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식혜 한 그릇처럼, 양이 적고 단순하지만 달콤하면서 애처로운 역사소설을 읽었다.
이 작품은 분명 역사소설이지만 시대 배경이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다. 주인공 소년을 부리는 자가 ‘대감’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해당 호칭은 신라, 고려, 조선에서 모두 쓰였으니 그것만으로 시대를 단정할 순 없다. 게다가, 이 작품엔 실존인물이 나오지도 않으며 심지어 작품 속 등장인물의 이름마저도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처음 등장할 때 소년의 이름은 ‘갑쇠’고 소녀는 고유명사로 된 본명마저도 없어서 그냥 ‘계집애’라 불린다고 나온다.
줄거리에서도 김유정의 <동백꽃>과 황순원의 <소나기>를 닮은 색채가 보여 참신하다고 말하기엔 부족하다. 요약하자면 “대감의 집에서 종살이하는 소년과 자유 농민의 딸로 추정되는 소녀가 일터에서 만나 풋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확인하지 못한 채 소년은 죽고 소녀는 혼자 남아 한을 삭힌다” 라는 것이 이 작품의 줄거리이다. 상기 작품들과 이 작품이 다른 점을 찾으라면 소년이 사랑에 적극적인 편이고(<동백꽃>과의 차이점), 마지막에 세상을 떠나는 쪽도 소년이라는 것(<소나기>와의 차이점)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에 내 리뷰 사상 처음으로 별 다섯 개를 주었다.
이 작품은 어디서 본 것 같아서 더 현실성 있는, 다시 말해 그 시절에 정말로 있었을 법한 일을 다루고 있다. 소년과 소녀가 노동하는 모습, 누구에게 예속되어 있는 자신의 신분에 염증을 느끼고 탈출을 꿈꾸는 노예 소년의 마음, 끝내 그 꿈도 자신의 사랑도 이루지 못한 채 산에서 죽는 소년의 모습 모두에 현실성이 120% 담겨 있다. 소위 ‘있는 놈들’이 독점한 역사의 그늘 아래, 설화에조차 담기지 못한 기층민들의 삶 속에… 정말로 소년 같은 사람이 있었을 것 같지 않은가? 내 보기엔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이름과 세부적인 삶의 모습은 다르겠지만 노동과 예속에 시달리며 자유로운 삶을 꿈꾸다가 죽어 간 소년들이 더 있었을 것이다. 당장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만적(생년 미상~1198)이 그런 삶의 행로를 밟아 가지 않았던가.
또한, 이 작품은 소년과 소녀가 서로의 이름을 지어 주는 장면으로 사랑이 어떻게 사람의 삶을 바꾸는지 가장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다. 상기했듯, 처음에 소년은 이름이 ‘갑쇠’였고 소녀는 여자라는 이유로 본명을 갖지 못하며 보통명사로만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과 소녀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까치’, ‘달님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면서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삶으로 이행했다. 이름은 개인 존재를 규정하는 첫 발자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갑쇠’라 불리던 시절의 소년과 ‘까치’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소년은 완전히 다른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고, 이름이 없던 소녀와 ‘달님이’란 이름을 갖게 된 소녀도 마찬가지로 완전히 달라졌다. 비록 까치와 달님이의 물질적, 사회적 처지는 달라진 게 없을지라도 그들 마음 속에는 이름과 함께 사랑의 기억이 깃들었다. 또한 그 둘 모두 죽기 직전까지 둘이서 나눈 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갔으며 또 살아갈 것이니, 이름이 생긴 뒤 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다른 삶”이라고 일컫는 건 전혀 과장이 아니다. 달님이와 까치는 이름으로 인해 종전과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살았고, 그 이름은 결국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랑이 두 사람의 삶을 바꾼다’는 이 작품의 요는 전혀 식상하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오히려 까치의 단단한 부리와 지금 내 창문 밖으로 비치는 하이얀 달빛처럼 명징하기 이를 데 없다.
소녀가 갑자기 날아든 까치를 쓰다듬으며 소년을 추억하는 결말은 야생동물의 습성을 생각한다면 다소 작위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빗물 작가가 결말의 그러한 작위성을 작품이 넘치도록 가진 현실성으로 메우면서 작품 이후 소녀의 삶을 보여주는 도구로 활용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녀의 남은 삶은 전근대의 다른 여자들과 다름없이 살아가다가도 문득문득 까치를 보면 소년을 그리워하게 되는 인생이리라. 작품이 끝난 이후 소녀의 인생이란 나이가 차 누구에게 시집가서 아이들을 낳고 기르며, 고된 농사일과 집안일에 시달려 남는 시간이란 오로지 늙어가는 시간뿐인 삶일 것이다. 그러다가도 명절날 음식 냄새를 맡고, 혹은 초겨울 마당 감나무에 아직 남은 까치밥을 먹으러 집으로 까치가 날아오는 날이면 소녀는 그 까치에서 소년을 다시 볼 것이다. 늙어 눈이 침침해져 더 이상 시각을 쓰기 어렵게 되면 까치 소리를 어렴풋하게나마 듣기라도 하리라.
언제일지 소년을 다시 보는 날이 오면 소녀는 삶에 찌든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라 다시 어린 날의 모습으로 돌아가 소년을 향해 발밤발밤 나아갈 것이다. ‘계집애’, ‘누구네 각시’, ‘누구 엄마’ 이따위 이름들은 다 버리고 오롯한 ‘달님이’로 돌아가 다시 소년과 만날 것이다. 소년은 그때까지 저승으로 가는 물마루를 넘어가지 않고서 소녀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서로 ‘달님아’, ‘까치야’ 하고 이름을 불러 주고서 저승 물마루 너머로 손 잡고 가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이 내 눈엔 벌써부터 보인다.
이런 작품을 써 준 빗물 작가님께 진심을 다해 감사드리며 건강하게 오래오래 작품 활동 해 주시길 바란다.