겪는다. 그리고는 무당인 할머니 숙정을 만나러 간다. 숙정은 가을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런 공통점은 숙정과 가을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가을이 다미를 잃었던 것처럼, 숙정도 아들과 며느리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이후 숙정은 무병을 앓고 신내림을 받는다. 숙정은 가을이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자신이 아들의 사고 전으로 가서 그들 부부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해준다.
“세상 순리가 그래. 할미도 몇 날 며칠을 뛰어다녔는데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어.”
무당이라면 초월적 존재의 비호를 받는 자가 아닌가. 신을 모시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 이들에게 숙정은 담백한 어조로 진실을 말한다. 시간을 돌리더라도, 바뀌는 건 없더라.
다수의 시간여행 소설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것에 회의적인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질서가 있고, 시간 역행의 남발은 무질서를 만든다. 도덕적, 윤리적 규칙의 선을 지키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는 과정에서 인물은 갈등하거나 여러 번 포기하기도 한다. 또는 과거로 시간을 돌리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로 현실로 돌아오기도 한다. 숙정은 이 작품에서 그런 캐릭터의 연장선에 있다. ‘신’이라는 존재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라고 숙정은 말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바꿀 수 없더라도, 단순히 누군가를 다시 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 이들이 있다. 신은 그런 사람들에게 과거를 ‘체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다. 오메르타 작가는 무당이 ‘신-인간’의 중개자임을 비틀어 ‘현재-과거’의 매개가 되도록 설정한다. 지극히 무속적인 시간여행은 하나의 구절에서 비롯된다.
“동쪽 하늘을 다스리시매
십오 귀신을 처단하실 적에
식향하는 신루 때라
향훈에 취해 허공을 날으시며
긴나라천께 발을 맛쳐
악곡을 타고 세월을 거스르니
한 걸음에 삼백리 두 걸음에 삼일
세 걸음에 수미산 중턱에 도달하야”
제목인 ‘한 걸음에 삼백 리’는 바로 이 무가(巫歌)에서 따왔다. “악곡을 타고 세월을 거스르”며 “한 걸음에 삼백 리 두 걸음에 삼일 / 세 걸음에 수미산 중턱”까지 갈 수 있는 전단건달바왕은 가을에게, 그리고 숙경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다. 순식간에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서 복잡한 기술의 타임머신 대신 신의 힘을 빌린 것에서 작가 특유의 환상성이 소설에 잘 녹아난다. (이 소설에서 신은 ‘타임머신’ 형태의 도구로서 기능한다)
예상대로 가을은 다미를 살리지 못한다. 다만 다미가 죽기 전으로 돌아가 면회를 하는 것처럼 그녀와 대화를 한다. 가을은 다미와 이야기하던 중 주변의 이질감을 느끼며 현실로 되돌아온다. 이 짧은 과정을 보는 관점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을의 마음에 있던 응어리 하나가 풀어졌다는 긍정적 시선과 그럼에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부정적 시선. 작가는 전자의 손을 잡는다. ‘한 걸음에 삼백 리’를 가는 신의 도움은 상황을 바꾸지 못했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바꾸었다.
발 없는 소원이 달리는 삼백 리
가을은 다미를 만나고 오는 과정에서 신을 모시게 된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평산댁”은 초반과 후반에서 숙정을 찾아온다. 하지만 두 번의 방문에서 느껴지는 상황적 맥락은 완전히 다르다. 첫 번째 방문에서 숙정은 평산댁에게 ‘신이 떠났다’라고 말한다. 아들과 며느리가 사고를 당한 시점에서 받아들인 전단건달바왕이 왜 그녀를 떠났는지를 알 수는 없다. 숙정은 “상심에 빠진 가을이를 제정신으로 보살펴줄 수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한다. 작품 안에서 신이 떠난 이유는 단지 그것 때문이다.
‘신이 숙정을 떠난 사건’은 소설 안에서 큰 의미를 획득하며 변곡점이 될 수 있다. 숙정에서 나간 신이 가을에게 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은 대가 이어지는 연대와 동질감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살’로서의 인물 간 세대교체는 작품의 맥을 형성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숙정과 가을은 누군가의 ‘죽음’, 그리고 죽은 이를 만나려는 여정 가운데에서 신을 맞아들이기 때문이다. 둘의 연결고리로서 초월적 존재를 활용한다면 다양하고 단단한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은 평산댁을 “반듯이 앉아” 맞이한다. “표정의 변화”가 없는 “깊은 눈”과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입은 가을이 평범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는 암시를 한다. 가을의 목소리는 분명하고 단단하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되돌리고자 했던 한 소녀는 자신의 운명을 깨닫는다. 세상에는 욕망도, 신도 바로잡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 법당과 현실을 가르는 쪽문. 그 경계를 향 내음이 흐르듯 넘어가는 결말은 의미심장하다. 가을은 ‘무속인’으로서만 다짐하지 않는다. 다미의 친구였고, 아버지의 딸이었고, 할머니의 손녀인 자신의 복잡다단한 실체와 결국 되돌릴 수 없었던 하나의 생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운명을 직면할 수는 있다는 듯.
맺으며
오메르타 작가의 세계를 좋아한다. 특별히 작품에서 매만져지는 모든 돌기의 감촉을 좋아한다. 그건 어느 하나도 다르지 않으며 긴밀히 연결되는 동시에 특유의 모양을 형성한다. 이 소설의 생김은 ‘향’과 같다. 읽고 있자면 향의 연기가 주위를 은근히 감싸는 느낌이 든다. 돌기가 손가락에 닿는 감각은 오늘도 하나의 흔적을 만들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상상은 지금도 누군가의 머리에서 이루어진다. 형성되고, 발전하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필연이라면 우리는 우연히라도 과거를 보기 원한다. 누구에게나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어떤 사유로 헤어진 사람이 있다. 그를 보기 위해서 잠시 영혼을 여행 보내자. 작은 향과 방울만 있다면 과거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갑작스럽지 않은 작별과 가벼운 인사를 준비하기만 하면 된다.
“돌아가고 싶은 때와 장소가 있느냐?”
다정하게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묻는 보살님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지 상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