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 이전의 불변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소금기둥 (작가: 샤유, 작품정보)
리뷰어: 스트렐카, 21년 5월, 조회 116

성서의 창세기. 두 천사가 소돔을 멸망시키기 위해 찾아옵니다. 롯은 천사를 극진하게 대접했고 롯과 롯의 가족은 파멸을 피할 기회를 받습니다. 그때에 천사가 경고합니다. 돌아보지 말라고. 그러나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고, 소금기둥이 되고 맙니다.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도 비슷하죠. ‘뒤돌아보지 말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언된 ‘신의 원칙’을 어기는 순간, 되돌릴 수 없는 벌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불가해한, 인간에게는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신의 원칙은 운명을 표징합니다. 거스를 수 없는 것. 절대성. 수용해야만 하는 것 – 자신이 미진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

우리는 가끔 어떠한 영향으로부터 그 영향의 근원을 추론합니다. 존재가 영향력을 담보하지는 않지만, 영향력은 존재를 담보하기 때문이지요. 지금 이곳에 서있는 우리는 신의 원칙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사람은 사람들의 신앙을 통해 신을, 신의 원칙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특히 아이들은 언제까지나 고립될 수는 없고, 언젠가 신앙 바깥의 것을 만나게 됩니다.

하선이 만난 것은 민주였죠. 학창시절 이후, 하선이 민주를 다시금 발견한 건 ‘악마의 행진’ 속에서였습니다. 민주는 하선의 일상을 뒤흔드는 사자(使者)였고, 이번에도 하선을 혼란케 합니다. 사실 민주가 별다른 말을 한 건 아니었죠. ‘뒤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하거나 ‘저 나무열매는 먹어도 된단다’라며 유혹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저 바깥에서 온 자그마한 말일 뿐이었으나, 시간이 흘러 다시금 듣게 된 속삭임에 의해 하선은 얽매이고 맙니다. 그리고 신의 원칙을 명시적으로 어긴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런 하선은 예전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과 같은 일상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영위할 수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과거도 이전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물론 기계적으로 분석할 때, 과거는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그냥 그런 것’일 뿐, 과거에 있었던 일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해석은 바뀝니다. 어떤 변화가 과거에 대한 파라텍스트로 기능하여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혹은 의식하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자신을 향했던 의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의심… 그리고 예은.

두 사람은 이별을 앞둔 “데이트”에서 대화를 나누다 균열을 느낍니다. 명시적으로 표현되어서는 안 될 균열. 명시적인 것. 겉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흔들리더라도 언행은 그렇지 않은 것. 뒤돌아보고 싶더라도 뒤돌아보지 않는 것. 정확히 어디에 위치하는지, 무엇인지 몰라야 할 균열 위에서 이별을 고할 때, 예은과 하선은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걸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뒤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사라지는 것은, 적어도 하선에게는, 두 사람이 아닌 다른 모든 것입니다.

사실, 하선은 예은의 마음을 모를 겁니다. 예은도 하선의 마음을 모조리 알 수는 없겠죠. 어떻게 그러겠어요, 모든 것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고 드러난 것조차 진실이 아닐 수 있는데. 자신이 느끼는 것이 착각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것은 있습니다. 예은이 마지막임을 고하고, 이별의 말을 입에 담은 뒤 먼저 돌아섰음에도, 하선이 뒤를 돌아볼 때 예은도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는 것. 예은의 세계에서도 두 사람 이외의 모든 것이 표백되었을지는 하선도 우리도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두 사람이 돌아본 채 서로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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