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되돌리려는 욕망은 ‘무언가를 바로잡고자’ 하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할 수 없음’이 소설 안에서 가능케 되는 것. 그것이 작가로 하여금 시간을 되돌리게 하는 기폭제가 된다. 우리는 때로 ‘-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할래?’라는 질문을 나눈다.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다’와 ‘그렇게 되어도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공존하는 시간여행의 상상은 불가능하기에 매력적이다. 해도연 작가의 〈콜러스 신드롬〉은 특별히 일정 시간이 반복되는 ‘타임루프’를 다루고 있다. 과거로 여행하는 소설을 볼 때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작가는 무엇을 위해 불가능한 현상을 시도했을까.
수많은 이유로 시간은 되감길 수 있다. 그리고 기왕 확률이 0인 상황이 발생해야만 한다면 조금 더 기적을 바라도 좋지 않을까. 작가는 ‘시간’과 함께 어떤 병을 소설 안에 등장시킨다. 작품에 등장하는 ‘콜러스 증후군’은 뇌에 손상이 축적되는 가상의 질환으로 주인공 유슬이 시간여행을 마주하게 하는 일종의 버튼이다. 이 소설은 ‘20분의 1로 콜러스 증후군을 앓을 아이를 낳아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이의 눈에서 별이 빛나고 있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신의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부모의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슬플 것이다. (슬프다는 말로는 그 감정의 소용돌이가 설명되지 않는다) 아이의 모습 때문이 아니다. 아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상황과 조건, 그리고 사회의 시선을 견딜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 현실적인 가정이 끊임없이 아이에게 얽힌다. 특별히 여성은 생각보다 많은 확률로 아이를 낳을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의 결정을 내려 아이를 낳거나 낳지 않는다. 두 가지 모두 여성에게 일정 수준의 각오가 따라야 한다. 〈콜러스 신드롬〉에서 주인공 유슬은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고 하던 공부를 내려놓는다.
이 작품은 때로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여성의 선택을 다각도로 섬세하게 살핀다. 그러기 위해 작가는 콜러스 증후군인 딸을 낳기로 하는 엄마 ‘유슬’을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작품의 시작에서 유슬은 아이를 낳았고 딸인 현아에게 콜러스 증후군이 발현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20분의 19의 확률에 들어간 것이다. 남편인 재호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독자들은 그것을 잠시 미뤄두고 ‘유슬의 앞날’에 초점을 맞춘다. 작가는 일인칭으로 소설을 써 내려간다. 이는 독자들이 재호보다 유슬의 시점에 공감하기 쉽도록 한다. 그리고 유슬의 시선에 전혀 의심을 품지 않도록 치밀한 암막을 친다. 독자들은 덕분에 한 치의 의심 없이 작품을 읽으며 오피스텔과 수면제를 보고 ‘맙소사!’라고 소리를 지른다. 불륜이구나. 산을 넘으니 또 산이 나오는구나.
하지만 여기에서 시점의 반전이 생긴다. 그건 “밝은 분홍색 호텔이 아기자기하게 그려진” 노트에서 시작된다. 재호의 오피스텔에서 유슬이 본 건 “립스틱이 묻은 화장지와 타액이 묻어 입을 수 없는 남녀 속옷”이 아니었다. 작가는 이 장면에서 독자의 눈앞에 쳤던 암막 커튼을 확 걷어버린다. 강한 펄럭, 소리와 함께 진실을 마주한 독자는 고민에 빠진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왜냐하면 이건 (그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온전한 유슬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불쑥, 지금까지의 상황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해야 하는 재호의 시선이 작품에 침입한다. 아니, 이것은 잠입이었을 수도 있다. 재호는 소설의 시작부터 자신의 정체를 은밀히 숨겨왔다. 재호의 노트를 읽으며 유슬은 경악한다. ‘자신의 선택’인 줄 알았던 어떤 상황이 사실은 ‘타인의 선택’에 의해 꾸며진 것이었다. 마치 작은 미니어처 인형처럼. 누군가 지어둔 레고 집 안에서 반복되는 시간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유슬은 깨닫는다. 독자는 이제 두 개의 시점을 가지고 작품을 읽는다. 유슬과 재호. 유슬은 노트를 통해 재호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한다.
재호는 타임리퍼였다. 시간을 되돌리는 사람. 그리고 시간을 되돌리는 건 ‘갑각류 알레르기’. 좀 웃기고 생소하지만 시간여행을 하는 데에 거창한 장치는 필요 없다. “게껍질 가루를 넣은 병”만 있으면 된다. 얼마나 간편한가. 하지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기엔 대가가 필요하다는 듯, 긴 시간을 여행하기 위해선 큰 고통이 뒤따랐다. 재호는 “말하기 부끄러울 만큼 하찮은 이유로” 경증 콜러스 증후군을 앓고 있던 딸 윤하를 낳기 전으로 시간을 돌린다. 그리고 윤하가 없는 삶을 살던 그는 “유나”를 만난다. 유나는 콜러스 증후군의 특징인 ‘빛나는 눈’을 가지고 있었고 재호는 그 눈을 보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닫는다. 그것이 재호가 갇히는 ‘타임루프’의 시작이다.
이후 재호는 윤하를 지웠던 것보다 더욱 끔찍한 행동을 한다. 정확하게 윤하와 같은 아이가 나올 때까지 시간을 반복해서 돌리기 때문이다. 그 루프 안에서 열여섯 명의 유슬과 그녀의 아이들은 “존재한 적조차 없는 것”이 되었다.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이 힘들다는 이유로. 아들과 딸, 중증과 경증 콜러스 신드롬 사이에서 재호가 자신의 첫 번째 딸 윤하를 찾는 동안 ‘그게 아닌’ 종류의 아이들은 삶을 잃었다. 이 지점은 현재까지 아이를 낳는 여성의 선택 담론을 다루던 모든 소설과 결을 달리한다. ‘선택의 주체’를 보는 초점 자체가 다른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재호의 실체를 알게 된 독자는 ‘선택의 주체’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유슬이 현아를 선택한 것일까, 재호가 유슬의 선택을 유도한 것일까. 결론부터 내보자면 둘은 완전히 다른 질문이다. 유슬은 열일곱 번의 삶 모두에서 자신의 아이(윤하든 현아든)를 낳는다. 하지만 그 아이들을 ‘포기’한 것은 재호다. 시간을 되돌리는 열여섯 번의 ‘레고 하우스’를 만든 건 재호다. 그 큰 틀을 만들 권한은 재호에게 있었다. 유슬은 작은 하나하나의 틀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우리가 탓하는 건, 그리고 안타까워하는 건 유슬의 선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아이를 낳는 결정이든 낳지 않는 결정이든. 거대한 틀을 만든 재호는 ‘유슬에게 잘못이 없음’을 역설하는 독특한 인물로서 기능한다.
〈콜러스 신드롬〉은 이처럼 주로 인물의 관계를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 유나의 아빠이자 유슬을 좋아했던 후배 수하는 작품 안에서 독특한 경험을 한다. 재호가 타임리프를 하는 십수 번 중 세 번을 ‘우연히’ 함께한 것이다. 재호와 가까이 있던 인물 중 유독 수하만 과거로 돌아가는 사건을 겪은 이유는 뭘까. (타임리프가 ‘기억이 보존된 상태’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두 번째 타임리프에서 아내가 그를 다시 찾아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수하에게만 시간의 역전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수하에게는 ‘콜러스 증후군’ 유전자가 있었다. 수하의 아이 ‘유나’에게 발현된 형질은 그에게서 온 것이었다.
작가는 이미 이 지점에서 시간여행이 단순한 알레르기 반응이 아닌 ‘콜러스 증후군 유전자’와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재호에게 콜러스 증후군의 유전자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윤하의 콜러스 증후군은 재호에게서 온 것이 된다.
신기한 일이다. 이 작품은 종종 누군가에게 향하던 원망이 가득한 화살의 끝을 모호하게 만든다. 아이가 장애 또는 어떤 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닐뿐더러 그런 상황 자체에도 당연히 잘못이 부여될 수 없다. 그렇기에 〈콜러스 신드롬〉은 윤하의 상태가 아닌 재호가 벌인 참혹한 일의 결과에만 집중한다. 작가는 가상의 증후군을 소설 전반에 걸쳐 의도적으로 주목받지 않도록 한다. 잘못은 윤하를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린 재호에게만 있었고 그것을 해결하는 일이 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재호는 자신이 만든 끔찍한 루프에 갇힌다. 윤하와 윤하와 윤하와 윤하에 갇힌 재호에게, 아니, 재호가 볼 수많은 윤하들에게 유슬은 말을 전한다.
“윤하에게 전해 줘. 엄마들이 널 너무 사랑한다고. 너의 동생들도 모두 널 사랑할 거라고.”
사랑과 화해가 필요했던 모든 나에게
재호의 타임리프 이후로 등장하는 “열네 명의 현아”와 “열여섯 명의 유슬”에 대해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리뷰에 개인적인 감상이나 상황을 흔하게 적는 편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이상하게 무언가를 덧붙이게 된다. 아마도 그건 내가 이 소설의 내용과 상당히 밀접한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나는 태어나기 전,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양수검사에서 다운 증후군의 가능성이 있었다. 엄마는 나를 낳기로 했고 이 소설의 현아처럼 나는 다운 증후군이 아니었다. 다만 코와 입 사이가 갈라진 채로 태어났다. 20년이 넘도록 나의 탄생 설화(?)는, 애석하게도 입을 맞추지 못했던 부모님과 친척 어른들을 작가 삼아 아주 많은 갈래의 버전으로 각색되었다. 아주 어렸을 때, 나는 이모에게 코 아래의 흉터가 ‘유리 조각’에 찔린 상처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 인중에 난 흉터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다’라고 말했고 아버지는 가끔 ‘너 입천장에 아직도 구멍이 있니’라고 물어보신다. (난 이 말을 듣기 전까지 내 입천장에 구멍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어릴 때 수술이 잘 되어 아물었기 때문이리라.) 어른들이 말을 맞추지 않은 탓에 나는 일찌감치 다들 일정 비율 이상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덕분에 좀 우습지만, 여전히 내 코 아래에 있는 상처의 원인은 미스터리다. 아마 이런 쪽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아버지의 말이 가장 신뢰성 있다는 전제하에 그냥 살고 있을 뿐이다.
〈콜러스 신드롬〉과 같은 소설에 유독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는 살면서 여러 갈래의 내가 있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어렴풋하게나마 경험했다. 왜곡되고 가려진 수많은 이야기 속의 나를 한동안은 사랑할 수 없었다. 한 존재로 온전히 봐주지 않는 어른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지금도 나를 낳기 직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를 낳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가끔 이야기한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그런 것들뿐이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인정하는 일이 어렵다. 부끄럽게도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있다.
“엄마들이 널 너무 사랑한다고”. 작품의 후반부에서 유슬이 재호에게 했던 말을 읽고 한참을 먹먹하게 있었다. 나의 엄마도 열일곱 번 시간이 되돌아갔다면 나를 선택했을까. 그러지 않아도 좋다. 아니, 사실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나 엄마가 선택할 아이들이 몇 명이든 그들이 모두 이야기가 되어 내 곁에 남아있는 상상을 한 번쯤 해보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완전히 잊히지 않은 어느 순간의 내가 어른들의 기억에는 희미하게 존재하는 걸까. 어쩌면 그들이 말해준 것은 전부 사실이었던 게 아닐까. 다른 세계, 다른 공간에서 이모는 유리 조각에 코를 다친 나를,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작은 수술 자국처럼 생긴 상처가 있는 나를 만난 것일지 모른다.
어느 시간 선상에 존재했던 나와 내가 만나 화해하는 것을 상상한다. 개인의 불편으로, 사회의 시선으로, 때로 배려하지 않음으로. 태어났지만 외면당하는 이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 모두가 바라는 건 오직 한 가지 사랑이리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밤하늘의 별을 본다. 우리의 눈에 모두 하나씩 박힌 검은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멀리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아이의 인중에서 물결무늬가 보인다. 유슬이 윤하에게 그랬듯 나도 이제 나에게 인사를 건네야겠다.
안녕. 사랑과 화해가 필요했던 모든 시간의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