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한국의 싸이버펑크 공모(비평)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바이오 드론 (작가: 도련, 작품정보)
리뷰어: 냉동쌀, 21년 4월, 조회 112

이 작품은 크게 세 가지 측면로 분할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제목에서 나와있듯이, 여성, 한국, 그리고 싸이버펑크입니다.

우선 싸이버펑크 측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어째서인지, 인터넷에 우리나라와 싸이버펑크를 연관시키는 밈 같은 것이 퍼진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도시, 특히 서울과 부산의 풍경을 찍은 사진이 ‘싸이버펑크’스럽게 느껴진 것이 ‘싸이버펑크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녔습니다. 해당 사진의 공통점은 대체로 어둡고, 그렇지 않더라도 삭막하고, LED 조명과 네온사인이 화려한 거리 풍경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싸이버펑크라는 장르의 주요한 특성이기도 합니다.

제가 SF 장르에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라, 싸이버펑크에 대해서는 아주 약간의 사실만 알고 있습니다. 상술한 싸이버펑크 서울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어둡고 삭막하고, 동시에 번쩍거리는 이미지로 대표되죠.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대표적인데요, 싸이버펑크는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합니다. 미래를 다루는 SF가 그러하듯 매우 발달한 과학기술과 발달하지 못한 윤리의식을 테마로 하는 작품이 많죠.

‘바이오 드론’에서는 인간의 뇌를 사용하는 군사용 드론이 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신체의 일부를 기계로 대체하거나, 아예 신체의 일부를 기계의 부품으로 사용한다는 설정은 이러한 싸이버펑크 장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소재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차별화되는 점이라면, ‘노인’의 뇌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어느 신체 부위든 젊은이의 것이 노인의 것보다 성능이 좋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 어째서 노인의 것을 사용했을까요?

작품 내에서는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의 뇌를 사용한다]는 서술을 통해 그 이유를 간접적으로 알려줍니다. 어쩌면 정부가 젊은층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평주’의 대사를 통해 조금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평주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이라며 기꺼이 보내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자주 들어본 슬로건입니다. 대다수의 남성 독자분들께서는 특히 더 질리도록 들었을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전쟁을 위한 구호입니다.

전쟁의 본질은 정치인에 의해 젊은이가 희생당하는 것에 있습니다. 본작에서는 그것을 뒤틀어 정치인에 의해 늙은이가 희생당하는 것으로 바꾸었군요. 그러나 희생당하는 사람이 바뀌었을 뿐 본질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노인의 뇌를 적출하여 드론의 부품으로 사용하자는 의견에 동의하는 자들은 모두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만약 정치인들의, 그리고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는 평주의 차례가 되었을 때도 그들은 순순히 자신의 뇌를 내줄까요? 작품 내에 서술되어 있진 않으니 그럴수도 있지만, ‘치매에 걸린 연기’를 하는 이성순의 모습을 보면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소시민인 이성순은 철저하게 준비를 한 공무원에게 들켜 버렸지만, 정치인들에게도 그런 준비를 할까요? 만약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분이 있다면 휠체어에 탄 채 법원에 출두하는 높으신 분들의 모습을 상기시켜드리고 싶군요.

이렇듯 과학의 발전을 쫓아가지 못하는,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모습은 싸이버펑크의 삭막하고 혐오스러운 미래 풍경을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광경을 통해 현재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두 번째 측면은 한국입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상당히 ‘한국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비단 싸이버펑크와 인터넷 상의 서울 풍경을 연결시켰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저는 한국 근현대사를 ‘억압과 저항’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일제 강점기는 물론이요 광복 이후로도 민중은 억압적인 지배자를 겪었고 그에 저항해 왔습니다. 3‧1 만세운동부터 시작해서 6월 민주 항쟁으로 이어지는 저항의 역사는 한국인의 피부 아래에 흐르고 있습니다.

특히 광복 이후 북한과의 날 선 대립이 극에 달하였던 시절, 독재 정부는 민중의 적을 북한으로 돌렸습니다. 물론 북한이 위험한 상대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독재 정부는 그런 북한에 대비한다고 하면서 민중의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려 했습니다. 미국에서 불었던 메카시즘의 광풍이 한반도를 덮쳤습니다. 독재 정부에 저항하는 이들은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으로 몰려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지금도 민주화의 물결이 북한의 남파간첩의 선동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본작에서는 그런 암울한 시기의 대한민국 모습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우경화 및 권위주의 정부는 ‘빨갱이’라는 단어를 통해 시민들을 서로 분열시킵니다.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중장년층 및 노년층은 여전히 ‘백골단’의 공포에 시달립니다. 시위대의 모습이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홍콩의 민주화시위를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

민경이 광화문 광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하는 모습은 상당히 상징적입니다. 독재 정부의 마지막 잔재가 아직 청와대에서 버티고 있던 때, 전국민이 그곳에 모여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했습니다. 국민의 손으로 그를 끌어내렸던 그 순간부터, 광화문 광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시민의 모습은 그 자체로 무거운 의미를 담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작품이 ‘한국적’이라고 느낀 이유입니다.

마지막 측면은 ‘여성’입니다. 이 작품에서 여성은 잘못된 제도의 피해자이기도 하며, 그에 소극적으로 벗어나려는 소시민이기도 하며, 적극적으로 저항하려는 운동가이기도 합니다. 작품을 관통하는 사건의 모든 단계에서 각자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점에서부터 여성의 다양한 일을 한다는 점이 부각되기도 하는데요, 드론의 부품을 조작하는 일, 그것을 ‘형광등 수리’에 비유하는 것, 수학에 뛰어난 할머니 등 기존 여성에 대한 편견을 하나하나 짚으며 지워나가는 것이 삭막한 작품 속에서 따스하기까지 합니다.

전통 있는 장르 중 그렇지 않은 것이 어디있냐마는, SF, 특히 싸이버펑크는 여성과 거리가 있는 장르로 여겨져 왔습니다. 어쩌면 과학과 여성은 친하지 않다는 편견이 작용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SF의 주요한 작가들은 대개 남성이었고, 그 등장인물 또한 남성으로 가득하거나, 혹은 ‘남성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여성’이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태어난 작품들의 뛰어난 작품성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채로운 문학의 양상을 지향해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들어서야 다양한 시도를 통해 ‘여성의 SF’가 재등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작품처럼 보다 다양한 작품세계가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본작은 ‘여성’, ‘한국’, 그리고 ‘싸이버펑크’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요소를 훌륭하게 요리해낸 작품입니다. 세 요소 모두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자기의 풍미를 뽐내면서 유화가 잘 된 알리오 올리오처럼 서로 조화도 이루고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한끼 식사와도 같은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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