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 작가의 소설 〈넷이 있었다〉는 점진적으로 상황을 조여오는 분위기와 순차적으로 다가오는 공포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단순하지만 불확실하고, 그러나 분명히 가까워지는 위협 아래 놓인 주인공이 겪는 짧은 에피소드는 창밖으로 이쪽을 건너다보는 네 명의 남자로부터 시작된다. 한 명, 한 명이 사라지는 과정을 통해 주인공의 집에도 하나, 하나의 괴이한 사건이 발생하며 공기의 무게마저 무거워지는 듯한 감각에 독자들은 실재하는 공포를 느낄 수 있다. 가장 편안해야 할 곳인 집이 두려워지는 순간, 세상에는 쉴 곳이 어디에도 없다는 감각이 온몸을 조여온다. 내외부가 모두 위험한 상황에서 궁지에 몰린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은 작가의 꼼꼼한 문장을 타고 읽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 소설이 얼마만큼 무섭냐고 물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숫자 ‘4’로 그 답을 대신하겠다. 〈넷이 있었다〉는 4만큼 무섭다. 우리는 사회문화적으로 4에 내재한 공포를 은연중에 감지할 수 있다. 일상에서 문득 4를 마주할 때, 붉은색으로 이름을 쓸 때 괜히 망설이게 되는 딱 그만큼의 꺼림칙함. 그것을 극대화한 작품이 바로 이것이다. 소설을 읽기로 한 당신이 두려움에 잠식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4, 3, 2, 1.
이시우 작가는 사람의 심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일에 능숙하다. 그리고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가장 적합한 소설적 장치와 맥락을 설정하는 능력도 탁월하다. 어딘지 모르는 온라인 공간에 “해괴한 발상” 같이 여겨지는 글을 올리는 상황만으로도 작품의 초반은 의문스러움을 자아낸다. “독자로부터 받을 격려나 위로”가 아닌 “영혼에 깊숙이 남긴 상처”가 주인공에게 글을 쓰는 동력을 부여한다. 아마도 ‘독자’라는 말이 있으니 그가 개인 블로그나 공개 플랫폼에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는 것이라 짐작해볼 수 있다.
서술자는 “이야기란 말하는 이의 입을 떠나고 나면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라고 하며 자신의 이야기가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알 수 없다는 듯 말한다. 이런 방식의 시작은 독자에게 글을 읽기 전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시간을 벌어준다. 이제 이 글을 당신이 읽고 나면 어떤 기분을 느낄지 나는 예상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도전하는 서술자의 당당함에 독자는 한층 더 긴장하며 스크롤을 내린다. 그가 하는 말은 나비처럼 읽는 사람의 머리에서 희미하게 날갯짓한다. 이 날갯짓이 폭풍이 되는 순간을 작가는 맹수처럼 노린다.
주인공이 처음 이상함을 느낀 사건은 어느 날 밤, “20층이 훌쩍 넘는 신축 아파트의 중간층 베란다”에서 그의 집을 향해 선 네 명의 남자로부터 발생한다. 자신을 마주하는 남자들의 얼굴과 체형, 입고 있는 옷이 모두 같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기괴한데 그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다”라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삐쭉 솟는 기분이다.
귀신, 괴몰, 좀비 등 비인간이 주는 공포는 그들이 ‘존재를 자각함’에서 온다. 귀신이 있지만, 나를 보지 않고 지나간다면 상관없다. 괴물이 전혀 나를 감지할 수 없다면 그렇게 무섭지는 않을 것이다. 다수의 미디어에서 좀비는 ‘소리’에 민감하다. 영화나 웹툰, 드라마 속 인물들은 좀비에게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그들이 그토록 신중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뭘까. 좀비가 ‘자신을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비인간이 인간을 마주하는 순간, 공포는 극대화된다.
한 명도 아닌, 네 명의 같은 얼굴이 나를 정확히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외형에서 이미 인간을 넘어선 무언가의 기운이 풍기는데, 창문 너머에 있는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서로를 ‘자각’하는 데에서 시작된 공포는 이후 “오고 있어요!”라는 아들의 비명을 통해 구체화 된다. 남자 중 하나가 주인공의 집으로 걸어왔지만, 교통사고를 당해 그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하다. 그러나 그건 두려움의 서막에 불과하다.
“현관문을 열려고 보안키 패드를 켰는데 그제야 문의 잠금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나더군요. / 그러니깐 그때까지 현관문은 닫혀만 있는 채로 잠금장치가 걸려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보안키 패드에서 잠기는 알림음이 울린다. 작가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사소한 변화를 통해 은유적으로 집 안에 모종의 일이 생겼다는 걸 암시한다. 서술자가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서 이상해진 집안을 보는 것보다 이 방법이 훨씬 강렬하다.
흔히 공포영화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반드시 으스스한 배경음악을 깐다. 멜로디가 고조됨을 느끼며 관객은 마지막 한 방이 터지기를 기다린다. 그 끝에 정말 무언가 튀어나오든 예상과 달리 밋밋하게 끝나든 관객은 음악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집중했던 긴장을 푼다. 작가가 보안키 패드로 형성한 분위기는 바로 이런 역할을 한다. 독자에게 ‘자, 기다려. 조금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거야.’라는 예고장을 날리며 한걸음, 한걸음 집안으로 안내한다. 간접적인 문장 하나로 이런 으스스함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다. 내부의 상황이 아닌 집 밖의 소리로만 공포감을 형성한다는 건 더욱 어렵다. 그러나 작가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독자들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주인공의 집 안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냉기”를 느낀다. “무표정의 가면”을 쓴 딸이 그를 올려다본다. 딸의 행동은 평소와 다르다. 다른 날에는 볼 수 없던 어긋남이 주인공에게 위화감을 준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딸은 “창밖 구경”을 한 후로 이상해졌다. 기이하게 창 너머로 이쪽을 보던 네 명의 남자는 둘로 줄어 있다. 갑작스레 일어난 교통사고, 그리고 묘하게 달라진 딸. 이제 독자는 두 개의 사건이 더 일어날 것을 짐작한다. 그날 밤, 남자의 아내는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기운을 풍긴다.
이후 등장하는 장면은 전과 다르다. 약간의 환기를 시키려는 듯, 작가는 독자들에게 ‘바깥 구경’을 시켜준다. 하지만 그것도 전혀 일상적이지 않다. “요란한 옷과 장신구”를 달아 무당을 연상케 하는 남자와 여자는 주인공을 보자 대뜸 소리를 친다. 계약금까지 물리며 남자를 돌려보내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주는 위기감은 절정에 달한다.
“이미 왔어요…. 늦었어요…. 뭘 해야 하는지 아시잖아요….”
이후 남자는 마치 귀신에 씐 듯 자신의 가족을 모두 죽인다. 이런 마무리는 단순히 남자가 ‘자기변명’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아쉬움을 남길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끝까지 이 모든 사건이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개입한 결과임을 증명한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따위는 없었다”, 남자가 전화를 걸었던 무당들의 전화번호는 “존재하지도 않는 번호”였다.
“넷이었는데 하나만 남았다”. 남자가 가족을 죽인 그날에 마지막으로 되뇌던 이 문장에는 중의적 의미가 담겨있다. 하나,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들이 넷이었다가 하나만 남았다. 둘, 자신의 가족이 넷이었다가 혼자 남았다. 셋, 일어날 일이 넷이었다가 하나만 남았다. 어떤 의미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이 작품은 여러 방향의 해석이 가능하다.
작가는 첫 번째 해석의 손을 들어준 듯하다. 주인공이 글을 맺는 순간에도 “창문 너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옷 남자의 뚜렷한 존재감”만이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남자가 언제 집으로 건너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려움에 떠는 주인공은 심리적 불안에 갇혀 남은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작가가 주인공에게 주는 가장 큰 벌이자, 주인공의 모든 행위를 마무리하는 결정적인 매듭이다.
끝난 줄 알았다면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장치 하나를 짚지 않고 넘어갔다. 그건 바로 ‘어투’다.
작가는 ‘청자’를 설정하고 그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네는 서술자를 상정한다. 왜 이런 형식을 취했을까.
앞서 말했듯 진정한 공포는 그것과 자신이 ‘마주함’에서 발생한다. 화장실의 거울, 아파트 엘리베이터, 텔레비전 등을 매개로 하는 공포물이 식상하지만 관습적으로 거론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것들은 대부분의 사람이 하루에 한 번 이상 마주하는 물건이다. 거울에서 나를 마주 보던 또 다른 내가 기괴하게 움직이는 영화를 봤다고 하자. 관객은 집에서, 회사에서, 쇼핑몰에서 화장실 거울을 볼 때마다 이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가까움은 일상의 공포를 만든다.
‘말 건네는 어투’는 작품의 초반부터 은연중에 독자와 친밀감을 형성한다. 그것은 때로 읽는 사람과 가까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작가들이 종종 사용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독자는 작품을 읽는 동안 내용에 집중하기 때문에 서술자가 말을 건네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모든 사건을 설명하는 내내 독자에게 분명히 말을 건다.) 내용이 맺어지는 가장 마지막 장면을 보며, 독자는 비로소 그가 경고하는 한 마디를 통해 소설 안의 모든 문장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부디 여러분의 가정에는 평온과 안녕만이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이 문장은 주인공이자 서술자가 독자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을 준다.
무언가 떠오르지 않는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가.
모든 사건은 창문 너머 주인공을 ‘바라보는’ 네 명의 남자가 등장하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